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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대한민국정부가 일본인들의 한국 기생(섹스)관광에 매진한이유...
게시물ID : humorbest_12520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t2
추천 : 65
조회수 : 9012회
댓글수 : 7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5/15 01:15:48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5/11 11: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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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요약하면 

1. 1972년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음에 따라 일본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
   일본 사람들이 섹스 관광을 하러 대만으로 주로 갔는데, 대만에 가기가 어렵게 되니 이참에 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 대만대신  돈 벌겠다고 나섬

2.1972년 8월 교통부는 기생 파티를 하는 요정을 지정

3.여성 단체에서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벌이자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탄압.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이 유신 과업 수행을 가로막는 반정부 행위라고 하면서, 반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

4.박정희 정권은 관광 기생이라고 불린 접객 여성들한테 허가증을 내주고, 1973년에는 법령을 개정해 등록제를 법제화

5.그래서 그러한 여성들이 호텔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게끔 지원
6.(당시 일반서민들은 통행금지때문에 밤에는 못돌아다녔는데)
  이런 여성들에겐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게 국가적지원
7. 대한민국 문교부 장관이 1973년 매매춘이 ( 외화만 벌어들인다면 )애국이라는 취지로 발언
"한국 여성은 경제 건설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기생 호스티스가 대거 일본에 진출해서 몸을 바치며 밤낮으로 분투하는 애국 충정은 훌륭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1978년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 예산이 35,170억원 이던 시절 일본인 기생관광으로 밝혀진것만 
700억원 (당시 예산의 2% 라는 막대한 금액을 ) 획득

요즘 대한민국정부예산이 350조원의 2%라고하면 지금의 7조원과 비슷한엄청난규모

즉 돈을 벌기위해서 국가적으로 일본인들의 기생(섹스)관광을 용인했던거라 안타깝네요...ㅠ

그나마 요즘은 그래도 국가적으로 안한다고 하고 좀 줄었다고 하니 다행으로 여겨야할듯...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6321

이순신 숭배한다며 기생 관광 부추겨?
2016.05.08 15:46:36

▲ 2004~2005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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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화당 정권, 박정희 정권 때는 요정 정치가 대단했다.

그다음에 직접적으로 기생 관광에 정부가 강력하게 개재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은 1972년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음에 따라 일본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일본 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섹스 관광을 하러 대만으로 주로 갔는데, 대만에 가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런 속에서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생 관광을 키워나가니까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대거 오게 된다. 


................


서중석 : 기생 관광에 대해선 이준식 박사가 잘 써놓았다. 우선 이즈음 외국인 관광객이 어느 정도였느냐. 1969년에는 13만 명이었다가 1973년에는 68만 명이 됐다. 그전에는 미국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일본인이 급증했다. 1969년에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일본인이 25.4퍼센트밖에 안 됐는데 1973년에는 69.9퍼센트나 차지했다.

그러면 이 시기에 정부는 어떤 일을 했느냐. 1972년 8월 교통부는 기생 파티를 하는 요정을 지정하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여성 단체에서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벌이자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탄압했다.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이 유신 과업 수행을 가로막는 반정부 행위라고 하면서, 반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관광 기생이라고 불린 접객 여성들한테 허가증을 내주고, 1973년에는 법령을 개정해 등록제를 법제화했다. 


그래서 그러한 여성들이 호텔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게끔 했고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런 가운데 문교부 장관이 1973년 매매춘이 애국이라는 취지로 발언해 논란이 되고 그랬다. (이준식의 글에 따르면,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1973년 10월 도쿄에서 "한국 여성은 경제 건설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기생 호스티스가 대거 일본에 진출해서 몸을 바치며 밤낮으로 분투하는 애국 충정은 훌륭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편집자') 

이렇게 한국에서 기생 관광이 성하니까 1973년 미국 언론 <타임>은 기생 관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해 한국 정부의 고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있다"고 하면서 기생 관광 실태를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해에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과 이듬해인 1974년에 발생한 8·15 저격 사건이 또 영향을 끼쳐서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교통부는 1975년 3월 관광 업체 대표자들을 모아놓고 여행 알선 업체에 7000명씩 목표까지 할당했다. 그러면서 해외 선전물에 기생 파티, 특별 파티 같은 말은 쓰지 말라고 업체들에 지시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풍경이다. 

하여튼 일본인 관광객 가운데 80~90퍼센트가 남성이었는데 그야말로 섹스 관광을 하러 온 것이었다. 유신 정권이 무너진 1979년에는, 주로 기생 관광으로 온 것일 텐데 약 65만 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왔다고 돼 있다. 1973년에 그 전해의 2배인 43만 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는데 그게 1979년에는 약 65만 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당시 이 사람들을 색정단(色情團)이라고도 불렀다. 이화여대 학생들과 여성 단체가 기생 관광을 반대하고 나서고 그랬는데, 이화여대 같은 곳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섹스 애니멀이라고 부르고 그랬다. 


일본인들이 1970년대 초에 유럽에서 이코노믹 애니멀(economic animal)이라고 많이 불리지 않았나. 경제적으로 굉장히 성장하면서 상당수의 일본인이 하는 짓이 이코노믹 애니멀과 같다는 얘기였는데, 그것에 빗대어 그렇게 불렀다. 

1978년 매매춘으로 일본인한테 벌어들인 돈이 700억 원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그게 이 여성들한테 온전히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수익의 대부분, 그러니까 80퍼센트 정도는 중간착취를 당했다. 정부가 이런 착취를 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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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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