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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헌금 <최용덕>
게시물ID : lovestory_796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aith_Jesus
추천 : 1
조회수 : 128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9/05 01: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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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sokuho's 혼자이야기 | 소꾸호
원문http://blog.naver.com/sokuho/110004049950
다녀가신 이웃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지금 하고 있는 드림팀의 마케도냐 프로젝트와 관련된 구절을 발견해서 반가운 맘에 올린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여러분에게도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운 시련과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오히려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힘껏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겹도록 헌금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에게도 헌신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1-5>
 
        마케도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조차도 지지리도 못 사는 꽃동네 '영세민'들이었습니다. 그 '주제'에 흉년으로 굶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자신들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도 기가 차서 바울 사도가 나섰습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까지 이러지 않으셔도 다른 교회들에서 다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도 겨우 사시는 분들 아닙니까?" 하고 말렸습니다. 대표가 돌아가서 성도들에게 그것을 알리자 이번에는 부대표가 바울 사도에게 달려갔습니다. "제발 우리에게도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나 바울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엔 여 집사 대표단이 다시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바울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영세민 꽃동네 사람들에게 헌금을 거둘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 집사 대표단이 돌아가자 마케도니아 교회에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의 한 다혈질 교인이 씩씩거리며 단숨에 사도들 숙소로 달려가더니만 소리쳤습니다.
        "아니 사도님들 좀 봅시다! 도대체 우리 마케도니아 교회 교인들을 뭘로 보는기요? 우리를 무시하능교? 와 우리가 하루 두끼로 줄이고 굶어죽는 예루살렘 사람들 좀 살리자카는데 사도님들이 무신 권리로 못하게 하능교? 정 못하게 하면 내가 마 대표로 여기서 콱 할복자살 할끼구마! 우짤라능교? 씩씩!"
        사도 바울이 놀라서 그를 달래며 대답했습니다.
        "그..그..그러면...허 헌금 하..하십시오. 대..대신...그냥 정성만 조금 보이십시오. 아셨지요?"
        "헹! 진작 그렇게 나오실 일이지! 알았구마요. 우쨌기나 기회를 주셔서 고맙십니데이."
        "제발 다들 아주 조금씩만 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그러나 그 날 밤 마케도니아 영세민 꽃동네에서 나온 헌금은 이웃 부자동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작정한 헌금의 배나 되었고 헌금 통 안엔 금반지, 은목걸이, 쇠숟가락, 토큰까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바울은 기절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7절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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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것저것 정리하다 헌금에 대해서 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낮해밤달의 1995년도4,5, 6월호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최용덕간사님의 글이다.
의견의 맞고 틀림을 떠나 한 번 읽어보면 좋은 도전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교회를 비난하거나 틀리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도 이름을 봉투에 써서 내며 목사님의 방침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목사님의 권위에 대항하고 싶지 않은 나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번이라도 아무 생각없이 내는 헌금에 대해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어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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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예배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채비를 할 때마다 고민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헌금 준비에 관한 것입니다. 무심코 지갑을 열고 지폐 한 두 장을 꺼내 봉투에 넣고는 성경 가운데에 끼워 넣습니다. 가끔 무슨 기념할 만한 일이나 특별한 일이 생기면 당연한 것처럼 <감사헌금>이라고 봉투에 쓰고는 또 지갑에서 지폐 한 두 장을 꺼내 그 안에 넣고는 교회로 향합니다. 한 달에 한번은 (때론 상황에 따라 횟수가 많아지기도 합니다)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또 헌금봉투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감사헌금이나 십일조 헌금 외에도 매 주일마다 예배시간에 드리기 위해 마련하는 헌금을 보편적으로 주일헌금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은 그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무심코 해 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헌금관행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왜 헌금이 주일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구역예배 때도 꼭 헌금순서를 가지는데 그렇다면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성립시키는 필수요소인 것입니까?
        둘째 의문은, 헌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흔히 듣는 말은 예물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배 중 봉헌기도자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오면서 빈손으로 털레털레 나아온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음에는 꼭 예물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마침 그 날 헌금을 준비하지 못했던 저희는 그 기도소리에 머리털이 곤두서고 온 몸에 으시시한 닭살이 돋았습니다. 너무나 무서워서 말입니다. 돈 봉투 안 가져 왔다고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입니까? 오, 마이 갇!
        세 번째 의문은, 예배시간에 드려진 헌금에 대한 집례자의 '축복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한때 저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헌금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최종결재'인 줄 알았습니다. 목회자의 그 결재가 있어야 그 헌금이 유효한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헌기도 없는 헌금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봉헌기도는 아무나 해도 되지만 특히 목사님께서 해 주시면 혹 안되면 전도사님이라도 해 주시면 '더 효력(?)이 클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요즘 문득 문득 이 헌금관행에 관한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정말 이것이 창조주요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일까?'
 
        어느 큰 기도원에 갔는데 설교자께서 회중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께서 가지고 올라 온 그 모든 문제들이 다-해결될 줄 믿으십니까?"
        "아메에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으시면 그 믿음으로 미리 감사헌금 드리세요. 이미 이루어진 줄 알고 감사헌금 하시란 얘기요. 시시하게 쩨쩨하게 하지말고 까짓 거 한 번 크게 콱 하시란 말이요.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은 감사헌금 봉투 열어보면 그 안에 다 나와 있어요. 우리 오늘 저녁엔 감사예물 미리 다 드려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자 이 말입니다. 할렐루우야!"
        "아메에에엔!"
 
        그 날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요. 이런 때의 감사헌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도들이 이날 저녁에 바친 감사헌금은 어떤 의미가 있으실까요?
        저는 이 모든 의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가지고 나아온 금, 은, 기물이나 소산물(동식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민31:50 / 스8:28 / 잠3:9) 그러나 성전(聖殿) 혹은 예배의 개념이 천지차이로 바뀐 신약시대(예수님 이후)에도 구약시대의 '예물' 의미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헌금이 과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헌금의 본질 중에서 간과하기 쉬운 몇 가지를 재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겠지요.
 
        첫째,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내어놓는 헌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헌금'의 의미 가운데 중요한 한가지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주권(主權)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하나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당연히 모두를 하나님께 내 놓아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허락하신 그 재물들을 우리 인간들이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소득의 열의 하나(십일조)를 떼어서 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가지기 쉬운 오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내놓는 십일조 헌금 그 자체(돈 액수)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인 양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관심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소유케 된 소득 중 얼마를 떼어 내놓는, 다시 말해 소유를 포기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으십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을 내놓는다는 것이 우리의 본성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아니신가요! 정말입니다. 일단 우리 수중에 들어온 것을 내 놓는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희 집엔 이제 14개월이 지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제 작업실에 기어이 들어와 온갖 것을 다 달라고 떼를 씁니다. 특히 형형색색의 싸인펜, 볼펜은 완전히 이 녀석의 '밥'입니다. 자기 양손이 미어 터지도록 움켜쥐고는 쏜살같이 밖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면 그걸로 끝입니다. 필요해서 가져오려면 '죽어도 못 내놓겠으니 차라리 아빠가 날 죽이고 가져 가셔요'입니다. 그 많은 것 중에 하나를 못 내놓습니다. 아니 그 무시무시한 탐욕과 소유욕을 누가 가르쳤습니까? NO입니다. 그게 그 녀석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이제 돌 지난 어린아이니까 그렇다구요?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선뜻 내 놓기가 쉽지 않은 것은 나이 서른이 훨씬 넘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짜로 남에게서 얻은 건데도 말입니다. (애비가 그러니 딸도 그 모양이라고요?)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니 소득의 열의 하나씩이나 내놓으라구요? 말이 쉬워서 십일조이지 지금도 저희 내외는 생활비의 십일조(10%) 떼 내는 날은 살이 벌벌 떨립니다. 정말 단돈 천 원이 아쉬운 판에 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희의 이 못돼먹은 심보까지도 알고 계시고 이해하실 거라고 믿으니 위안이 되지요.
        그렇습니다. 일단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것을 꺼내어 놓는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 헌금이 예물일 수도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리시는(?) 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너무 궁하셔서 우리 인간들의 돈주머니를 털려고 하시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심코 이런 식의 봉헌기도를 드립니다.
        "오, 하나님! 저희가 정성껏 드린 이 예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에 적합하게 써 주시옵소서. 비록 얼마 안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어쩌구 저쩌구..."
        꼭 그런 표현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의식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내놓는 헌금을 모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인 양 여기는 마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내놓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대단한 득이라도 되는 줄로 말입니다. 오, 하나님의 웃으심이여!
        돈 몇 푼이 하나님께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된다구요? 그게 일억이든 십억 백억이 되든 말입니다. 그건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돈 몇 푼 내놓았다고 하나님을 '위해' 뭘 했는 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돈 몇 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다시 못생긴 제 딸아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과자 한 봉지를 사 주었습니다. 그거 하나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 이 녀석의 거드럼이 가관입니다. 제 엄마나 아빠인 제가 가끔 그 녀석 앞에서 손을 내밀며 간청을 합니다.
        "로아야! 아빠 과자 하나만 줘! 응?"
        그러면 아니 이 쥐콩알 만한 녀석이 벌서 과자봉지와 아빠를 번갈아 보며 머리를 굴립니다. 줄까 말까 주저하는 폼이 역력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온갖 번민 끝에 과자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어 겨우 한 개를 꺼내어 제 입에 넣어 줍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저는 딸아이의 뺨에 뽀뽀를 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배 사례를 합니다.
        "아이고, 고마워요! 아이고오!"
        옆에서 엄마와 할머니도 박수를 치고 야단났습니다. 그러면 이 녀석은 자기가 어마어마한 일이라도 한 줄 알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거들먹거립니다. 할머니와 엄마도 이 녀석에게서 과자 '하나' 얻어먹으려면 온갖 아양을 다 떨어야 합니다. (아니꼽고 치사해서!)
        그런데 만약 이 녀석이 저 혼자 생각하기를 '우리 부모님은 내가 먹여 살리고 있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내게 과자하나 좀 달라고 그렇게 간청하셨겠어. 쯧쯧! 나의 헌신 없인 이 가정은 무너지고 말 거야. 아, 난 오늘도 할머니, 아빠, 엄마를 위해 과자 세 개씩이나 희생하였다'라고 한다면 이놈을 어찌해야겠습니까? 하도 어처구니없고 같잖아서 뒤통수에 알밤을 한 대 먹이지 않겠습니까?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건 그까짓 과자 부스러기 하나가 아닙니다. 엄마 아빠가 그토록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은 그까짓 과자 하나를 얻어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딸아이가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그 소유의 일부를 엄마 아빠에게 내어놓는 그 '마음'인 것입니다.
        그게 쉽다면 뭐가 그리 대견하겠습니까? 내어놓는 게, 내 것을 포기한다는 게 어렵기 때문에(어려운 줄 알기 때문에) 고마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놓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대견해 하시는 것은 그 돈 몇 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차원에서 머물러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도 수준은 젖먹이 어린아이에게서나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점점 성장하고 성숙하여 마침내는 "제게 있는 이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또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고백적 의미로 저의 수중에 있는 재물중의 얼마를 기꺼운 마음으로 다시 내어놓습니다" 라는 수준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급하셨던 '십일조'란, 어린 아이가 과자봉지 속에서 과자 하나 꺼내 아빠에게 내 놓는 정도의 수준은 아닙니다. 단지 부수입 중의 극히 일부(그까짓 없어도 그만인)가 아닌 것입니다. 모든 소득의 10%입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렵기 때문에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재물에 대한 가치관을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정도면 이제 철이 들기 시작한 수준입니다. 이것은 이런 얘기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 딸이 자라서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칩시다. 초등학생까지만 해도 아빠인 제가 용돈을 주면 단 한 푼도 남을 위해 쓸 줄 모르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쓰던 녀석이 중학생이 되자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용돈은 엄마 아빠께서 주신 거잖아.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학비 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용돈까지 주시니 이 은혜 어찌 갚을꼬? 기왕 주신 것이니 감사히 써야겠지만.. 그래, 이 용돈 중의 얼마 정도는 따로 떼어서 엄마 아빠를 위해 쓰자. 감사의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 말야.'
        그리고는 이 아빠 넥타이를 하나 사오기도 하고, 엄마 스타킹을 하나 사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부모 된 저희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500원짜리 스타킹 하나 손에 받아들고는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이지 않겠습니까? 그까짓 스타킹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기특해서 말입니다.
        아, 그러다가 이 녀석이 고등학생이 되더니(그 때쯤이면 제 나이가 50입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나이가 이 만큼 되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모든 필요를 부모님께 신세를 지고 있구나. 내 평생토록 다하여도 이 은혜 다 못 갚으리. 참, 모레가 어버이날이지? 이번 달 용돈 몽땅과 그 동안 저축했던 것 다 털어 어버이께 감사선물을 드려야지.'        
       그리고는 시내에 나가 7만원이나 주고 엄마 아빠 내의를 한 벌씩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딸아이 앞에서 제가 이렇게 소리를 칠 것입니다.
        "야, 이 녀석아! 너 쓰라고 용돈 줬지, 엄마 아빠 위해 쓰라고 줬냐?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알겠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그러냐? 앙?"
        그렇지만 그걸 받아들고 안방에 들어와서는 아내와 둘이 끌어안고는 꺽꺽거리며 울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여보! 우리 딸이 벌서 저렇게 까지 컸소? 대견하기도 하지!"
        "그러게요. 그나저나 저 녀석, 용돈을 죄다 쓴 거 같아요. 어떻게 해요?"
        "그래, 까짓 거 기분이다. 이번 달은 용돈 두 번 주자고! 그리고 다음달부터 용돈 인상 시켜요. 듬뿍!"
        그까짓 우리 부부가 입을 내의는 우리 힘으로 이백 벌도 사 입을 수 있습니다. 내의 한 벌 생긴 게 감격스러운 게 아닙니다. 자기 용돈에서 1% 겨우 떼 내는 것도 벌벌 떨던 녀석이 10%에서 마침내 자기 용돈 전체(100%)를 내놓으면서도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 마음이 이뻐 죽겠는 것입니다.
 
        성경의 「욥」의 고백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천하의 갑부였던 그가 쫄딱 망해서 빈털터리가 된 이후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으니 죽을 때에도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노라."  <욥기 1:21>
 
        이쯤 되면 이제 철이 다 든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재물에 대한 '주권(主權)'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제대로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때에 우리가 <헌금> 시간을 가지는 그 첫째 목적은 바로 이것; 우리 수중에 있는 재물 전체에 대한 전적인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 우리에게서 돈 몇 푼 내놓기를 바라신다고는 꿈에도 생각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돈이나 금붙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챙기면서 그 재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생각지 않는다면 그 헌금은 액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쓰레기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까짓 돈 다발이야 창조주 하나님께는 휴지조각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대해 조심하십시오. 보다 신중하십시오.
 
        행여나 하나님께 선심 쓰는 듯한 헌금을 내어놓은 적 없으십니까? 몇 년 전부터 저는 미리 준비되지 않은 헌금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예배시간에 헌금주머니가 도니까 허겁지겁 지갑이나 주머니를 뒤지는 '짓'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웃기는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헌금 순서이니까 동전이라도 집어넣는 것은 젖먹이 신자가 하는 일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에서 공통적으로 보게 되는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구역예배헌금'입니다. 통계적으로 구역예배 때 신자들이 내는 헌금액수는 90% 이상이 '천 원'입니다. 그건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금액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 원으로 규격화 되어있는 '구역예배 헌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수준(질)이 문제입니다. 권사님도 천 원이고 집사님도 천 원이고 이제 학습 겨우 받은 초신자도 천 원입니다. 그건 '예배에 헌금 순서가 있으니 그저 구색으로 낸다'는 의미 외엔 아무런 다른 의미도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천 원은 돈이 아니냐? 그거라도 모아서 소중하게 쓰면 되지" 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껏 그 차원이라면 반상회비와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엔 헌금순서가 필요하니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는 증발되어 버리고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율법주의적 잔재' 라는 말입니다.
        "남들 다 하는데 어떻게 그냥 있어요? 눈이 있는데! 천 원이라도 꺼내 놔야지."
그런 헌금이라면 아예 헌금시간 자체를 없애버리든지 방법을 바꿀 일입니다. 사람 눈치 때문에 하는 헌금은 이미 헌금이 아닌 것입니다.
        본질적이 의미를 잃어버린 헌금이나 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를 보십시오.
        "너희 수많은 제물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가 너희에게 그런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느냐? …너희는 무가치한 제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아라…"(사1:11-13)
 
        아모스 5장 21절 말씀은 더욱 신랄합니다.
        "나는 너희 종교적 행사를 싫어하고 경멸하며 너희 모임을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가 …을 드리고 …을 바쳐도 내가 받지 않을 것이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헛수고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심코 관행대로 하는 헌금이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무시하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화를 돋구는 헌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TV 저녁 드라마를 어쩌다 보게 되었는데, 극중에서 세 며느리가 서로 의논하여 돈을 모아서 매월 시어머니 용돈으로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받아 든 시어머니가 그 봉투를 도로 내밀며 말했습니다.
        "나… 이거 안 받을란다. 행여라도 너희들이 매월 얼마씩 돈을 모아서 나한테 쥐여 주는 것으로 나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있는 것으로 너희들이 여기게 될까 싶어서이다. 난 이런 거 안 바래. 그 대신 자주 전화해 주고 자주 찾아다오. 그 마음을 원해."
 
        어디 하나님이시라고 다르겠습니까?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것입니다. 의미 없는 돈 몇 푼은 하나님께 오히려 슬픔입니다. 십의 일조이든 십의 이조이든 그걸 꼬박꼬박 갖다 바친다고 예배가 되고 경배가 되리라고 여긴다면 그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작 원하시는 건 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왜 기독교는 그토록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헌금을 해야하는 것입니까? 꼭 돈을 안내고도 우리의 재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선 돈이 필요 없으신 분인데도 왜 우리 사람들의 소득의 열의 하나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온 우주의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왜 굳이 하나님께선 인간들이 거두는 소득의 열의 하나를 "여호화의 것"이라며 내놓으시라는 것입니까?
 
        '십일조 헌금'이 지니고 있는 두 번째 의미; <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함께 점검해 보기 원합니다.
 
십일조 헌금의 두 번째의 의미
 
       온 세상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인간들에게 "적어도 너희 소득의 열의 하나는 내 것이니 내놓아라"(레27:30) 고 명하신 것일까요? 우리 인간들이 얻게된 모든 소득이 사실은 다 하나님의 것인데 왜 굳이 그 중의 10%는 따로 구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먹고사시는 것도 아니거늘 말입니다.
 
        우선 '십일조'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더듬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선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성물이라(레27:30)"
        문제는 도대체 그것으로 무엇하시려고 그런 제도를 명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십일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이요, 두 번째 십일조는 첫 번째 십일조를 떼고 남은 것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바친 '헌금(물)'은 전체 소득의 19%... 즉 첫 번째 십일조에다 두 번째 십일조를 더한 만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이것으로 당신의 배를 불리셨나요? 하나님 자신의 만족과 향유를 위해 인간들에게서 받아내신 건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선 이 십일조들에 대한 '용도'에 대해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첫째 십일조(전체소득의 10%)는 바로 '레위인'들에게 줄 몫이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민18:21)
 
        여기서 '레위 자손'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은 모두 12지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들은 출애굽(이집트)후 정복한 가나안 땅을 지파 별로 기업(基業)으로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셋째 아들인 <레위>의 후손인 '레위' 지파에게만은 주거지 외의 경작지로서의 땅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른 지파 모든 백성들을 대신하여 따로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무에 전념해야 했기 때문입니다(민8:19). 이들은 신정(神政)국가인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 . 종교 . 정신적 구심점인 성막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각종 예배와 백성들의 속죄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직(신10:8)과 그 보조직(민3:5-9), 성막의 모든 직무(민18:2), 십일조 등 각종 헌금 헌물 관리 및 분배(대상9:), 백성들에 대한 교육(대하31:11-19), 민원 해결 및 재판(신17:9-), 성가대 직무(대상25:1-)등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오늘 날로 따지면 '국가공무원'과 꼭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생계를 누가 책임져야 했겠습니까?
        바로 이들의 생활비를 위해 나머지 지파 백성들이 부담한 것이 '십일조'의 목적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오늘날 우리가 국가에 내는 <세금>과 그 성격이 거의 흡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십일조를 떼고 남은 것에서 다시 10%를 떼 낸 십일조(두 번째 십일조)는 또 무슨 목적이었습니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용도로 쓰였습니다.
        그 첫째 : 이스라엘은 7년 주기로 6년 동안 땅을 경작하고 1년은 땅에게 '안식년'을 주었습니다. 이 6년 중에서 제 1년, 2년 그리고 제 4년, 5년 네 차례는 매년 세 차례 절기(무교절, 칠칠절, 초막절)를 지켜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리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 두 번째 십일조는 이때의 경비로 쓰였습니다.
        그 둘째 : 그러나 제 3년, 6년에는 위와 같은 축제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이 두 해에는 두 번째 십일조 전액을 이웃을 위한 '구제(救濟:relief, helf)'에 써야 했습니다.
        "너희는 3년마다 그 해 연말에 너희 모든 농산물의 십일조를 너희 성에 저장해 놓고 분배받은 땅이 없는 레위인과 너희 성에 사는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필요한 대로 가져가서 먹게 하라" (신명기14:28-29)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는 당시에 특별한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바로 이들을 위해 전액을 사용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은 그 십일조를 정확하게 구제를 위해 썼음을 하나님 앞에 서약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쓰거나 엉뚱한 용도로 쓰지 않았음을 말입니다. (신26:12-15)
 
        자, 이상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십일조' 헌금(헌물)의 용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해 '내 것'이라 칭하시며 인간들에게 요구하셨던 '십일조'의 용도라는 것은 실상은 거의 대부분이 바로 <레위인,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레위인'을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직자와 사역자 및 공무원> 즉 <우리를 위해서 (혹은, 대신해서) 봉사하는 이웃들>이요,  '고아와 과부'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통 털어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헌금(헌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굳이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첫째 둘째 십일조를 다 합쳐서 우리의 총 수입의 19%를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면 또 다시 그렇게 모아진 것의 78%는 우리 자신이 아닌 바로 이웃을 위해 쓰여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78%의 '용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확고부동'의 것이었습니다. 3년마다 한번씩 십일조 1년치 전액을 '이웃'을 위해 쓰는 일은 아예 '정확히 제대로' 썼음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해야 했을 정도로 에누리 없는 분명한 용도였습니다.
 
신약의 십일조 정신
 
        그러나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 구원이 완성된 신약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이 '십일조'를 어떻게 지키고 감당해야 합니까? 이를 위해선 예수님 당시 및 초대(초기)교회의 상황을 더듬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약성경에선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 헌금에 대해 직접 가르치신 적도 없고 제자(사도)들 조차도 성도들에게 십일조 생활에 대해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일조라는 단어를 전혀 언급도 안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율법적 형식주의에 바진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자랑하며 스스로 의로운 체 하고 다니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며 "너희가 그토록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하면서도 정작 그 십일조의 의미와 정신은 다 버렸도다. 십일조 법은 그렇게 잘 지키면서도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 곧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왜 버렸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로 보아 예수님 당시에도 '십일조'는 아직 관례적인 의무 조항이요 주님께서도 그 제도 자체를 무시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복음 18:12절에서도 주님께서 '십일조'라는 단어를 언급하셨지만 십일조 생활에 대한 교훈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예화 중에서 교만하고 잘난 체 하는 한 종교가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 언급이었습니다.
        바울 서신이나 여타 사도 서신에서도 '십일조 생활은 이렇게 해라'는 가르침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은 "당시엔 이미 십일조 생활이 보편화되어 있었기에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당연한 이 시대의 우리도 상식적으로 '십일조 생활'을 순종해야 한다고 강변하십니다. 제법 그럴 듯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식의 십일조 옹호론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에 의해 그 '중요하던' 십일조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 선포되지 않았던 데는 세 가지 추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많은 분들의 견해처럼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이어서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의 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주저되는 얘깁니다만) '더 이상 십일조 같은 율법에는 얽매이지 마라. 그건 구시대의 유물이다. 그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이나 하던 관습이다'의 뜻일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여기 세 번째의 가능성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그 무수한 율법 하나 하나가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정리되고 <완성> 되어진 것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규정짓고 제한하는 수 천 수 만 가지의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선 안식일엔 몇 미터 이상 걷지 말고 몇 킬로그램 이상 짐을 들지 말라는 식이었습니다. 적어도 '무엇 무엇은 하지 말라'는 법이 만 가지가 넘었습니다.
        애초에 분명한 목적과 의미에 의해 정해졌던 법들이 인간들의 생각과 어리석은 판단에 의해 왜곡되고 엉뚱하게 살이 붙으면서 마침내 그 법의 정신은 증발해 버리고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서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법이 생겼으며 왜 지켜야 하는지 따위는 상관없이 오직 법이 거기 있으므로 지켜야 하는, 그래서 율법을 아주 잘 지키는 '의인'행세를 하기 위해 법을 지키는 상황이 이미 수 백년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몰라서였든 어떤 이유로든 그 많은 율법을 잘 못 지키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야만인이 되고 사람취급도 못 받고 지옥에나 떨어질 자로 매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거운 율법의 짐 아래에서 신음하였습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십일조' 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애타는 가슴으로 절규하셨습니다.
        "그 수많은 까닭 모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겠다. 그러나 나는 그 율법을 다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그 짐을 아주 가볍게 질 수 있는 멍에를 너희에게 주려는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그 모든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수많은 도덕과 율법을 지켜 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아! 뭐는 하지말고 뭐는 하라는 식의 그 수많은 규정과 율법이 다 무슨 의미이냐?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자>는 이야기인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의 근본정신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다. 너희 모든 삶의 행동기준은 이 두 가지여야 한다. 죄가 무엇이냐? 한마디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해롭게 하는 모든 행동이다."
 
        물론 위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제가 조금 각색한 것입니다만 여기 아래에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친히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킨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어떤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계명 속에 다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3:8~10>-
 
        이 구절을 주목하십시오. "십계명과 그 밖의 다른 어떤 계명이 있을 지라도 그 모든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계명 속에 다 요약되어 있다"는 구절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십계명과 그 외의 다른 모든 계명' 안에는 '첫째 십일조와 둘째 십일조'의 계명도 들어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뻔합니다. 결국 '십일조'조차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가지 계명 안에 완전히 포함되어진 것입니다.
        '십일조'니 '십이조'니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소득)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쓸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 아닌가요? 이제 위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구약시대의 '십일조'라는 제도조차도 결국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도 바울이 위에서와 같은 말씀을 해 놓고는 뒤이어 세부사항으로 이렇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 수입의 10%는 꼭 이웃을 위해 씁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치지 않겠습니까?
        "아니 바울님, 당신은 주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있군요. 주님께선 우리에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지 '네 수입의 10%만큼만 이웃을 위해 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어찌 우리 소득의 10%만 가지고 가능하겠습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다시 옛날 우리가 얽매였던 그 율법 아래로 돌아가라고 하시는군요. 우리에게 적어도 소득의 몇 %는 내놓으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율법입니다. 우리에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한가지 법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정말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재물을 그 이웃을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 얼마나 써야 할지에 대해선 우리 자신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그건 우리의 몫이지 사도님들이 정해 줄 일이 아닙니다. 바울님, 그저 이 말씀만 하십시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만 말입니다. 이제는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이 아닌가요?"
 
        여하튼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이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예수의 사람(그리스도인)들에게는 헌금을 포함한 재물에 대한 가치관에 있어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종교적인 의무에서 겨우 겨우 '십일조'를 떼 내던 차원에서 그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전 재산의 절반을 쾌척(快擲)하였으며(눅19:8), 더 나아가 '필요한 대로 함께 나누어 쓰자'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전 재산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  놓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2:44-45)
 
        그들이 신명기를 거들먹거리며 첫째 십일조니 둘째 십일조니 하거나 혹은 말라기 3장 8절을 갖다대고는"야, 십일조 안 하면 하나님의 것 떼먹은 도둑놈이라며 저주하신대. 죽기 싫거든 십일조... 아니 십의 이조를 하자구. 그게 성경적이래!" 하면서 그렇게 헌금했습니까? 누가 시켜서였습니까? 사도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 십일조 떼먹은 도둑놈들아! 얻어맞기 전에 소급해서 다 바쳐라!"고 설교했기 때문이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모시자 마자 그 영혼에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내 것 챙기기 바빴고 끌어 모으느라 정신 없었던 그들이 주님을 만난 이후 갑자기 이웃들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아직도 구경조차 못해 본 이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먹고 있는 것을 못 먹고 있는 이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못 입고 있는 이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웃, 이웃, 이웃, 이웃...
        매 월말마다 밤새워 주판알을 두드리며 '온전한 십일조' 계산하느라 끙끙대던 부부, 그래서 그 다음 주일에 <십일조 : 103,321원>을 헌금봉투에 챙겨 넣던 그 부부가 예수님을 그 인생에 모신 이후 '돌아버렸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입학 못한 이웃 아들을 위해 써 달라고 십의 팔조를 내놓은 것입니다. 수술비가 없어 죽어 가는 이웃 살린다고 자식놈 10년 후 교육보험 해지시키고 몽땅 찾아다 강제로 그 이웃을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친척들은 그 부부를 보고 "예수 믿더니 헤까닥 돌았다"고 소리쳤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 3장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모셔들인 '예수쟁이'들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사람사랑, 이웃사랑>이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돕지 못해서 안달이었습니다.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환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도들이 흉년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가슴을 치며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고 부르짖었습니다. 양식을 사 보낼 헌금을 모으자 그들은 앞을 다투어 자신의 소유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상황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여러분에게도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운 시련과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오히려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힘껏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겹도록 헌금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에게도 헌신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1-5>
 
        마케도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조차도 지지리도 못 사는 꽃동네 '영세민'들이었습니다. 그 '주제'에 흉년으로 굶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자신들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도 기가 차서 바울 사도가 나섰습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까지 이러지 않으셔도 다른 교회들에서 다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도 겨우 사시는 분들 아닙니까?" 하고 말렸습니다. 대표가 돌아가서 성도들에게 그것을 알리자 이번에는 부대표가 바울 사도에게 달려갔습니다. "제발 우리에게도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나 바울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엔 여 집사 대표단이 다시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바울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영세민 꽃동네 사람들에게 헌금을 거둘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 집사 대표단이 돌아가자 마케도니아 교회에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의 한 다혈질 교인이 씩씩거리며 단숨에 사도들 숙소로 달려가더니만 소리쳤습니다.
        "아니 사도님들 좀 봅시다! 도대체 우리 마케도니아 교회 교인들을 뭘로 보는기요? 우리를 무시하능교? 와 우리가 하루 두끼로 줄이고 굶어죽는 예루살렘 사람들 좀 살리자카는데 사도님들이 무신 권리로 못하게 하능교? 정 못하게 하면 내가 마 대표로 여기서 콱 할복자살 할끼구마! 우짤라능교? 씩씩!"
        사도 바울이 놀라서 그를 달래며 대답했습니다.
        "그..그..그러면...허 헌금 하..하십시오. 대..대신...그냥 정성만 조금 보이십시오. 아셨지요?"
        "헹! 진작 그렇게 나오실 일이지! 알았구마요. 우쨌기나 기회를 주셔서 고맙십니데이."
        "제발 다들 아주 조금씩만 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그러나 그 날 밤 마케도니아 영세민 꽃동네에서 나온 헌금은 이웃 부자동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작정한 헌금의 배나 되었고 헌금 통 안엔 금반지, 은목걸이, 쇠숟가락, 토큰까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바울은 기절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7절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적어도 초대교회 당시에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예수의 사랑이 들어가자 그들의 물질(재물)사용에 대한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웃사랑을 위한 이들의 물질적인 헌신과 희생을 '수입의 몇 %...' 따위로 규정짓고 법적인 의무조항으로 옭아맨다는 것은 한마디로 유치하고 저차원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규정이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자비와 사랑'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몰랐을까요?
 
        신약성경에서 왜 '십일조'법에 대한 가르침이 사라져야 했는지를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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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히 조심스런 이야기입니다만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두 가지 큰 우(愚)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과거 2천년 이전의 '율법시대'로 몰아가고 있는 잘못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선 '십일조'가 대단한 '법'이 되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에게는 '십일조 생활', 아니 더 나아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이 끊임없이 교육되고 있습니다. 명색이 제직(장로, 권사, 집사)쯤 되면 십일조는 대단히 중요한 의무사항이 되어 있습니다. 그냥 강조해선 말을 잘 안 들으니까 특별 부흥회 때 부흥 강사를 통해 "십일조 곧 하나님의 것을 떼먹은 이 도둑놈들아!" 라고 성도들을 몰아 부칩니다. 교회 주보엔 십일조 헌금자 명단이 빡빡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성숙한 신앙인'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알게 모르게 우리에겐 우리 수입에서 10%를 떼 내어 바치는 '십일조'가 하나님 앞에서의 재물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은, 종교적 의무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의 마지노선이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의 잘못은, 십일조 헌금의 사용상의 오류입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구약시대에서만 하여도 성도들이 바치는 첫 번째 십일조(소득의 10%)는 전액이, 두 번째 십일조(소득의 9%)의 최소 3분의 1이 레위인을 비롯한 이웃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예수님 이후엔 근본적으로 성도들의 헌금생활 자체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내어놓는 '유일한' 동기는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들도 그렇습니까? 다른 헌금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웃과 나누기 위한 법정한도액(?)인 첫 번째 십일조' 조차도 이웃들을 위해 쓰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구제'를 위해 한 푼의 오차 없이 사용했음을 서약까지 해야 했던 '두 번째 십일조의 33%'정도라도 쓰고 있습니까?
        최근(1994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총 헌금액 중에서 '이웃'들을 위해 내보낸 구제사업비 비율이 5.7%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지도자, 목회자들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물질적 헌신의 동기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헌금'에 대한 설교는 많이 듣는데 정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한 헌금>에 대한 요청은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평생에 기억할 수 있는 '헌금에 대한 강력한 요청'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대부분 성전건축, 교육관 건축, 수양관 부지 매입 및 건축 등을 위한 헌금요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전 건축을 위해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고 전세금을 빼서 내어놓고 허리가 휘도록 일해서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는 이야기와 간증은 수없이 들었어도 지금까지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 전 교인이 힘에 겹도록 자원하여 헌금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건 신약성경의 마케도니아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로 족하다는 것일까요?
 
        더듬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십일조 헌금, 주일헌금, 구역예배 헌금을 준비하면서 <하나님, 이것은 이웃들과 나눌 몫입니다>라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있을 리가 없지요. 헌금의 목적이 그런 것이라는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니 설령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도 교회에서 그렇게 쓰질 않으니까요.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무언가 물질적으로도 헌신하기를 원하는 '가진 분'들이 참 많은데 우리 교회들이 그들의 헌신에 불을 붙일 '이웃들을 섬기기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껏 성전건축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 넓히고 건물 올리는 것에 대해선 '이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혼돈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개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하기엔 너무도 막막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두 해 전 저희 쪽지에 '모든 헌금의 60%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대구 모 교회' 글이 나가자 단지 그 이유만으로 "도대체 그 교회가 어디 있느냐? 이사를 와서 출석할 교회를 찾고 있는데 아무리 멀어도 그 교회에 나가겠다" 심지어는 "아예 교회를 옮기겠다"는 분들의 문의 전화가 무수히 걸려 왔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교회들이 교인들의 '신바람 나는 헌금생활'의 참된 동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모여서 함께 예배드릴 건물이나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관이나 주차장, 수양관 짓고 마련하는 것이 결코 나쁘다거나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이야기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과연 지금의 우리의 헌금생활이 얼마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애초에 '이웃들을 위한 몫'으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십일조'헌금을 우리가 다른 용도로 대부분 써도 좋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크고 안락하고 냉난방이 잘 된 예배당이나 주차장, 교회묘지, 수양관 등이 과연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특히 '이웃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런 시설들은 사실상 '우리자신'을 위한 것들이 아닌가요? 문제는 그런 시설 자체보다도, '십일조' 헌금들로 그런 일을 위해 너무 많이 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 건물이나 교육관, 수양관 등의 시설을 엄청난 금액의 헌금들로 마련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훗날 "너희에게 준 재물들로 나를 위해 값지게 썼구나.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웃'을 위한 투자에 대해서만은 단호하고도 명확한 보장을 받았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들 내 형제 중에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일이 바로 내게 한 일이다." (마25:40)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 보잘것없는 사람 한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앞의)의로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에 들어갈 것이다." (마25:45~46)
 
        위의 이 말씀은 얼마나 심각한 말씀입니까? 세상에 가장 볼품 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사람조차도 곧 주님 자신과 꼭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며 돌보지 않는다면 마지막 심판날에 "왜 너는 하나님 나를 무시하고 외면했느냐?"고 추궁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위해선 뭘 한 적이 없는데도 이 땅에서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고 그들을 섬긴 것만으로 "너희가 바로 하나님인 나를 그토록 따뜻이 대접하였도다" 라고 평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의 쓰임새에도 꼭 같이 적용되는 문제 아닌가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날 우리 '예수의 사람들(그리스도인)'이 회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었던 그 마음, 곧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의 그 필요를 채워주고 싶어 못 견디는 그 뜨거운 마음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 형제 자매들이 지녔던 그 가슴입니다.
        그건 복 받으려고 하는 짓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사랑이 우리 가슴을 불태우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를 일깨워 그냥 두고 볼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냥 하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 헌금이 아닙니다. <십의 일조>가 성경적이냐 <십의 이조>가 성경적이냐 따져서 하는 헌금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옆에 있기에 '차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말리는데도 힘닿는 데까지, 아니 어떤 이들은 힘에 넘치도록 너무나 기쁘게 하는 헌금... 그것이 마케도니아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헌금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헌금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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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께 간절한 마음으로 권고 드립니다.
십일조 헌금을 종교적 의무로 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종교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벽을 깨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는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의 최소한의 '물질적' 호흡입니다. 그건 우리의 자연스런 삶입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의무로 하지 마십시오. 그저 이웃과 나누는 것이 나의 삶이기에 당당하게 하십시오.
 
        할 능력만 있다면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구조라도 이웃들과 나누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웃들이 어디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십시오. 그러나 지혜롭게 하십시오. 사사로이 무턱대고 이웃과 나눈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사도들 앞에' 가지고 나왔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잘 관리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진 여러분의 교회나 전문 구제 기관 등에 위탁하십시오. 가능하면 목회자님들과 상의하셔서 하시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 얼마든지 가까운 이웃들을 섬기셔도 좋습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개념이 굉장히 폭이 넓은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출석하는 신앙공동체도 <교회>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조금 더 확대하면 우리가 속한 가정 자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가정과 가정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의 교회와 작은 규모의 교회가 모여서 더 커다란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라고 할 때는 잘 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한 개인도 명확한 <교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한 가정도 명확한, 누구도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 그 최소 단위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의 관리와 집행의 <정당한>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독립기관입니다. 물론 권리도 있지만 책임도 동시에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일조>를 사사로이 집행할 수 있느냐는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개인이나 가정이 십일조 헌금을 사용할 때 자칫 그릇된 동기로 사용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가능하면 속해 있는, 보다 큰 교회 공동체를 통해, 전문적인 기관을 통해> 하라는 것이지, 개인이나 가정이 십일조를 집행하면 안되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그것이 더욱 효율적일 때도 있습니다. 당장의 긴급한 구제가 필요한 이웃이 있을 때 교회공동체를 경유하여 의논을 거쳐서 결제를 받고 집행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가정이나 개인으로서의 <교회>를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며, 성숙한 책임을 가르치는 교회에서는 도리어 이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김진홍 목사님의 <활빈교회>입니다 (2002년 현재는, 구리 두레교회를 시무하고 계십니다-편집자). 김진홍 목사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아예 설교를 이렇게 하십니다.
        "십일조를 꼭 우리 두레교회에 내야한다는 생각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 가까이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직접 집행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집 가까이에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가 있어서 여러분 판단에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면 그 교회에다 십일조를 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한 몸이니, 어느 교회에 헌금을 하시든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정작 본 교회는 어떻게 재정 운용을 하느냐 하는 염려가 있을 수 있는데, 활빈교회가 예산이 줄어들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교회가 하는 사역들이 위축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교회는 날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헌금이 점점 확장되어 나라 안팎으로 귀한 사역들을 확대해가고 있습니다. 또 상식이 있는 신자라면, 자신이 속하여 양육을 받고 영적인 공급을 받는 본 교회를 위한 헌금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겠지요.  
        <헌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그 재정에 대한 관리와 사용에 있어서 교회 공동체가 교인들의 신뢰를 얻게 되면 교인들은 <즐거움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각자 각자의 책임과 소신이 존중받는다는 생각에 혹 십일조 헌금을 교회를 통하지 않고 가정 단위로 지출을 한다고 하여도 신중하게 사용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쓸데없는 죄책감이나 거리낌을 갖지 않는 자유로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숙한 신자로 키워 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다 헌금만 내고는 그 사용과 관리에는 나 몰라라 하는 수동적인 신자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그 헌금을 관리하고 집행하고 책임까지 지는 능동적인 신자로 만드는 교육인 것입니다.
        * (2002년 보충) 대전의 온빛교회(허광오 목사)의 경우는, 아예 추수감사헌금의 경우는 작정한 추수감사헌금을 성도들 각자가 일체 알아서 지출하도록 가르칩니다. 주변에 그 재정이 꼭 필요한 이웃들을 직접 찾아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전후로 해서 그 교회는 성도들 전체가 <구제 기관>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남으면', 혹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기가 힘들거든 그 헌금을 교회공동체에 내라고 공고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구제 기관에서 대신 집행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그렇게 개인이 헌금을 집행하게 되면 <자기 이름을 내고 싶은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금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만족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유혹은 어떤 방법으로든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교회공동체에 헌금을 하였다고 해서 그 유혹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으로 집행한다고 해서 은밀히 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간교한 존재인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픈 욕심도 있는가 하면, <이름 없이 은밀히> 뭔가를 했다는 자기 만족의 유혹도 대단히 큽니다. 결국은 교회 지도자가 신자들에게 헌금의 정신을 얼마나 제대로 가르치고 양육하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의 공식적인 입장은, 가능한 십일조 헌금만큼은 소속 교회를 통하여 집행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판단과 결정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울러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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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돌고 도는 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들, 기왕이면 그것들을 '사랑의 강물'에 띄워서 돌게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돈'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 민족이 서양의 여러 그리스도인들에게 졌던 사랑의 빚을 생각해 보십시오. 헐벗음과 가난으로 힘겹게 하루 하루를 살던 100여 년 전,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힘에 겹도록 헌금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모두 서방의 교회들이 한 일입니다. 그들은 동방의 한 '지극히 작은' 이웃을 위해 엄청난 헌금을 보내왔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의 빚을 그 누군가에게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심이 있는 민족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려면 이대로는 안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마케도니아 성도들이 지녔던 그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온 교회가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의 십일조가 나누어져야 할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레위인>들 조차도 우리로부터 '나눔'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혹시 우리를 대신해서 전임(Full Time)으로 곳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웃을 섬기면서도 생존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레위인>들이 없습니까?
 
        어린이들을 위해 밤낮으로 애쓰며 수년동안 눈물겹도록 헌신해 온 대구의 한 인형극 선교단을 알고 있습니다. 한달 15-20여 회의 공연, 그리고 준비를 위해 완전히 Full Time 으로 헌신해야 하는 전임 사역자들이 매월 '생존비'로 받아 가는 사례비가 기껏 몇 만원 정도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들은 이런 '레위인'들에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전임사역자가 5명인 그 인형극 팀에 단 50명만 십일조 헌금을 보내도 그 귀한 사역자들이 '미친 듯이' 일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 병들고 소외되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역하는 분들도 많고, 대학교 캠퍼스에서 젊은이들을 전도하고 양육하는 선교단체 사역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역자들의 경제적 삶이라는 것은 상상 이하의 수준입니다. <생활>이 아니라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사역자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은 잘났든 못났든 우리가 책임져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레위인>입니다. 구약시대에 그랬듯이 우리가 이들을 외면함으로 이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그들이 힘겹게 헌신한 지금의 사역 현장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느헤미야 13:10)
        그러나 우리 교회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을 지원하는 일에 <대단히> 인색하고 소홀한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신자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 이들에 대한 지원을 건의하고 호소하여도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교회가 추진하는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 일이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세상의 지탄을 받는 일일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신자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지 못할 때, 특히 신자들의 헌금을 관리하고 잘 사용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말입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또 하나의 작은 <교회>인 우리 자신, 우리 가정이 그 성스러운 하나님의 일(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일꾼들을 섬기고 돌보는 그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럴 때 어느 누가 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어찌 그것을 <사사로운> 일로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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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헌금의 대표격인 '십일조(十一條)'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정리해 볼까요?
        '십일조'란 그 유래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들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라고 명한 중요한 계명(誡命)이었습니다. 그 중의 '일부'는 축제(감사예배)의 경비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레위인, 고아와 과부'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公的)인 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 오늘날로 보자면 교회 안의 전임(Full Time) 사역자(목회자, 직원, 기타 사역자들)는 물론이요 모든 공직자(공무원)들도 포함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일을 한 지파가 전담했는데 바로 '레위' 지파이며, 이 한 지파 사람들의 생활(생계)을 위해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득의 10%를 내 놓은 것이 곧 '십일조'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고아와 과부'란 그 당시 사회적 관습이나 환경 상 스스로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통틀어 일컫는 대명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선 이 사람들 또한 모든 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거두어 그 생계를 책임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들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체 수입에서 최소한 3%를 의무적으로 뗀 셈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고아와 과부'들은 '여러 가지 사유(극한 가난, 질병이나 신체장애, 사회 환경적 이유 등등)로 인해 자활 능력이 없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 모든 인류에게(특히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바로 이 이웃들, 우리가 책임지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모든 이웃들을 위해 우리의 수입의 열의 하나(엄밀히 말하면 13%)를 구별하여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의 의미요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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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헌혈
        '십일조'란 바로 '헌혈(獻血)'과도 꼭 같은 것입니다. 헌혈이란 우리가 피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살 도리가 없는 이웃들에게 너무도 고귀한 우리의(생명과도 같은) 피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살리려고 내놓는 우리 자신의 몸인 것입니다. 그 얼마의 피를 빼낸다고 우리가 죽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얼마의 피가 죽어 가는 이웃을 살려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곧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기에 그들을 살리려고> 내놓는 물질(재물)입니다. 우리 소득의 10%를 내놓는다고 우리가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열 명이 자신의 십일조를 내놓으면 귀중한 한 명의 '이웃'이 우리들과 '같은 수준'으로 살 수 있습니다. 헌혈이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 놓는 우리 자신의 몫인 것처럼 십일조 헌금도 우리의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놓는 우리의 몫입니다.
 
        누군가 피를 좀 흘렸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그 사람에게 우리 피를 헌혈해 주진 않습니다. 그의 몸 속에서 상실된 피를 금방 보충해 줄(造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겐 굳이 헌혈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자신의 조혈(造血)능력 만으로는 살 수 없는 이에겐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까진 남들이 피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혹 어떤 이들은 아예 조혈능력을 상실하여 지속적으로 수혈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질(재물)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몸은 멀쩡한데 너무나 가난하고 무슨 방법이 없어 계속적인 빈곤의 악순환 가운데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몸마저 병들고 쇠약하여(혹은 너무 심한 장애를 입어) 아예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해 나갈 능력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십일조'는 이들을 일으키고 살려내기 위해 우리가 내 놓는 '물질적 헌혈'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십일조>는 이웃들을 일으키고 살려내기 위해 내놓는 우리의 물질적인 헌혈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란 우리 모두(나 자신+이웃)가 <함께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정의요 이 땅의 정의(正義)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정의'를 위해 기꺼이 십일조를 내놓고 있습니까? 아니, 십일조를 하긴 하는데 정말 그 참된 의미와 정신을 알고 행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 '정의'를 위해 성도들이 '헌혈'해 놓은 십일조를 정말 제대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선 '나는 십일조 하나는 철저하게 잘 한다'고 떠벌리는 종교인들, 율법(성경)학자들을 향해 진노하시며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별의 별 시시콜콜한 것에 대해서도 십분의 일을 철저하게 잘 내놓으면서도)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저버렸도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마태 23:23-24)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십일조 헌금을 철저하게 바치고 거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둔 그 십일조를 정말 이 땅의 물질적인 '정의'와 불쌍한 이웃에 대한 '자비'와 그 이웃들을 우리를 믿고 맡기신 하나님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고 정말 제대로 쓰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짓밟고 있으면서 <철저한 십일조> 따위의 말을 떠들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책망 앞에서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은 얼마나 떳떳할 것입니까?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선 우리 인간들에게 외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 종교적 행사를 싫어하고 경멸하며 너희 모임을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가 나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나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를 드려도 내가 받지 않을 것이며 살찐 짐승으로 화목제를 드려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노랫소리를 그쳐라. 너희 비파(*악기) 소리를 내가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 대신) 오히려 너희는 공정(公正)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正義)를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게 하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교회들은 '돈'을 가지고서도 이 땅에 '공정(公正:공명정대)'과 '정의'를 이루고 있습니까? 이웃과 나누라고 한 '십일조'가 제대로 그 이웃들에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저 멀리 이방의 나라,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까? 혹 그 십일조의 대부분이 우리끼리 먹고 마시기 위해, 우리끼리 모일 집과 수양관 짓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주차장 넓히는 일에 투자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건강할 때 죽어 가는 이웃을 위해 헌혈해 주어 그를 살려 준다면 혹 내가 사고로 피를 많이 흘려 죽어갈 때 바로 그 이웃이 나를 위해 자신의 피를 나누어주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재물에 있어서도 이와 꼭 같은 원리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이웃을 위해 나의 것을  내 놓는 것'이 헌금이며, 그러한 헌금행위가 바로 '공정(公正)'이라고 고린도후서  8장 10~14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헌금'이란 우리가 복 받고 잘 되기 위해 하나님이나 목사님 앞에 내어놓는 '복채(卜債)'나 뇌물도 아니며, 무슨 멋진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과 흥정하는 '미끼'도 결코 아닙니다.
        모든 헌금은 궁극적으로 '이웃을 위한 우리의 나눔'입니다. 특히 십일조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 재물이 이웃의 몸을 살리든 영혼을 살리든 어쨌거나 '이웃을 살리는 일'에 쓰여 질 때 하나님께선 그것을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셨고(빌4:14~18),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라고 하셨고(히13:16),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요일3:17)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웃과 나누어 질 때 말입니다.
 
        1993년 8월호에, 4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든 십일조 헌금(헌금 총액의 60-80%)을 바깥의 이웃을 위해 내보내고 있다는 <전주 깡통교회(안디옥교회)> 이야기를 상세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뭐가 별나서입니까? 좀 튀고 싶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정상(正常)'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의 의미와 정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행하게 되어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삶인 것입니다.
 
        '십일조'를 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지고 드리고 있습니까? 그 십일조를 제대로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두 가지 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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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수칙
 
        여러분께 묻습니다. 왜 헌금을 내놓을 때 봉투에 여러분의 이름을 쓰십니까? 어떤 의미가 있으며 무슨 동기가 그 뒤 배경에 담겨 있습니까?
        거꾸로 더듬어 본다면, 만약 여러분이 헌금봉투에 이름을 쓰지 않았을 경우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첫째, 주보에 기록되는 '헌금자 명단'에서 빠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어떤 교회의 경우는 봉헌기도 시간에 목사님께서 일일이 헌금자 이름을 호명하는데 그때 우리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되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 이름이 주보에서 호명 명단에서 빠졌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장님이셔서 우리 이름을 소리쳐 들려 드려야만 우리가 헌금을 드렸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헌금봉투에 우리 이름을 안 적으면 하나님께서 헷갈리시겠습니까? 당연히 대답은 'NO!'입니다. 절대 NO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렘11:20, 롬 8:27) 이시며, 사람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뜻까지도 알아내시는 분(히4:12)이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가 할 말까지도 다 아시는 분(시139:4) 아니십니까? 시편 139편 기자는 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구구절절이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우리가 왜 하나님을 장님이나 귀머거리로 만드는 것입니까? 우리가 헌금봉투에 왜 우리 이름을 적고, 또 이름을 공개적으로 호명까지 하느냐 말입니다.
        헌금봉투에 굳이 우리 이름을 적는 데엔 우리 스스로 인식하고 있든 못하고 있든 간에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불순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음에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 첫째는,(특히 십일조의 경우) 종교적 의무를 다 하고 있음에 대한 과시 내지는 자기만족감 때문입니다. 구제나 후원헌금의 경우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외에 목회자들께서 말씀하시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특히 십일조의 경우) 성도들의 영적인 건강을 체크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생활 자체로 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숙도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판단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셨던 바입니다. 주님께서 맹렬한 분노로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적어도 십일조 생활에선 그 성적이 A+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빈사상태였습니다. 오늘날이라고 예외이겠습니까?
 
        2. 성도들 가정이나 개인의 소식을 알고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은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시겠지요? 교회에선 아주 이상한 관행이 있는데, 교인들은 자신이나 가정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면 헌금을 얼마 봉투에 넣고 봉투에다가 그 내용을 적습니다. 예를 들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나 누가 입학을 했다거나 승진을 했다거나 하면 그걸 적고 이런 저런 이유로 감사예물을 드린다고 봉투에 적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목회자가 예배시간에 그 내용을 공개하고는 소위 '축복기도'까지 해 주는 것입니다.
        너무 비판적이라고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참 이상한 것은, 왜 어떤 감사 드릴 일이 생기면 그 감사를 '꼭' 돈(헌금)으로 하나님 앞에 표현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인지라 물질에 우리 마음이 있으니까 우리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물질(재물)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구요? 굉장히 그럴 듯한 이야기이지만 이건 자칫하면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정말 이상한 분으로 만들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 성도들의 영적 수준을 정말 유치하고 저급스럽게 만들 소지가 대단히 많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감사의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데엔 '물질'이 필요한 걸까요? 그리고 우리의 가정이나 개인의 감사한 상황을 다른 성도들과 나누는 것은 헌금시간과 헌금 봉투에 적는 글이라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요? 참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면, 드릴 헌금이 없어 미처 헌금봉투를 마련하지 못한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감사한 일들을 무슨 방법으로 이웃들과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에 한 성도가 감사헌금 봉투에다 "저희 큰아들 서울대 입학시험에 합격케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라고 적어서 헌금시간에 드렸고 그걸 목회자가 공개적으로 읽었다면, 회중석에 앉아 있는 성도들 가운데 자녀가 대학입시에 떨어져 상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어떨 것입니까? 더욱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자칫하면, 헌금시간에 헌금 사유, 헌금자 이름을 일일이 공개하게 되면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고 표현하는 대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업적이나 능력을 과시하고 찬사를 받으려는 그릇된 마음을 심어주기 십상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헌금봉투에다가 이름을 적고 헌금 이유를 적은 것은 과연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목사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만약 목사님이 그 헌금봉투에 씌어진 글을 공개적으로 읽지도 않고 이름을 밝히지도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속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조용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진지하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삼스럽게 성경을 들춰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비단 '헌금'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삶에 대한 원칙과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선 마태복음 6장에서 너무도 단호하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선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 6:1)
 
        뒤이어 이 명령이 적용되는 예를 몇 가지 들고 계시는데 첫째는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일(헌물, 헌금)이요, 두 번째는 기도하는 일과 금식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위대한 한 가지 '대강령(大綱領)'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의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 6:3)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나 기도나 금식 등에 대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엄히 경고하셨습니까?
 
        "네가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위선자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길거리에서 하듯 나팔을 불지 말아라 (마6:2). 너희는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사람에게 나타내려고 하지 말아라.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6:5-6). 너희는 금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금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아라....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데 계시는 너의 아버지께만 보여라(마6:16,18)."
 
        이 땅의 교회는 예수의 이 명령,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사람을 의식한 선행이나 신앙 생활을 폐기처분하라> 는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나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게 하며, 나 자신을 숨기고, 더 나아가 날마다 나 자신을 죽이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그것에는 '헌금생활'이라고 예외가 결코 아닙니다. 결단코! 절대로!
 
        만약 교회가 헌금자나 헌납자의 이름을 떠들고 드러내고 밝힌다면 그것은 마태복음 6장의 예수님의 명령에 침을 뱉고 재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만약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위한 성금을 신문사나 방송국으로 보내면서 (그 명단이 공개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교회 이름과 당회장 목사님의 성함을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이 명령 - "너는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 을 발로 짓밟고 조롱하는 행위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면서 거기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건물을 지으면서 기초석에 헌금자의 명단을 새기는 일들은,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는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을 완전히 짓밟고 모욕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여! 권고 드리거니와,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헌금을 내 놓을 때 그 헌금봉투에다 여러분의 이름을 적지 않으실 순 없습니까? 주보에다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는 곳일 수록 더욱 더욱 그리 하십시오. 그저 겸손히... 당신 가슴속에 계셔서 당신의 속마음 하나 하나까지 다 헤아리시는 그 하나님께만 조용히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이웃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예요.>
        <제게 베푸신 은혜가 감사해서 이 감사의 마음을 이웃들과도 나누고 싶어 저의 소유중의 얼마를 여기 내놓아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섬기고 있는 분들이 이것으로 유익하게 쓰도록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 봉투 안의 금액까지 다 알고 계시고 당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모양과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신다면 그리 하십시오.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들아!"라고 진노하시며 꾸짖으셨던 '위선자'들의 무리에 끼이고 싶어하는 우리의 탐욕을 사전에 꺾어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헌금봉투에서 우리의 이름을 지워버림으로써 목회자들께서 우리 양떼들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생겨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리하십시오. 예수님을 대적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도 우리보다 십일조 생활을 훨씬 더 잘 했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기껏 십일조' 정도로 목자들이 양떼들의 영적 건강을 체크하는 우를 범치 않으시도록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그보다 더 높은 수준과 차원으로 목자님들이 우리 양떼들을 점검하고 돌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교회 목회자께서 전화를 걸어와, <그것은 시골교회의 상황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시골교회에서는 이름을 안 불러주면 헌금을 안 합니다. 안 그래도 헌금액이 너무나 적은데 그마저도 안 하면 교회 운영을 어떻게 합니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할 벽입니다. 신자들을 그 수준에서 머무르도록 양육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어린 신자라 하더라도 분명한 하늘나라의 정신과 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목회자의 역량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치 불교신자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서는 예전에 법당이나 스님에게 <시주>하던 습관 대로 <헌금>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신앙 지도자로서의 직무유기이며 무책임인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헌금자 이름을 밝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로는 타 기관이나 개인에게 송금할 때는 반드시 송금자 진짜 이름을 밝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그 상대 쪽에다 부탁하여 송금자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 말도록 요청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희 <낮.해.밤.달-해와달> 쪽지사역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매월 500여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정이 소유됩니다. (1995.5 현재) 이 모든 재정은 100% 외부에서 누군가 보내는 후원금으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 사역을 후원하시는 여러 분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뭉클합니다. 저희는 이 사역을 8년째 해 오면서 헌금자 명단을 쪽지에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 왔습니다. 한때 이름 첫 이니셜로(예: 홍길동→H.K.D 혹은 ㅎㄱㄷ)적기도 했으나 곧 그마저도 중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저희 사역을 도우시는 분들은 헌금을 보내놓고 어디에선가 '내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이나 만족감' 따위는 기대도 안 한 분들입니다. 심지어 '내가 보낸 헌금이 거기에 제대로 들어가기는 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권리도 포기한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매월 꼬박꼬박 '죽으라고' 헌금을 보내오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참 귀한 분들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어떤 분들은 4년 넘게 매달 매달 잊지도 않고 후원금을 보내 오십니다. 그 정성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저희 쪽지사역 후원자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너무 고맙습니다. 이 분들은 "거기에 돈 보내 놓으면 헛된 데 안 쓸 줄 믿는다"는 분들 같습니다. 그 '무턱댄' 신뢰감이 너무 고맙습니다. 그것이 저희에 대한 신뢰감인 동시에 참으로 무서운 '경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돈 보내 줘놓고는 명단이나 금액, 입금 여부조차 확인 안 한다고 뒤로 빼돌리거나 헌금 총액을 속이거나 하지 않을 줄 믿소. 그건 {낮.해.밤.달} 당신들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니 그 문제는 하나님 손에 맡기겠소. 알겠소?" 라는...
        그래놓고는 단지 열 여섯 쪽 자리 쪽지 하나 겨우 펴내는 기관에다 매월 몇 백만 원씩 거금을 떠맡기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같은 세상에 다들 '간덩이가 부은, 정신 나가신' 분들인 것입니다.
 
        무명의 한 작은(직원이라곤 두 명이 전부인) 문서선교기관과 수백 명의 후원자들(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신뢰관계가 가능하였다면 우리의 교회들은 두말 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저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주보에서 헌금자 명단을 죄다 지우고 봉헌기도 시간에 헌금자 이름을 호명하거나 헌금 사유 공개하는 것을 다 없애고 심지어 헌금주머니 돌리는 것까지도 다 없앤다고 하더라도, 정말 모여진 헌금을 명분 있는 일에 아름답게 귀하게 쓰기만 한다면 온 교인들이 지금보다 갑절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힘에 지나도록, 아니 '간이라도 빼 주겠노라'며 더 큰 기쁨으로 헌금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지난 5월 초에 편지 한 통이 사무실로 날아들었습니다. "언젠가 쪽지에서 청송교도소에서(재소자들은 대상으로) 사역하신다는 장로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쪽지 과월호 합본을 그 장로님께 보내 주세요" 라며 무려 12만원짜리 우편환을 동봉했는데 발신자 주소도 이름도 없는 편지였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그분은 마태복음 6장의 주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또 기꺼이 순종하려는 '그리스도인-예수의 제자'인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고 교회든 어는 기관이나 개인에게든 헌금을 보냈다고 하여 무조건 나쁘다거나 불순한 동기를 가진 행동이었다고 말씀드리려는 게 결코 아닙니다.(부디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적는 일로 인해 우리가 빠져들기 쉬운 '유혹'에 대해 사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나 칭찬을 받을 만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그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훈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그 욕망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그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순간 순간마다!
 
        무명(無名)헌금(헌납) 운동을 권고 드립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적은 금액은 실천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금액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더 큰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 돈과 물건에 우리 이름을 남기고 싶은 더 큰 욕망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마지막까지 숨기고 엎드리는 바로 그 길을 가야하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그 길이 하늘나라에  상(賞)을 쌓는 길이기도 하기에! (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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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wonhyukc/4002500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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