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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스케치 -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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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지옥의우유
추천 : 0
조회수 : 2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8/21 22: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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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요약 :


마르크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


 먼저 이 책을 읽기전 나는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그의 삶과 철학, 사상에 오히려 굉장한 오해만 있었음을 고백한다. 재학중일때 교내에 항상 붙어있던 맑시즘 연구 동아리 포스터를 보면서 왜 하필 마르크스인지, 왜 칸트나 헤겔이 아닌지를 궁금해 했었다. 그리고 실패에서 얻는 어떤 연구가치가 있는가 보다라고 넘겨짚었다. 책을 다 읽고서는 몇가지 궁금증이 풀렸다. 이 시대에 커다란 문제를 안고도 폭주기관차 처럼 달려나가는 자본주의에 대해 대학생들이 실천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마르크스 연구를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북한 삼대세습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 독재체재를 옹호하는데 쓰이는 사상과 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마르크스인가



 책은 마르크스를 비롯해 마르크스 주의를 지켜나가고 발전시켰던 당대의 혁명가들의 삶을 서술하고, 해당되는 인물들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재조명 하고있다. 마르크스가 현재에도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꼽히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 그가 화폐의 속성과 그로인해 자본주의가 야기할 경제체제의 취약성과 인간성 소멸을 과학적으로 설명해내었고 현대에도 그 설명이 정확히 유효하다는것이 그 하나다. 강고한 유물론자로서 역사적유물론으로 우리 민중과 노동자의 의지와 행동, 존재에 힘을 불어넣어준 것이 또 하나이다. 또한 뒷선에서 의문과 비판에 그치지 않고 가장 최전선에서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설파하고 공격했다. 동시에 대안인 노동자중심 사회주의를 적극주장한 사상가라는 점이 마르크스주의를 더욱 실천적이고 현실적으로 만든다. 



 내가 이해한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는 모든 생산물의 가치를 압도하는 화페의 태생적 성질과 자연히 이를 이용해 더욱 부를 늘리려는 자본가의 성질 때문에 결국 노동자를 착취하는 형태로 진화한다. 여기서 착취는 내가 알던 어떤 도덕적 개념이 개입되지 않은 지극히 메커니즘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윤율'은 자본론의 중요한 개념인데, 착취가 진행되면서 이 '이윤율'은 과학적으로 감소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지역에 머무르지 못하고 더나은 이윤율을 위해 세계화로 나아간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팽창하며 식민주의의 시대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탈민족적, 탈국가적 자본주의의 팽창을 막고 노동자 중심 사회주의로 가기위해선 사회주의운동도 국제주의를 반드시 주창해야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는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전복만이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사회주의에 대해 나 처럼 잘 몰랐거나, 오해를 가진 사람들은 혁명이라는 단어가 컴퓨터 기술발전 따위에 쓰이거나 피를 부르는 광기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 오해와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국가와 강하게 결합되어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권리를 가진 존재이다. 자연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구속하거나 행동을 강제하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힘과 이윤율 향상을 끝없이 추구하는 자본가는 결속이 불가피하다. 둘은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이다. 국가체제 유지를 위한 생산양식과 세금극대화를 위해 자본가가 필요하고, 자본가는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는 끝없이 착취당할 뿐더러 착취의 강도는 세지고, 방법은 다각화 된다. 자본주의의 틀안에서 이는 국가 운영자나 자본가의 도덕과 윤리의식과 상관없이 발생한다. 노동조합 구축이나, 프루동이 주장한 상호부조단체 설립, 라살이 주장한 국가를 통한 사회주의 도입 등 모두 이 궁극적인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 착취의 강도를 줄이거나 시기를 늦추거나 노동자의 삶을 조금 개선할 뿐 이다.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마르크스 사상의 또다른 중요한 단어인) 당하지 않고, 천부인권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건설 방법은 불합리한 제도와 자본구조를 일거에 소거할 수 있는 혁명뿐인 것이다. 같은 논리로 의회내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수호해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거부되는 것이다. 오직 노동자가 세계적으로 연대하여 주체적으로 수행한 혁명만이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을 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노동자 중심 사회주의만이 모두가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한 안정적 경제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진정한 사회주의에선 그 연대적 혁명의 경험과 고양된 의식 때문에, 일체의 민족주의와 독재,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문이 들긴하지만 책한권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전부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듯 하다. 심지어 공산당선언조차 읽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파악한 사실관계는 있다. 마르크스가 과학적으로 입증해낸 자본주의의 한계와 취약성은 현대에 충분히 인정된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그들이 지켜내고자 투신했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현대의 독재 국가들을 보면 무덤에서 뛰쳐나와 다시 투쟁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언급된 혁명가들의 공통점은 마르크스가 주창한 중심적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며 발전시키고, 마르크스와 같이 혁명전선 최전선에서 추방과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했다는 것이다.



이 사회주의 노선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몇 있다. 마르크스에게 파리코뮌은 진정한 노동자중심 사회주의 실현가능성을 엿보인 사건이었다. 또 이후 세대의 혁명가들에게 러시아의 1905 혁명과, 1917 혁명은 노동자가 주체가된 사회주의 운동 및 혁명에 영감과 실현가능성에대한 인식을 불어넣었다. 그 주체가 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내용에서 사회주의 속에서 민주적 의사결정구조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비전을 보여주기도 했다. 의사결정구조 뿐만 아니라 직위의 고하를 떠나 당원이라면 모두 평균노동자 임금을 받는 소비에트 - 노동자로 이루어졌으니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 의 구조는 확실히 서로 권력을 휘두르거나 억압할 수 없는 구조였던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따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기도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모순형용이나 궤변이 아닌 것이다.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참여한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의 국제주의를 유지하는데 중요하고 상징적인 역할을 후대에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 이후에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에 의거한 노동자 중심 사회주의 건설을 끝까지 실험하고 증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국제주의에 반하는 민족주의는 세계대전당시 각 나라의 사회주의당이 앞다투어 자국 노동자를 타국 노동자를 총칼로 죽이도록 국가에 협력하게 만든다. 또한 수많은 독재자들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가 타파하고자했던 국가를 교묘히 결합, 이용해 사욕을 채운다. 식견이 일천한 나도 스탈린이, 김씨 삼대가, 히틀러가 건설하려한 국가가 노동자를 위한 사회라거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국가가 아님은 확실히 알 수 있겠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다른 해석과 다르게(이들을 부정적으로 독재자 취급하는) 이들이 다른 인권을 침탈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권력과 관료(스탈린 등)를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책에서 이면을 묘사했다.


나는 서두에 고백했듯이 마르크스를 잘모르고 책한권 보고 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그러나 확실한건 오해에선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름만 듣고 막스베버의 책도 금지했던 예전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체제에서 만큼의 오해는 아니지만, 그 이름 자체에서 오는 선입견으로 불온하거나 종교적일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또한 엥?막시즘? 그거 소련해체하고 완전 실패한거 아니냐? 하는 관점에서도 벗어났다. 민족주의에 대한 컴플렉스로 발현한 주체사상 따위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하지 않고 현대 정당과 노동자 사이에서 숨쉬고 있을 거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가장 확실하고 견고한 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또한 국가와 자본의 결탁구조를 비판하는데에도 말이다. 박노자의 '주식회사 대한민국' 에서 밝히는 자본과 국가의 관계는 의외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이미 1840년대 공산당 선언에서 '현대 국가의 행정부는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라고 밝힌 것의 변주인 것이다. 이러한 성찰이 지속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수인 혁명으로 이어질지, 국가와 의회와 영합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경제신자유주의의 물결속에서 대중에 마음속에 계속 자리잡을지 궁금증은 많아졌는데 순수 마르크스주의자는 대부분 총을 맞은 모양이다. 인류 역사가 적어도 이런 질문들에 대답해주고 토론할 사람들이 총은 맞지 않는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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