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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있는 담쟁이 넝쿨
게시물ID : humordata_1256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식자
추천 : 11
조회수 : 115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4/05/18 21:25:39
하찮은 담쟁이넝쿨의 힘
[오마이뉴스 김규환 기자]
▲ 봄 담쟁이
ⓒ2004 김규환

능소화와 환삼덩굴, 사위질빵, 등나무, 나팔꽃은 담과 벽을 타고 오른다. 메꽃도 간혹 찾아 볼 수 있으나 논두렁 밭두렁으로 나가야 흔하다. 또 뭐가 있을까? 마 넝쿨? 마 넝쿨도 산자락에 붙은 집에는 있었다. 하눌타리도 기어올랐지. 하지만 이네들 중 양반 꽃 능소화와 나팔꽃, 등나무 등 일부러 심지 않았던 잡초들은 부지런한 주인을 만나면 뜯겨 죽기 일쑤였다.

그럼 우리네 시골 골목길을 걷노라면 마치 친구처럼 반기는 게 뭐가 있을까?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한번 심어놓고 십년 이삼십년을 함께 살며 따서 손으로 갖고 놀고 눈으로 즐겼던 자유로운 심성을 가진 넝쿨,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같이 볼 수 있었던 편안한 것,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주위를 따듯하고 보드랍게 감쌌던 존재요, 아이 팔뚝이 굵어지고 어머니 아버지 팔과 어깨처럼 굵어졌다가 나중엔 힘 한번 못쓰고 굵은 주름살 가득 패어 함께 늙어가는 것 말이다.

▲ 겨울 담쟁이
ⓒ2004 김규환

▲ 늦여름 담쟁이
ⓒ2004 김규환

담 또는 벽 아니면 담장 그리고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바로 이것이로다. 기어오르기야 칡넝쿨만은 못하지만 칡은 앙상하여 내 아버지 깡마른 다리 같아 싫다. 한 여름이나 무성하지 겨울만 되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마는 칡넝쿨은 집 주위에서 쉬 볼 수 없지만 제 갈 길을 제시하는 큰 나무마저 칭칭 감고 올라가 고사(枯死)시키는 터에 더 싫다.

담쟁이는 담에 붙어사는 친구다. 있는 듯 없는 듯 보잘것없는 동무다. 겨울엔 죽은 듯 숨죽이고 있다가 봄이면 “나 여기 살아 있소”하며 싹을 틔워내는 기특한 데가 있다. 담쟁이는 벗하며 즐길 줄 아는 여유로운 놈이다.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도 한데 엉겨서 공생을 하지 진까지 빨아먹지는 않는다. 줄기를 움푹 패게는 하지만 죽이기까지는 않는다.

▲ 가을 담쟁이
ⓒ2004 김규환

▲ 가을 담장의 담쟁이
ⓒ2004 김규환

이 담쟁이는 봄에는 야들야들한 맛으로, 여름엔 담과 집을 촘촘히 끼고 돌아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게 해준다. 가을엔 단풍나무에 지지 않을 노랗고 울긋불긋한 화려함도 있다. 겨울엔 머루 같은 까만 알갱이를 주렁주렁 달고서 봄을 또 기다렸다.

시골에서나 서울 신촌에 있는 어느 대학 본관이나 내 사는 집 근처 10여년 지난 집에도 물 한 모금 주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는 듯한 곳에 제 집인 듯 찰싹 달라붙어 엉금엉금 닭발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내 눈과 아이들의 정서를 맑게 해주는 이로움이 있다. 대궐 한 귀퉁이에도 영욕의 세월을 말하고 있다.

▲ 골목길 담쟁이
ⓒ2004 김규환

▲ 담쟁이 열매가 머루인 줄 알고 따먹으려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2004 김규환

칙칙한 도시 시멘트 담벼락을 덮고 고속도로 기나긴 길을 따라 눈의 피로감을 씻어 준다. 오랜 골목, 세월의 때가 뭍은 곳이면 어김없이 자리를 차지한다. 왕성한 생명력은 꼬불꼬불 제멋대로 커가는 듯 보이지만 우주의 질서처럼 반듯하다.

우린 이 담쟁이를 ‘눈깔 잎’이라 불렀다. 수수깡, 버들가지, 보릿대, 아카시아 잎자루가 어릴 적 놀잇감이었듯 눈깔 잎도 그랬다. 오뉴월 아직 보드라운 잎줄기를 따서 여동생 머리를 인두로 지져 핀 대용으로 꽂아주기도 했다.

담쟁이가 ‘눈깔 잎’이라 불렸던 까닭은 아이들이 잎을 따버리고 줄기를 아래 위 눈꺼풀 사이에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누구 눈이 더 큰가를 가늠해보며 경쟁심도 유발하고 안경이 흔치 않던 시골 아이들에게 동경심도 불러일으켰다.

서로 드러나는 빨간 눈을 쳐다보고 “야! 너 빨갱이 같다”며 놀래대기도 했던 ‘눈깔 잎’! 온통 세상이 빨개지는 색안경 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돌아와 보면 세상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 담쟁이 잎을 '눈깔잎'이라고도 했습니다.
ⓒ2004 김규환

▲ 담쟁이의 생명력
ⓒ2004 김규환

하찮은 넝쿨 하나가 터전 곳곳에 자리 잡아 노리개가 되었던 지난 시절 아름답던 추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사에 매몰되어 바삐 지내다 보면 내 과거 발자취가 사라진 듯하면서도 잠시 몸과 마음의 한가로움 얻으면 마치 전생의 그 인연까지 추적할 수 있다. 양파껍질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면 아련한 그 흔적과 자취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애당초 삶의 궤적(軌跡)을 말끔히 제거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 아닐까?

해강이 솔강이 눈에 한 번 꽂아 줘 추억을 대물림하고 싶다. 올해가 가기 전 시골집 담장에 담쟁이를 툭 끊어 몇 그루 파묻어 놓아야겠다. 그러면 지네나 쥐며느리처럼 수많은 발을 뻗쳐 주변 기운을 모아 삶을 풍요하게 하리라.

▲ 사위질빵꽃과 환삼덩쿨 잎이 뒤엉켜 있네요.
ⓒ2004 김규환


/김규환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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