허락받지 못한 곳
『2016년,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 지구적 지각변동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태평양 지대에 있었는데, 태평양판이 침강하면서, 환패평양 지대에 있던 모든 섬과, 육지들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게 된 것이었다.
자연은 인간들의 세계 지도를 완벽하게 뒤바꿨으며, 그에 따른 대가는 수억 명의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특히, 15000m 깊이의 해구로 변해 문명을 잠식시킨, 일본열도가 그 참혹함을 증명해주었다.
이 자연의 심판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유대감이란 속성을 자극시켰다.
덕분에 모든 국가들은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이해관계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단 6년 만에 다시 세계를 재건시킬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후, 문명은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류의 관심은 당연히 그 엄청난 깊이의 '심해'로 쏠렸고, 지구 내에 있는 또 다른 '우주'인 그곳으로 인류는 과학의 발걸음을 옮겼다.
심해는 지구의 속살이라는 상징을 가진 만큼, 그 끝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허나, 인류의 지식의 시냅스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과학은 그보다 훨씬 더 깊었다.
인류는 마침내 저 심해 밑바닥에서의 파괴적인 수압을 이겨 낼 수 있는 초강도의 합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이후의 단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 정거장을 건설하고, 그 아래를 이어 1000m마다 연구기지를 건설하는, 그 과정은 흡사 식물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는 그 과정과 비슷했다.
인류는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아무도 도달하지 못 한 그곳으로 빠르게 내려갔고, 마침내 그 호기심의 뿌리가 심연의 바닥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
-탐사 1일째-
"안녕하세요, 이번 탐사를 같이 하게 된 '이우혁'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전 '주연'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한 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넵튠(Neptune) 프로젝트.
바다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길을 1000m마다 나누어, 각각의 구간에서 그 환경을 연구하는 인류의 도전적인 탐사 프로젝트.
난 이 탐사 계획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 프로젝트의 본질과 가장 들어맞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나의 임무는 수심 15200m, 15번째 플랫폼에서의 해저 연구였다.
한 마디로, 지구상 가장 깊은 바다의 끝에서, 생태계, 화학 조성, 지질 활동 등을 관찰하는 선두의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인류 최초로 그 심해의 밑바닥에 도달한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이 15번째 플랫폼에 자원하도록 만든 가장 주된 요인이었다.
해상 정거장에서 심해의 바닥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 시간들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한 플랫폼씩 내려갈 때마다 완벽하게 달라지는 바깥의 풍경이, 그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한 것은 흰수염고래였다.
TV나 책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무언의 이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며 천천히 플랫폼 주위를 항해하는 그것의 모습은, 분명히 내가 알던 그것의 모습과 같았지만, 그 웅장함은 어떤 다른 매체에서의 그림자와도 비교가 안되었다.
생명체는 12000m를 선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론 지독한 고요와 암흑만이 이어졌다.
사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심해의 밑바닥은 다른 용어로 불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의 풍경은 윗세상의 그것과는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바닥엔 지구와 나이를 같이 할 정도의 암석들뿐이며, 빛은 단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그 지독한 어둠 때문에 이미 물은 원래의 푸른 색을 잃고, 기분 나쁜 검은색 만을 발하고 있다.
이런 풍경들을 종합해보면, '심연'이라는 단어가 이곳에 가장 잘 어울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공허한 심연.
"이 교수님, 보급품은 6일 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본격적인 연구 작업은 미리 계획한 대로, 내일부터 진행하고요."
나의 이 사무적인 말투에, 그가 인간적인 말투로 답했다.
"그렇군요. 내일부터 바쁜 하루하루가 이어지겠어요."
난 그 불필요한 말에 따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데, 그는 계속해서 그 삐죽 튀어나온 입을 움직여댔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신념에 맞는 행동을 하는 법이죠. 그래서 그런데, 주연씨는 무슨 뜻을 가지고 이번 임무에 지원하게 되었나요?"
그 질문엔 왠지 모르게 답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인류 최초로 심해의 끝을 탐험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뿐이라서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입모양이 과장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그렇군요! '최초'라는 단어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죠. 주연씨는 '최초'의 인간의 발자취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음...?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네...?"
"아, 너무 깊게 생각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제가 연구하고 있는 이론을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인류의 기원과 심해 사이의 연관성이란 이론이요."
(학자라는 사람들은 전부 다 지식의 괴시욕이란 것을 가지고 있나?)
그의 이론은 마치 빛보다 빠른 물질이 존재한다고 외쳐대는 미련한 과학자들의 그것 만큼이나 터무니없었지만, 난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답했다.
"흥미로운 이론이네요."
나의 이 영혼 없는 대답과 달리, 그의 말은 활기가 넘쳐흘렀다.
"네, 무척 흥미로운 이론이죠. 인간이라는 종이 이 아무것도 없는 심해의 밑바닥에서 그 삶을 시작했다니. 아무튼간에 전 반드시 이 이론을 증명해 낼 겁니다!!!"
똑똑한 사람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보다 위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에휴...피곤한 사람을 만났네...)
이런 심연 속에서도 악연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한숨이 절로 나올 뿐이었다.
-탐사 2일째-
"제가 화학 성분 조사를 할테니, 교수님께서는 지질 조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거야 쉽죠, 제 전공이니까."
난 이 사람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활기가 넘치는 건 좋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
'학자라는 사람이 어쩜 이렇게 경박스러울까?'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신 활동의 에너지를 그런 곳에 쓰는 것마저 아까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난 컨트롤 룸에 가, 해수 흡입 장치를 가동시켰다.
이어서 둔탁한 것이 수중에서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추어 계기판의 게이지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고, 약 3분 정도 지나자 막대가 모두 초록색으로 차올랐다.
난 장치를 락다운시키고, 그대로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들어가자, 마치 해변의 파도처럼 요동치는 심해수가 눈에 들어왔다.
(와아..진짜 투명하네...)
마치 유리처럼 투명한 그 물은, 출렁거림이 없다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맑았다.
바깥에 보이는 모든 검은 물들이 사실은 이런 순수한 색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동안 놀라워 했지만, 난 이내 다시 연구에 집중했다.
심해수의 표본 150ml를 뽑아, 성분 분석기에서 그 데이터를 산출하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어와 숫자로 이루어진 그 복잡한 데이터를 막힘없이 읽어내려가던, 나의 눈이 마지막 수치에서 멈춰섰다.
[ 순도 100% 그 어떤 다른 분자도 존재하지 않음. ]
(음...뭐..뭐지..?)
바닷물은 물과 여러 성분들이 섞여 있는 생명의 수프와 같다.
즉, 그 안에는 반드시 이온이나 박테리아 같은 것들이 들어있어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의 결과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물 속에는 그 어떤 다른 성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순수한 물 그 자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순간, 어떤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이곳은 인류가 한 번도 오지 못 했던 미지의 장소이고, 그렇다면 상식을 벗어난 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
이런 생각이 들자, 방금 전까지의 의구심이 사라지며, 놀라움 만이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
그 놀라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에 대한 경외감으로 그 형태를 바꾸었다.
(이토록 완벽하게 순수한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인류의 기술은 이제 자연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오만한 종의, 헛된 망상이었던 것이다.
"이 교수님, 지질 조사는 전부 끝마치셨습니까?"
"네, 방금 전에 끝냈습니다. 그저 전부 다 화강암뿐이더라고요."
"아, 네~"
오늘의 계획을 다 실행했지만, 예상외로 시간은 꽤 많이 남아있었다.
이 교수는 그 이상한 이론을 연구하러 자신의 방에 갔고, 나도 내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모든 일을 마친 뒤에 이어지는, 승리의 휴식 만큼 달콤한 건 이 세상에 없다.
"아, 편하다~"
그렇게 서서히 감겨 오는 눈과 함께, 난 내 무의식의 세계로 하염없이 떨어져만 갔다.
얼마나 잤을까, 무엇인가가 소용돌이치는 소리에 난 눈을 떴다.
서서히 밝아지는 나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내 방의 창문, 아니 그 밖의 풍경이었다.
"뭐..뭐야 이게??!!!"
심연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색채가 창문 너머에서 너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난 방을 급히 나오며, 이 교수를 불렀다.
"이 교수님! 큰일났습니다, 지금 밖에서..."
그는 마치 나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지식으론 설명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할 일은 그저 저것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뿐입니다."
그런 그의 말은 그 침착함 때문인지 몰라도, 이상하리 만큼 납득이 갔다.
그의 말에 따라, 난 전경이 제일 잘 보이는 컨트롤 룸에 가, 그 이상한 현상을 기록에 남기기 시작했다.
<기록-심연의 안개>
1. 안개처럼 보이는 하얀 색채는, 스스로 발광하는 어떤 입자의 성질에 의한 것으로 파악됨.
2. 발광하는 입자의 크기는 상당히 미세할 것으로 예상됨.
3. 온도를 측정해 보았지만, 심해수의 온도와 그 어떤 차이도 보이지 않음, 대류 현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닌 듯함.
4. 약 6시간 동안 지속되던 안개는, 6시간을 분기점으로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함.
5. 안개가 걷힌 뒤, 이상한...물체가 관측됨...
-탐사 3일째-
"아니 어떻게..."
"어쩌면...어쩌면 인류의 기원을 더 빨리 찾아 낼 수도 있겠군요!!!"
믿을 수가 없다. 안개가 걷히자 그 자리에 갑자기 생명체가 나타난 것이다.
발광하는 입자들의 흐름이 지나가고, 그 자취에서 생명이 탄생한다니...상식선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생명체들의 모습 또한 이곳 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기괴했다.
심연의 바닥, 그 날카로운 암석들 위로, 알 수 없는 해초 같은 것들이 바람에 흩날리듯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다.
회색빛의 그 해초는 마치 지상의 꽃과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회색빛 줄기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칼날 같은 그 잎들, 무희를 연상시키는 그 칼의 춤에 내 머리는 하얗게 멈춰버렸다.
그러나 내게 더한 충격, 아니 공포를 불러일으킨 것은 따로 있었다.
심연의 나무...
회색빛의 앙상한 나무들이 그 단단한 암석들의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잎이 하나도 없었고, 몸통엔 군데군데 어두운 구멍이 나있었으며, 굵은 다섯개의 가지는 절규하는 사람의 손짓을 연상시켰다.
그 기괴한 숲의 모습에 난 할 말을 잃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은 듯하였다.
"굉장해!!! 한 순간에 이런 복잡한 숲을 만들어 내다니, 역시 인류는 그 '생명의 안개'로부터 탄생한거야!!!"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순간, 교수라는 직업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그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런 그의 모습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그 헛소리 좀 그만하세요!!! 우리는 심해의 밑바닥을 조사하러 온거지, 당신의 그 말도 안되는 이론을 증명하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자 그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내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우리는 모두 정신을 차리고, 그 미지의 숲을 관찰할 준비를 하였다.
그 기괴한 숲은 다시 보아도, 패닉을 불러일으킬 만큼 공포스러웠다.
난 애써 감정을 추스리며, '심연의 안개'를 기록한 그 일지에 이어서 '심연의 숲'이라는 일지를 작성해 나갔다.
<기록-심연의 숲>
1. 빛을 따로 비추지 않아도 관측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들 또한 발광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추정됨.
2. 저 식물들은 광합성이 아닌, 일종의 화학 반응으로 에너지를 얻는 것으로 추정됨.
3. 회색빛의 나무들은 모두 화강암 아래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 지질 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해봄.
4. 회색 꽃의 칼날 잎은 총 6개로, 전체적인 모습은 정육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음.
5. 나무의 가지는 몸통의 60% 정도로 매우 굵으며, 간헐적으로 떨리기도 함.
-탐사 4일째-
"뭐..뭐야, 설마 또...?"
"이번엔 저 안개로부터 어떤 생명이 탄생할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군요!!"
심연에 또 다시 안개가 피어올랐다.
분명 그때와 똑같은 현상이지만, 이번엔 그 크기와 색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범위는 이전보다 1.5배 가량 더 넓어졌고, 그 하얀 빛도 정오의 태양 만큼이나 밝았다.
빛들의 황홀한 일렁거림이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리자,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적용되는 작용이었다.
그의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 빛나는 안개를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왔다.
난 그 눈부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마치 환각이 풀리듯이, 다시 머릿속이 수많은 생각들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연구'였다.
(맞아, 지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야!)
파도처럼 밀려오는 의무감이란 감정에, 난 빠르게 컨트롤 룸으로 향했다.
그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방에서 펼쳐지는 빛들의 향연이 날 맞이했다.
난 바로 블라인드를 내리고, 해수 흡입 장치로 향했다.
"그래, 이젠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있어."
난 장치를 가동시키는 버튼을 눌렀고, 그러자 게이지가 초록색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무엇인가가 빨려들어가는 둔탁한 소리가 창밖의 물들을 거쳐, 방안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난 익숙한, 그러나 불쾌한 그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날 처음으로 맞이한 것은 그 빛나는 안개가 아니었다.
날 마주보고 있던 것은...투명한 큐브에 갇혀 격렬하게 요동치는 뱀 한 마리였다.
만일 과학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라면, 구 시대의 이론을 깰 수 있는 그 존재를 보고 환호성을 질러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왜냐하면 그 짧은 순간, 그것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의 그 공허한 눈은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난 그 눈에서 알 수 없는 살기 같은 것을 느꼈다.
온몸에 칼 같은 비늘을 두른 회색빛의 그 뱀은 날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자신을 구속시키고 있는 그 투명한 우리를 깨부시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본능이 내게 내린 명령은 '도망'이었다.
분명히 이성은 큐브가 부서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려움이 뇌를 차지한 그 시점에서 이미 내 몸의 통제권은 본능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연구실을 뛰쳐나오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흔들거렸다.
"안개는...안개의 표본은요?"
난 힘없이 손가락만을 움직여 내 뒤의 연구실 문을 가리켰다.
그런 나의 모습과 상반되게 그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다.
아니, 그 표정은 이젠 밝은 것을 넘어서, 마약 환자의 그것 만큼이나 섬뜩하게 보이기 까지 했다.
그는 그대로 연구실로 뛰쳐 들어갔고, 다시 심연의 그 고요함이 낮게 깔려 왔다.
난 힘이 풀려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다리를 질질 끌며, 그렇게 내 방을 향해 나아갔다.
-탐사 5일째-
"도대체...무슨 일이..."
"이건...이건 아주 완벽해!!! 내 이론은 틀리지 않았어!!!"
믿을 수가 없다.
그 빛나는 안개가 사라진 자리엔 이제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3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심해를 헤엄치는 새, 머리가 몸통만큼 거대한 사자, 그리고 머리에 칼을 달고 있는 사슴...
온갖 생명체들이 그 심연의 생태계 안에 모여, 우리가 있는 이 플랫폼을 노려보고 있다.
그런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 공허한 눈과, 잿빛의 색채가 감도는 몸이었다.
그 기괴한 조화에 더해지는 살기어린 시선은, 나의 두려움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며 가만히 서있는 와중에, 환희에 찬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번엔...다음번엔..."
'다음'이라는 그의 말에, 난 그 끔찍한 미래를 추론해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선 그의 이론이 내 지식을 뛰어넘는 진리와 같다.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질 생명의 안개에서는...인간...이 나온다.
그 미래의 풍경을 상상하자, 내 머리는 그대로 패닉에 빠져버렸고, 내 의식과 몸 사이의 커넥션도 그렇게 끊어져버렸다.
이건...이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다.
수십년간 연구한 내 이론이 '법칙'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날 무시하던, 한낱 소설가로 비하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승리의 비웃음을 날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창문너머의 저 신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황홀함에 현혹되는 것만 같다.
모두가 사랑스런 미소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평화롭다, 그리고 안락하다.
저 멍청한 파트너는 아직도, 그 성스러운 안개가 땅속에서 나온 어떤 화학 물질들의 작용이라고 믿고 있겠지.
그러나, 그는 완벽하게 틀렸다.
생명의 안개는 땅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어느순간 이 순수한, 태초의 물에서 탄생된 것이다.
'무'에서 '유'로의 창조, 이것은 모든 생명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론이다.
그리고 이 이론의 아버지는 바로 나다.
내가 제 2의 다윈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난 지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중 한 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힘든 수많은 상황들을 꿋꿋하게 이겨낸, 성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음에 등장할 '생명의 안개'와 자랑스런 나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내일이 기대된다. 어서 빨리 이 지루한 새벽이 지나가기를.
-탐사 6일째-
"교...교수님!!!"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실루엣.
예상치 못 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교수가 기지 밖으로 나간 것이다.
다행히 잠수복은 인류의 기술이 집약된 초강도의 특수복이라 그가 처참하게 죽을 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바깥의 상황이었다.
또다시 그 안개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이전의 안개들과는 완벽하게 다른, 그것이 나타났다.
창밖의 풍경은 완전한 어둠 그 자체였다.
심해수의 검은 빛보다 더 공허한, 어쩌면 색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그 안개는 마치 폭풍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여파로 플랫폼 전체가 흔들리는 이런 상황에서,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 검은 안개에 잠식되어 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난 그저 멍하니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분나쁜 금속의 비명소리에, 난 문득 정신을 차렸다.
"뭐...뭐야??!!!"
난 이 플랫폼의 모든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컨트롤 룸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적색의 긴박한 화면과 요란한 경보음이 내 눈과 귀를 때려댔다.
[ 14번 플랫폼과의 커넥션 파손. 14번 플랫폼과의 커넥션 파손. ]
"아..안돼..."
이럴 수가 없다. 전 세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초강도의 연구 기지가 저런 소용돌이 따위에 부서질 리가 없다.
분명 시스템상의 문제일 것이다. 오류로 인한 시스템상의 문제...
나의 이 처절한 합리화를 무시하듯, 그 굉음은 계속 이어졌고, 난 서서히 절망의 늪으로 빠져만 갔다.
그렇게 컨트롤 룸에서 의미없는 클릭질만 계속 하던,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그 문제의 커넥션을 확인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합리화는 현실에 대한 도망일 뿐, 결코 진실을 이길 순 없는 법이다.』
그곳엔 문장 하나가 나타난 모니터 밖에 없었다.
나의 한 줄기 희망을 짓밟는, 그 적색의 잔인한 문장...
[ 커넥션 파손으로 인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플랫폼을 봉쇄합니다. ]
난 심연의 바닥에 고립됐다, 그 검은 '귀신'의 안개에 둘러싸인 채로...
-탐사 7일째-
'심연을 걷는 자들'이 나타났다.
잿빛이 감도는 그 인간의 형상들은 하염없이 걸어만 갔다.
초점 없는 그들의 눈은 계속해서 흔들렸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엔 좌절과 후회란 감정이 묻어 나왔다.
원형의 행렬에 이어지는, 처절한 비명, 절규, 오열의 하모니가 내 귀에 울려 퍼졌다.
그 끔찍한 고통의 선율에, 난 귀를 막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의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그 소리를 계속해서 듣자, 마치 최면에 걸리듯 의식이 서서히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눈 앞엔 그 밝기를 가늠할 수 없는 새하얀 빛만이 아른거렸고, 귀에선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 만이 맴돌았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회색빛의 문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난 쏟아지는 호기심에 그 문을 열었고, 문이 열리자 황홀했던 그 빛과 웃음소리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이 교수의 방에 서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의 시야에, 책상 위에 있는 그의 오래된 노트가 들어왔다.
그 노트는 마치 그와 세월의 흐름을 같이 한 듯,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그 두꺼운 표지는 수많은 생채기로 얼룩져 있었다.
난 천천히 그 책을 펼쳤고, 이어서 120이라는 숫자가 적힌 페이지가 나타났다.
고급스러운 만년필이 끼워져 있는, 그 페이지는 그의 유산의 마지막 장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품위 있는 필기체의 문장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 성운에서 별이 탄생하듯, 인간도 심연의 안개에서 그 삶을 시작하리라. ]
[ 성스러운 생명의 안개는 신의 입김이니, 그것을 감싸는 자는 축복을 받으리라. ]
[ 우린 모두 신과 함께 영혼의 낙원에 도달해, 그 뜻을 세상 널리 퍼뜨릴지어다. ]
그 현학적인 문장들을 보고 있자니, 실없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이론은 완벽하게 틀렸다.
이곳은 인류라는 종의 부화장도, 영혼의 낙원도 아니다.
심연의 인간들은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다.
사자의 회색빛 송곳니에 물어 뜯기고, 사슴의 비수 같은 뿔에 찔리며, 새의 칼날 같은 발톱에 뼈가 으스러지고, 살아있는 나무의 줄기에 온몸이 찢겨지며, 날카로운 꽃잎의 춤에 발이 잘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는다. 계속해서 몸은 재생되고, 고통은 사슬처럼 이어진다.
이곳은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다.
이곳은 죄지은 영혼들의 교도소, '지옥'이다.
일순간, 밖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흘러 들어왔다.
그 소리는 고통의 수레바퀴에 구속된 그들의, 힘없는 목소리였다.
"고통스러워...힘들어..."
"고통스러워...살려줘..."
"고통스러워...같이 가자..."
지옥에 갇힌 망자들의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후회, 슬픔, 분노, 동질감 등이 섞인 비참한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어온다.
그런 나의 눈에 그들의 실루엣이 더 선명하게 일렁인다.
수많은 사람들의 결코 끊나지 않는 행렬, 그 어딘가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그의 표정엔 절망이 담겨 있지 않다. 오히려 기쁨에 가득 찬,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
회색빛의 나무가 그의 팔을 뜯어가든, 칼의 춤을 추는 꽃이 그의 발목을 잘라버리든, 사슴의 뿔이 그의 몸을 관통하든, 그는 한결같이 천국의 미소를 지으며 그 행렬을 이어간다.
자신만의 낙원에 빠져버린 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측은함 속에 섞여 있는 부러움의 감정을, 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창문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이 점점 어두워져 간다.
익숙한 검은 일렁거림이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조금 뒤에 이어질 그 고통의 미래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난 살며시 눈을 감고 애써 미소를 지어본다.
감정을 속이는 거짓된 그 미소를...
[ 속보입니다. 어제 새벽 넵튠 프로젝트의 중심인 심해 탐사 기지가 파손되었습니다.
15번 기지와의 연락이 끊긴 것으로 보아, 가장 아래 플랫폼이 붕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수사대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문가들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있으며, 이 비과학적인 연구 기지 실종 사건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