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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장수풍뎅이 일대기.
게시물ID : animal_1659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appymeal
추천 : 2
조회수 : 7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8/25 1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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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작년 가을즈음이었나.

애지중지 키웠던 장수풍뎅이 애벌레가 있었다.
번데기단계에서 꽤 오래 머무르더니, 어느날 성충이 되어 제 힘으로
배양통 뚜껑을 열고, 방으로 나온 모양.

아내는 청소를 하다가 바퀴벌레가 나왔다며 기겁을 하고는 이웃에 사시는 장모님을 불러
바퀴벌레(?)를 변기통에 버렸다.

'이거 바퀴벌레 아닌거 같은데? 풍뎅이 비슷한데?'

그 말을 듣고 아내는 아뿔싸 했단다.
설마설마하며 배양통을 보니, 뚜껑은 열려져있고, 번데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아들은 한동안 울상이었지. 어떻게 엄마가 그럴수가 있냐며. 풍뎅이와 바퀴벌레를 구분 못한다며.
나는 그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며 아들을 달래주었다.

해가 바뀌어, 따뜻한 춘삼월.
아들이 과학시간을 마치고 또다시 집으로 가져온 장수풍뎅이 애벌레.
이번엔 제대로 키워보리라, 내 집으로 온 이 녀석을 끝까지 살려보리라 마음먹었다.

기나긴 번데기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성충으로 탈피한 요녀석은 암컷이었다.
수컷처럼 멋진 뿔은 없었지만, 어찌나 활발한지.
큰 김치통으로 집을 넓혀주니 통속에서 붕붕 날아다니고 마구 요동을 쳐댔다.
풍뎅이에게 그런 멋진 날개가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는 식구가 된 녀석에게 '기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성충이 된 이후에는 기껏 3~4개월 살다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짝을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 가서 '기쁨이'보다 등치가 두 배는 큰 '멋짐이(딸아이가 지었다)'를 데리고 왔다.
커다란 뿔이 어마어마했다.
힘도 어찌나 센지, 무거운 책을 덮어놓아도 다음날이면 책을 밀어뜨리고 밖으로 나와 있기 일쑤였다.
결국 제대로 된 뚜껑이 달린 곤충집까지 장만해 주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멋짐이를 기쁨이는 피해다니기 바빴고,
둘은 늘 하나가 땅 속에 있으면 하나가 위로 올라와 있는 생활을 했었다.

저러다 짝짓기는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7월 어느날서부터는 기쁨이가 통 보이질 않았다. 젤리를 먹으러 나오지도 않았다.
이거 어디 모르는 사이 밖으로 나와서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통을 완전히 뒤엎어 샅샅이 찾아보았더니, 흙 깊숙한 곳에 숨어있긴 했었다.

무서워서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건가, 저러다 굶어죽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었다.

지난 주에 젤리를 주려고 통을 열었더니,
기쁨이가 축 늘어진 채 엎드려 죽어 있었다.

아아.. 기어이.. 못 먹더니 죽고 말았구나...

알도 못 낳고 그렇게 가버렸구나 기쁨아... 생각하며
아래쪽 흙부분을 보았더니,
곳곳에서 꼬물꼬물거리는 하얀 애벌레들.. 여섯마리도 넘어보였다.
 
20160816_085004.jpg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요녀석들 낳느라고 그렇게 흙속에서 고생했었구나.
그렇게 엄마가 된 책임을 다하고 엎어져 잠들었구나...
애기때 우리집에 와서 그렇게 기쁨을 주더니, 소중한 아이들을 낳고.. 하늘나라로 돌아갔구나..

며칠간 그렇게 기쁨이를 내버려 두었다.
제대로 묻어줘야지 생각했었다.

혼자 남은 멋짐이는 더이상 활발하지 않았다.
하루에 하나씩 먹어치우던 젤리는 3일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어느날 살짝 밤에 들여다보니,
멋짐이는 죽은 기쁨이를 끌어안고 교미행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자, 멋짐이도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슬며시 불을 끄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제 밤에 먹이를 주려 통을 열었더니
멋짐이도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기쁨이가 죽고 나서 일주일 후,  멋짐이마저 하늘나라로 그렇게 떠났다.
 
20160816_084952.jpg

어제 아들과 함께 아파트 앞 화단에 살짝 땅을 파서
두 부부를 한데 묻어주었다.
휴지에 고이 싸서.
플라스틱 비석도 세웠다.

'그동안 고마웠다 우리집에 와줘서 고마웠어.'

어느덧 애벌레들이 제법 커서 밖에서도 잘 보일 정도로 크게 자랐다.

사람의 일생이나,
풍뎅이 부부의 일생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소 길이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태어나서 아이를 낳고, 자식위해 살다가 바스러져 가는.
또 그 아이들이 살아서 부모가 되는.

한동안 여운이 길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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