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전쟁에는 돈이 들어갑니다.
그것이 국가가 보급을 하든 개인이 들고 들어오든 어쨋든 사야 되니까요.
적의 보급능력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전통적인 전쟁의 원칙 중 하나이고 이 보급능력의 핵심은 돈이죠.
당연히 이 돈을 무기삼아 적국을 공격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무기라면 당장 뭘 이용해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요?
답은 "인플레이션"입니다.
물가의 수준이 오르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져 급기야 화폐를 이용해 장작을 사서 난로를 때는것보다 그냥 화폐뭉치로 난로를 때는게 더 싸게 먹히게
만드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드는것 말입니다.
<꽤 유명한 사진 1920년대 독일의 모습이다.>
하지만 경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20세기에는 잘 사용하지 못하죠.
섣불리 위폐를 만들어 적에게 유포했다가 적국이 받은 타격이 돌고 돌아 우리에게 돌아올수도 있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2차대전의 나치독일은 이 부메랑 같은 작전을 과감하게 시도하였으니..
바로 그 유명한 "작전명 베른하르트"입니다.
어이없겠지만 사실 이런 위조작전은 나치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영국이 먼저 선빵을 때렸죠. 물론 화폐가 아닌 배급표였습니다만..
여기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친위대(SS) 내의 정보국인 SD의 소령이던 알프레드 나우요크가 파운드화 위조계획을 입안하게 됩니다.
"작전명 안드레아스"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음흉한 녀석 나우요크>
하지만 SS내부의 정치싸움에서 밀리면서 나우요크는 동부전선으로 강제 전출 당하고 그가 입안한 안드레아스 작전은 이름이 베른하르크 작전으로
바뀌게됩니다. 나우요크의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이 베른하르크 크루거 대위였기 때문이죠.
베른하르크는 기존에 이미 정보국내 위조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죠.
그는 이 작전을 위해 작업공간을 확보하고 인력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위조지폐 공장을 만들어 낸 것이죠.
여기에는 유대인 미술가, 금융전문가, 위조지폐범 등 140여명의 인력이 투입되어 가동을 시작합니다.
<베른하르트>
유대인 절멸을 외쳤던 나치의 입장을 볼때 약간 아이러니 합니다만 이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좋았습니다.
사복착용이 허용되고 수용소보다 좋은 음식이 제공되었으며 후식은 물론 개인용품의 사용과 개인침대와 사물함이 지급되었습니다.
심지어 주말보장이 이루어져 개인여가 시간을 가지는 것이 가능했죠.
물론 이들의 생활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몰랐지만요. 이들이 연구한 기술이 실현되어 대규모로 위폐를 찍어내는 상황이 오면
증거인멸을 위해서라도 이들은 깔끔하게 뒷처리 당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아무튼 본격적으로 파운드화의 위조에 나선 이들을 정신병에 걸리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갑니다.
당시의 파운드화는 지금의 달러처럼 세계적인 기축통화였던 탓에 엄청나게 까다로운 위조방지 대책이 적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치독일은 단순히 "위조"를 하는것으로는 안되고 아예 독일에서 파운드화를 "발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5파운드 위조지폐>
먼저 5파운드부터 위조에 나선 베른하르크는 종이마련에 들어갑니다. 재질을 똑같이 유지하기 위해 실제 파운드와에서 쓰이는 터키산 아마포를
똑같이 들여온뒤 제지전문가들을 총동원하여 완전히 복제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활자, 도안, 번호, 서명 등을 위조하는데 차례로 성공하죠. 실물 지폐를 보고 원판을 고대로 만든뒤에 찍어서 미세한 부분까지 비교해보고 틀리면
버리고 다시 만들고를 반복하여 끝끝내 슈퍼노트를 만들어 내는 것에 성공합니다.
여담으로 가장 위조가 어려웠던것은 영국 중앙이 정한 규칙이 적용된 엄청난 범위의 일련번호라든지
화려한 디자인의 활자도 아닌 왼쪽 상단의 여왕상이었다고 합니다. 저것 때문에 기술자들의 골치가 있는대로 썩었다고 하네요.
아 물론 이외에도 불빛을 비췄을때 색깔이 달리나오는 문제도 미치기 직전까지 풀리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1942년 슈퍼노트가 나옵니다.
베른하르트는 SD요원에게 명해 위조된 지폐를 영국에 보내도록 했고
놀랍게도 영국은행은 이 지폐가 진폐라는 감정결과를 내놓습니다.
<영국중앙은행>
여기에 자신감을 얻는 그는 인력을 충원하여 5파운드의 위조지폐 발행에 박차를 가하였고 뒤이어 차례로 10파운드 20파운드 등의
고액권 위조에도 성공하게 됩니다.
2차대전 중에 SS가 위조한 파운드화는 지금 가치로 무려 7~8조원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폐를 영국으로 운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결국 SS는 다른 방향이로 이 기술을 사용하기로 합니다.
정밀도에 따라 4개 등급으로 화폐를 나누고 돈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가장 정밀도가 좋은것은 해외의 나치 공작원들에게 자금으로 제공되었고
그 다음은 일반 경제용으로 그 다음으로 정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중립국을 대상으로 한 무역결제용으로
가장 안 좋은 것은 영국 상공에 그냥 뿌려버리는 용도로 사용했죠.
아 물론 영국 상공에 뿌리는것은 잘 안됬습니다. 이미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였으니까요.
<배틀! 오브! 브리튼! - 영어 귀찮...>
한편 영국은 이 같은 나치독일의 행태를 대충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위폐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하자 경악하고 말았죠. 이건 전문가들도 함부로 어떻게 분별하기 힘든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포에 빠진 영국은 급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파운드화를 막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래봤자 이미 위폐는 풀릴떄로 풀린 상태였지만요. 워낙에 많은 물량이 풀리다보니 국제사회에서 파운드화의 가치가 떨어진겁니다.
화폐의 가치를 사수해야했던 영국은 결국 어이없지만 자국의 고액권 발행을 중단합니다.
이게 파장이 얼마나 컸냐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액권의 유통중단 조치를 풀지 못합니다. 심지어 1957년에는 새로운 파운드화로 바꿔버리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에 이 위폐들이 고스란히 영국 국내로 들어갔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나치 독일이 원하던 인플레이션 상황을 유발할 수 있었을까요? 궁금하긴하네요.
아무튼 나치 독일은 패색이 짙어지자 이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SS는 이들 유대인 기술자들을 모두 처형을 위한 수용소로 이감을 실시하죠.
하지만 공교롭게도(이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네요-_-;;)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수용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곧 연합군이 진입하면서
모두 목숨을 건집니다.
<새 파운드화>
작전의 총 책임자인 베른하르트 역시 운이 좋게 끝납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을 한 명도 죽이지 않은 탓에 전범재판에서 큰 기소 없이
석방되었고 그 뒤에 제지회사에 취업하여 안락한 생활을 보내다 1989년에 평화롭게 사망합니다.
자 그러면 이 위조지폐와 인쇄 원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장이 망하자(?) 베른하르트는 모든 장비 일체와 그 때까지 생산되었던 위조지폐를 토플리츠 호수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종전후 호수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최대 수심이 100m가 넘는 이 전 나치 해군 무기 실험용 호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리고 1959년 탐사작업을 벌이던 잠수부들에 의해 일부 화폐가 발견되면서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하게 되죠.
아직도 종종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한편을 소개하고 끝내겠습니다.
실제 작전에 참가했던 인쇄공 아돌프 부르거의 회고록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요.
많은 분들이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2007년작 "The Counterfeiter"입니다. 국내에서는 "카운터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습니다. 저도 봤는데 나름 재밌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