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책들)
Charles Taylor, Philosophical Argument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12장, "Politics of Recognition,"
Amy Gutmann, Identity in Democrac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1장, “The Claim of Cultural Identity Groups.”
Joseph Raz, Ethics in the Public Domain (Oxford: Clarendon Press, 1995), 8장, “Multiculturalism: a Liberal Perspective.”
George Kateb, "Note on Pluralism," Social Research. Vol. 61, No. 3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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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주의 지지자들과 반대론자들
1)지지자들
Charles Talyor와 Joseph Raz는 각각 다문화주의를 각자의 관점에서 옹호합니다. Taylor의 경우, ‘동등한 인정을 위한 정치’의 개념을 중심에 놓고 ‘정체성’과 연결지어 이에 대한 존중이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지요.
Taylor에 따르면, 인정의 문제는 점점 중요해지면서 두 개의 커다란 변화와 연결되는 데, 첫째는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한 존엄성이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적 개념의 ‘정체성’에 따른 차이의 정치 역시 인정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핵심 주장은 따라서, 지금까지의 다소 ‘경직된’ 절차적 자유주의로는 ‘다문화사회’로 급격히 이동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고, 루시디 ‘악마의 시’사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육과 교육과정’을 통한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Raz는 좀 더 자유주의자의 관점에서 다문화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다문화주의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한 뒤, ‘정체성’의 측면에서 한 사람이 문화적으로 멤버십을 가진 그 자체가 ‘기회의 지평’을 결정한다면서, 이런 측면에서 다문화주의가 자유주의적 정치 프로그램의 중심에 등장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왜 열등한 문화를 보호하고 지원해야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반대하는 의견도 있고, 자유주의와 공통의 가치/문화에 기반한 ‘연대의식’을 해친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문화주의 안에서 다른 집단의 전통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들은 결국 ‘연대’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를 주장하면서 그것이 현 시점에서 많은 장점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반대론자들
Amy Gutmann과 George Kateb은 그러나 Talyor나 Raz와는 달리, 각자 다른 관점에서 다문화주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먼저 Gutmann은 ‘문화’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개인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 하나의 문화’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죠.
문화 자체를 삶의 양식으로서 존중해야겠지만, 개인의 권리가 침해받거나 인권이 박탈되는 관습은 제한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적/집단적 관습과 개인의 권리가 충돌한다면, 역시나 ‘개인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주장입니다.
Kateb은 훨씬 완강한 입장인데, 그는 ‘다문화주의’라는 단어가 아닌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개념을 상정한 뒤 이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민주적 개인성’의 관점에서 ‘문화적 다원주의’는 6개의 본질적인 악덕(vice)를 내재하고 있다며, 그는 인간이 구성하는 공동체의 본질적인 측면이긴 하지만, 민주적 개인성의 관점에서는 수정할 여지가 있는 반면 문화적 다원주의에서는 그 같은 악덕이 악화될 가능성이 클 뿐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화적 다원주의를 민주적 개인성의 옹호자들이 지지하는 것은 사실상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3)내 의견
우선 Kateb의 주장부터 검토해봅시다. 그의 주장의 문제점은 우선 그가 말하는 ‘문화적 다원주의’의 개념, 그리고 그가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하는 ‘강렬한(intense) 문화집단’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강렬함(intense)의 실체가 어떤 것이고 그것의 구체적 사례는 무엇이며 실제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문제가 무엇인지 촘촘하게 제시하지 않은 채 다소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개념’으로서의 ‘문화적 다원주의’와 ‘문화 집단’을 상정해놓고 강한 비판을 가한다는 얘깁니다. 일종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듭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제시하는 문화적 다원주의의 ‘악덕’ 중 상당수는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적 개인성’이 기반하고 있는 ‘근대국가’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집단에의 소속감이 강화되면서 개인성이 약화되는 문제’, ‘집단형성과 전통에 대한 신화적/허구적 믿음’ 등은 사실 국가형성단계 자체에서 존재했던 것들이고 ‘애국심’의 이름으로 여전히 자주 호출되는 개념들이다. 물론 Kateb은 그러한 ‘애국주의’에도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이럴 경우 근대 자유주의의 토대인 국가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기잠식적인 주장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 그리고 ‘EU에 속한 다른 문화를 가진 작은 국가’들과 같은 상황이라면, Kateb의 주장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사실상 '리버테리안'에 가까운 사람이고, 국가성/애국심 따위를 부정하고 오직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만 집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문제는 사실상 해결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리버테리안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 자체가 liberal state와 nation이 만들어 낸 토양과 기반위에서, 특히 그 국가/사회 내의 다수에 속하는 개인들이 훨씬 잘 누릴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제 비판은 여전히 적실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Gutmann의 경우 조금 더 온건해 보이는 측면은 있지만, 주장의 내용을 뜯어보면 결국 ‘문제가 있는 경우, 개입한다’라는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우월한 자유주의와 개인적 권리의 보호 논리’를 통해 타문화를 평가하고 재단하며 때론 ‘고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Talyor의 다문화주의는 차분하게 헤겔이 제시한 ‘인정투쟁의 역사’라는 개념을 통해 ‘정체성의 정치’, ‘차이와 이에 대한 인정의 정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잘 역설하고 있으나, 본인 스스로도 경계하고 있는 극단적 상대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있어보이고, 이를 제어할 장치는 마땅히 없어 보이는 게 문제입니다. 교육과정을 통해 문화 간 상호이해를 높인다는 원론적 차원의 대안 역시, 다양한 문화집단이 한 사회에 늘어갈수록 이 모든 것들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제기됩니다.
Raz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양쪽의 문제점을 다 인정한 상태에서 좀 더 포용력 있고 신중한(자유주의와 다문화주의 양쪽에 모두) 주장을 전개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그는 특히 ‘경제적 환경’이 같고 그 안에서 일자리를 찾고 함께 어울려 생활하는 것이 다문화사회에서도 ‘연대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p.188)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적인 맹점이 존재하는데, 그가 말하는 ‘공통의 지식’은 이미 주류사회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이는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이미 주류사회와 집단이 만들어 놓은 ‘지식권력의 체계’안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다문화주의’와 논리적으로 충돌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공통의 정치사회’가 공통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논리 역시 ‘정치사회 구성의 원리’를 누가 만들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