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경로의존성에 기대어 인간의 가능성을 평가한 퇴옹님의 글은 쓰레깁니다.
결국 습관과 감성과 운에 인생을 맡기고 놓으라는건데...
이건 인간의 삶에 대한 패배선언과 다름없습니다.
물론 마음을 먹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글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일견 맞는 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결국 길 끝에는 너른 비옥한 벌판이 있고, 지나간 뒤편에는 악취나는 늪이 있는데...
거기 서서 사람들에게 뒤를 가르키며 이 길의 종착지는 저기야라고 사기를 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진창에서 그 냄새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철학적인 양... 진리인 양 외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저 혼자만 거기 있으면 될 것을... 그럴싸 해보이기 때문에 남들에게까지 해를 입힙니다.
인간의 이성은 결국 감성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이 있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제 견해로는 이는 합리성이나 언어와 사고같은 이성의 부산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능성입니다.
그 어떤 동물도 우아해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본능과 충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많은 인간들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분명 그 이상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봄으로써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성(혹은 자아)가 거짓임을 깨닫고,
진정한 삶의 현장에서 걸림이 없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그의 존재가 현존함으로 가득차게 될 때,
그의 눈빛, 그의 말투, 행동거지가 달라지게 되고,
그 후 인간의 삶의 지평은 말로 할 수 없을만큼 넓어집니다.
이것은 말로 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표현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말해봤자 진정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 옳아도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 히든싱어 신해철 편에서 넥스트 보컬인 이현섭씨가 신해철씨와 나눈 이야기 중에
'목소리의 밀도'에 관한 내용이 있더군요.
저는 목소리의 밀도라는 개념을.. 그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이 녹아있는 존재감이라고 느꼈습니다.
혼이 담긴 진짜 목소리, 몸짓은 모사(혹은 묘사)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오리지널이 아니면 가지려고 해봐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의 목적이 '나', '인간'에 대한 옳은 앎에 있다면...
철학이 바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짓자면 인간의 삶의 비극은
습관, 감정, 잘못된 생각 모두 '나'라고 하는 인공구조물에서 비롯된 것이며...
거기서 벗어날 때, 비로소 올바른 변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부처인 줄 알고, 그게 종착역인양 착각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사실 별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의 끝에 펼쳐진 벌판에 도착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거기서부터 제대로 된 삶의 지평이 열립니다. 진정한 변화,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나에 걸리지 않으면 내가 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보게 되고,
내 지난 행동에 걸리지 않고 알자마자 바꿀 수 있습니다.
나라는 것도 없고, 내 지난 행동 또한 없는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이 시공간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도 자기라는 껍질 안에 갇혀 사는 것과...
완전히 열린 아이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에서 아이와 같은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하고...
니체의 정신의 변화가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변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비유한 것이지...
아이보다 깨달은 이는 백만배 더 낫습니다.
아이는 인간이 되기 위해 열려있는 것이고,
깨달은 이는 인간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제 생각은 일단 이렇습니다.
중구난방입니다. 하지만 일년 전보다 오늘이 낫고, 다음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습관이면 어떻고, 감성이면 어떻습니까?
저는 끊임없이 저를 되돌아보고 고칠 수 있는 한 고치다보면..
내일은 더 많이, 내일 모레는 더더욱 많이 고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장자는 '대기면성(大器免成: 큰 그릇은 그 모습이 없다)'라고 할 것일테고...
논어에서는 '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 자른 듯 벼린 듯 쪼갠 듯 간 듯)'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기껏 자신의 정신을 절차탁마한 결과가....
남과 자신을 속이는 악취나는 지팡이여서야 되겠습니까?
기왕이면 벌써 태어난 몸과 마음, 그 지팡이를 버리고 들판에서 밭은 매는 쟁기를 잡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