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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최악의 비극들 '국민방위군' 사건
게시물ID : bestofbest_1256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미세린
추천 : 479
조회수 : 37717회
댓글수 : 44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3/09/05 17:14:28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9/05 13:00:27
사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전세를 역전 시켜 통일을 목도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에 의하여 연합군이 패퇴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초반 북한군이 남침하면서 각 점령지마다 인원을 대거 징용한 터라
대한민국은 예비병력 확충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1950년 11월 20일 국민방위군에 대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합니다.

1. 군인, 경찰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을 제2 국민병에 편입시킨다.
2. 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3. 육군참모총장은 국바부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국민방위군_징집자들.jpg

이렇게 해서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었고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우익단체 대한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문제의 시작은 최소한의 기간장교만 현역이었고 나머지 지휘관들이 이와 같이 우익단체의 민간인으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준장, 대령 등 직책만 거창하지 사령관 김윤근 부터가 이등병 경력도 없는 미필자 였고 나머지 간부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병력은 '50만 명'에 이릅니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가 국회에서 80만 내지 100만을 데리고 내려왔다. 라고 증언하였으니 사건의 피해자는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중국군의 대공세에 서울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즉시 후퇴명령이 떨어집니다.

1.4.jpg

경상도에 이루어진 방어선까지 후퇴를 명령 받았지만 이 50만여명에게 지원된 차량은 없었습니다.
추위를 이겨가며 경상도까지 도보로 주파해야 했습니다.

거기까지라면 그렇다 하겠는데 
이들에겐 겨울군복, 침구류 심지어 식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국민방위군의 지휘관들이 수십만 병력에게 지급될 보급품을 모두 횡령, 착복했기 때문입니다.

추운겨울 겨울군복도 지급받지 못해 추위에 떨면서
식량조차 배급받지 못해 굶주린체 서울에서 대구, 부산까지 50만여명이 걸어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동사자와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야당 국회의원 이철승이 국민방위군에 있던 친구에게 사실을 듣고나서야 세상에 공개됩니다.
국회에서 야당이 국민방위군 진상을 요구하며 이승만 정권과 여당인 자유당을 비판 하고 나서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국방장관 신성모는
'불순분자의 제 5열의 책동' 이라며 이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묵살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사건인 만큼 여론은 심각히 악화되었고
긴급히 진상조사단이 꾸려져 사실을 확인 하게 되는데

조사 결과 9만~12만 여명이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하였단 결과가 나옵니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현금 23억원 쌀 5만 2천섬을 착복한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보급품 조달 비 중 55억원을 빼돌린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당시돈으로 현금 78억원 과 쌀을 비롯한 수많은 보급품들이 이들의 주머니로 사라진 것이죠.

이는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국군 최악의 비극 중 하나이며
격전지인 백마고지에서도 사상자가 1만4천여명 이었던걸 생각한다면 
무능하고 부패한 아군이 적보다 무섭다는걸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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