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다른 사람과 차이가 없다면 내가 안 하더라도
나와 동일한 다른 사람이 내가 도덕적으로 회피하는 일을 대신 할것이다.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무한으로 복제된 자아들끼리 나누는 순간
개인이 느끼는 실질적 책임감은 '0' 이 되어버린다.
- 김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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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힌 3평남짓한 공간. 천장에 달려있는 희미한 조명이
방 안에 쓰려져있는 한 남자를 어렴풋이 비추고있다.
이윽고 남자가 눈을 뜬다.
굳어져 있는 몸이 꽤 오랜시간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힘겹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남자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쓴다.
그것도 잠시, 바로 앞 정면의 유리벽에 반쯤 반쯤 튀어나와있는 k-2소총 뒷부분과
유리벽 너머로 어둠속에 작게나마 빛나고 있는 소총의 야광 조준점을 보고는 더욱 혼란에 쌓인다.
불현듯 훈련병시절 실사격평가때 같은 조에서 유일하게 자신만 12발 미만을 맞추어
조원들의 전화찬스기회를 날려버린 기억이, 동기들의 원망 가득했던 눈빛과 함께 뇌리를 스친다.
추억아닌 추억을 곱씹으며 야광조준점을 응시하고있던 찰나, 갑자기 어둠으로 가득한 정면 너머 어느 한 곳에
스포트라이트가 수직으로 내려 꽂히더니 눈이 안대로 가려져 기둥에 묶여있는 한 사내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
진채로 서있는 모습을 비춘다.
본능적으로 남자의 입이 움직인다.
"저...저기요!!! 이봐요 학생!!!!!!!!!"
조금의 미동도 없는 사내를 바라보며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치지직..치지직"
또 한번의 본능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곤 이내 천장에 달려있는 낡은 스피커를 발견한다.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줄것같은 유일한 열쇠인 낡은 스피커에게 귀를 기울이지만
흘러나온 말은 남자를 더욱 혼란하게 만든다.
"...치직...보이는것과 같이. 당신 앞에 있는 K-2소총은 장전된 탄알 한발과 함께
기둥에 묶인 저 사람을 향하고 있다. 방아쇠를 당겨라. 따로 조준 할 필요는 없다.
고정되어있으니 그대로 당기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으로 대화를 할 것 마냥 스피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남자가 소리친다.
"무슨소리야 당신!! 제발 이 상황좀 설명해줘!! 어이!! 이봐, 내말 들려????!!!!!
...... 제발 그냥 여기서 나가게만 해줘!! 나가게만 해주면 어디가서 이일 떠벌리지 않을게!!
아니, 그냥 잊은것처럼 살게!!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을게!! 다 필요없으니까 제발 나가게만 해줘!!!!!"
일방적인 외침인줄 알았던 남자의 말에 스피커 너머의 상대가 대답을 한다.
"..치직...방아쇠를 당기든 당기지 않든, 한 시간 후 당신은 이곳에서 강제로 내보내지게 된다.
물론 안전은 절대 보장하며 그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남자는 눈을 뜬 뒤로 쭉 느껴왔던 이 상황에 대한 혼란함,공포감,긴장감이 적어도 자신한텐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안심시키는 상대와의 대화로 인해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는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을 풀수 있을거란 확신감에 점점 침착해지는 자신의 상태를 느끼며 재빨리
낡은 스피커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여기는 어디며, 저 남자는 누구지???? 왜 저 남자를 죽이려하는거야? 아니 그것보다도 왜 나지???????"
"..............................................."
대답이 없는 스피커를 바라보며 남자는 자신이 질문할 위치가 아니였다는 것에 아차 한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어 자신에게 해꼬지를 하려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서성이던 찰나
이 사태의 원흉(?)인 유리창 너머의 사내에게 시선이 고정된다.
'대체 누굴까? 아니 그것보다 과연 무슨짓을 했길래 자신의 죽음이 쌩판 관계도 없는 나의 손에서
좌지우지되는걸까? 아니 무슨 짓을 하긴 한 걸까?'
기둥에 묶인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요령으로 유리벽에 얼굴을 박으며 눈을 가늘게 뜬다.
'이거 원.. 얼굴에 반이나 가려져있고 밝지도 않은곳에 저렇게 떨어져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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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어어어????????!!!!!!!!!'
남자는 자신에 방금 본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둡고 상황파악 할 겨를이 없던 탓에 그저 사내라고 생각했던 기둥에 묶여져있는 사람은
남자가 아닌 단정한 짧은 머리의 여성이였다.
더욱 자세히 보니 이제 갓 서른 안팎의 모습에 단정한 옷차림새였다.
기둥에 묶여져 있는 사람이 사내라고 생각했을때부터도 무의식속에 자리 잡았던 연민이, 이제 갓 젊은티를 벗고
사회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 연민은 더욱 깊어져갔다.
'쾅쾅쾅'
"눈좀 떠봐요!!! 저기요!!!"
젊은 여성에 대한 연민이 기사도 정신으로 승화되기라도 한걸까. 저 여성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남자의 머리속 채워지고 있을 찰나
'우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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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웅'
바지 뒷주머니에서 짧지만 강한 진동이 시간차를 두고 두번 울렸다. 뒷주머니에 손을 갖다대니
있는지조차 몰랐던 처음보는 모형의 스마트폰이 손에 잡힌다.
남자는 기사도인지 뭔지 모를 자신의 흥분을 뒤로하고 스마트폰 액정의 첫번째 메세지를 확인한다.
' 행복은행 : 계좌 xxx-xxxx-xxxx-15 XXX님,
잔액조회 : 1,000,000,000 \ .'
"뭐...뭐야 이거????? 내 이름??? 하지만 이런 계좌를 만든적이....
근데 잠깐만 ...일..십...백..천..만.......억??!! 10억??!!"
눈을 비비며 숫자를 다시 세어본다. 틀림없는 0자리 아홉개.
뭔가 모를 감정들이 마구 뒤섞인다. 틀림없는 10억, 틀림없는 내이름, 하지만 처음보는 계좌...
이 모든 혼란에 대해 그저 멍해 사고회로가 정지된 남자에게 익숙한 소음이 그의 정신을 붙잡아 낸다.
"치지직...치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