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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또 청년이고, 또 노동이다. 모두가 다 그럴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필요하도 생각하는 글이 무엇보다 가장 잘읽힌다. 나는 아직 청년이고 건강한 노동자가 되길 희망한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곧 청년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운이없게도 경제활동을 30대까지 못하게 되면 빈축을 사리라는건 불보듯 뻔하다. 이렇게 생각하는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미루어 짐작은 했었지만 이 책에 청년들을 만나 개인의 인생과 생각을 털어놓은 인터뷰를 보니 명확해진다.
그들은 나와 그리고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있다. 청년이고 사회에 도움이 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 무수히 들어봤지만 그깟거 하면 되지 않냐고, 도전은 해봤냐고 네 능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양반들에게 처절하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조금씩 다른 차이점은 처해진 환경과 학력, 외모 등 흔히 스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요컨대 스펙은 다 달라도 청년들이 꿈을 갖고 주어진 환경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 같은 이 사람들은 성공가도를 달리지 못하고 있는것인가. 아니 왜 오히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가치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가. 왜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있으며 왜 보호받아야 하는가.
치열하기도 하고 범속하기도 한 이 이야기들이 울림있게 다가온다면 청년이거나 청년 노동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는 사람일테다. 울림이 없다면 소멸한 중산층 이상의 계급으로서 노동 문제를 직시해본 적이 없거나, 인지하고 못마땅한 사람일테다. 추천사에서 필자는 청년의 아픔을 읽고 울어버렸다고 했다. 본인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보다 했지만,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고 드럽게 재미없다며 침을 뱉고 나왔던 메마른 심장의 소유자인 나의 코끝도 뭉텅 아파오는걸 보면 그 이유는 아닌 듯 하다. 아마도 공감하기 힘든 소수가 겪고있는 아픔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뉴스에서도, 심지어 나까지 너무도 많은 사람이 흔히 겪는 이야기임이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 공감의 감정은 고통이란 것이 둘째, 책임소재가 그들에 있지 않다는것, 오히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바위에 계란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그다음이다. 더더욱 안타까운건 그들의 노력이 꿈의 실현보다는 생존에 맞추어져있는데 그것조차 삶을 짓누를 정도로 힘들어보인다는 것이다.
정규직은 현재 품귀현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일자리가 적다. 사람들이 청년들이 눈이높고 어려운 일자리를 피해서 그렇다고 한다. 누누히 지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규직은 전술했듯이 귀하고, 비정규직을 비롯해 간접고용형태는 고용불안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나머지는 거의 말하기 참담할 정도로 대우가 나쁜 질나쁜 일자리다. 질나쁜 일자리는 누차 말하듯이 국가경제에 하등 도움될것이 없다. 구매력을 향상시켜 내수시장을 키우지도, 국민들의 창의력과 생산성을 올리지도 못한다. 개중에는 차라리 망해주는게 경제에 도움될정도로 나쁜 생산성을 가진 기업이 노동자만 수탈해 경제에 기생하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밟다 불합리를 거부하고 정치혁신에 뛰어든 청년이 책에 나온다. 그는 국내 최고수준의 지적능력과 학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스템 내부 불합리와 89만원의 저임금을 경험해야 했다. 그를 혁파하기 위해 시의원까지 출마한다. 그를 어쨋거나 버티면 대기업이나 각종 연구원에 채용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인터뷰이 대부분이 그렇듯, 본인도 척박한 사회의 찬바람를 맞으며 간신히 서있어도 후세대를 걱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존 투쟁 속에서도 희망이 어렴풋이 보이긴 한다. 난 시력이 안좋은건지 마음이 오염됐는지 밝게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책에서 많은 문제들은 사례로서 보여준다. 청년들에 관한 주거, 신용, 교육, 중앙 과집중된 인프라, 노동법, 사람사이의 대우, 학력 인플레, 간접고용 문제 등 어느하나 무시못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그나마 한명당 하나씩문제만 안고있다면 불행중 다행일 텐데, 어느 하나도 복수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청년들이 대학 졸업생들이 사회에 부는 찬바람을 피하고자 졸업을 유예하는것 처럼, 청년을 더 연장하고 싶어할 것이다. 좀 더 무모하게 도전해보고 좀 더 멀리 가보고 좀 더 많은 것을 사랑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이 모두를 옥죄는 장애물 없이 말이다.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이 기회를 박탈하고, 실패에 대한 두번째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으며, 인간관계는 좁아지는게 청년기 기억의 전부라면 너무 슬프다. 개인적 슬픔을 너머 국가적 손실도 자명하다.
누군가 자본에 돈을 주는 것은 투자고 노동자에게 돈을 주는건 비용 혹은 손실이라고 했던가. 청년은 손실로 남고싶지 않다. 후세대에대한 투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