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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명부의 이런 저런 두서없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6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2
조회수 : 806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3/11/18 1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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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다르기는 한데 주제와 틀린 사진은 아니지요,)


비단 어떤 조직이 남성이나 여성 중 단 하나의 성별만으로 운영되기는 무척 힘듭니다, 심지어 유목 민족이나 수렵 사회를 보더라도 여성의 자주권은 무시할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그렇기에 조선이라는 엄격한 신분과 직업의 장벽이 높게 솟아있던 국가에서도 그 이전의 고려나 다른 국가들 처럼 여성에 대한 처우는 늘 고려할수 밖에 없는 문제였고 이는 관직에 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것이 바로 내명부와 외명부입니다, 외명부는 왕실의 여성, 문무대신의 처 등을 대상으로 봉작을 하여 품계를 내려준 경우입니다, 크게 보자면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여기서는 넘어가고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공주니 옹주니, 군주郡主니 부부인府夫人 봉부부인奉保夫人이니 하는 것들은 단순한 칭호가 아니라 외명부의 관직 명입니다.
 
기껏해야 행사에서 상석을 결정하는것 외에는 실상 어떤 권세를 누렸거나 하는데 쓰이는게 아닌터라 칭호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네요.
 
내명부는 음 우리가 아는 그것입니다, 왕비와 후궁, 그리고 궁녀들을 묶어 부르는 말인데, 역시나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가령 그 이전에는 내관內官)또는 여관女官으로 지칭했지만 경국대전 이후에는 내명부라 부르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이 내명부의 관직을 살펴보면 우선 최고위 관직인 비 그러니까 중전이 있습니다, 왕의 정실부인으로 품계를 초월한 단계이지요, 잘 이해가 안되실지 모르겠는데 왕이 품계를 받지 않는 것과 같은 문제라 보시면됩니다.
 
그 아래로 정1품 빈과 종1품 귀인이 있는데 여기서부터 정 4품 소원 종 4품 숙원까지가 후궁입니다, 그 아래 정 5품 종 5품은 중간관리직인 상궁이고 그 아래부터 종9품까지는 나인들입니다.
 
이 들의 선발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해당 궁 즉 관할 부서에서 알아서 뽑는 방식과 특채로 선발되는 경우 그러니까 왕비나 세자빈등이 원래 부리던 여종을 데리고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보통 관할 부서에서 뽑는 방식은 10년 단위로 선발하되 원리 원칙대로라면 관노비 중에서 뽑아야 했습니다,
 
대전회통 형전에 따르자면 '궁녀는 오로지 각 관청의 하전(下典)에서만 선발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하전이란 노비를 뜻하지요. 또한 단서가 붙어있기를 양인을 궁녀로 추천하거나 들여왔을 때 이에 관계된 자는 장 60대에 1년간 노역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다만 내수사의 여종이나 궁방 소속 그러니까 무수리 등은 별도의 어명이 없이도 가능했지만 관청은 어명이 없이는 안됬습니다, 이유는 간단한게 신권과 왕권의 대립점이라 보시면됩니다, 의외로 상황이 좀 시쳇말로 쪼잔한? 측면이 있기는 한데 서로간에 지켜야 할 선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러나 본디 천얼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었고 아래 설명드리겠지만 경제적 혜택이 괜찮었던 관계로 양인이상에서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응시 연령은 최소 7세에서 직종에 따라 40세 이상도 가능했습니다만 이게 참 그렇습니다.
 
결코 선호받지 않는 직장이니 말입니다, 비단 견습 나인의 교육 기간이 15년이나 된다지만 그건 둘째치고 모시던 주인이 죽거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이상 평생을 궁궐에서 왕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데 이게 말이 좋아 영광이지 사람이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지요.
 
덕분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효종이 내수사에 명하여 양인들중 궁녀를 선발토록 하자 10세 이상의 여성들의 조혼율을 급격하게 상승했습니다, 관리들이 민가를 수색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반대에 직면한 것은 둘째치고 궁녀 선발을 두고 고려시대 공녀로 끌려가던 시기나 있음직한 일이 벌어진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선발된 이후 직종별 인기도?를 보면 왕의 승은을 입을 확률이 가장 높았고 궁녀들 중 가장 권세가 강했던 지밀이나 비교적 업무에 비하여 혜택이 많았던 침방과 수방 즉 재봉 관련 직종은 특히나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근무 여건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관노비도 한양은 2교대 지방은 7교대 근무였고 근무시간외에 터치를 받지 않은 것 처럼 이 들은 격일제 근무를 했습니다, 물론 왕과 왕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야 되는 지밀의 경우는 주야 2교대 근무였지요.
 
봉급또한 한일합방 이후를 기준으로 현대의 가치로 환산해 보자면 기본급이 월 120~ 200은 족히 될정도였고 보너스가 각종 명절이나 기타 사정에 따라 주기적으로 지급되었는데 의식주를 모두 궁에서 해결할수 있으니 여느 직업보다 경제적 수준이 괜찮았던데다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될경우 이권에 개입할 능력이 생기는 관계로 삶이 윤택해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습니다.
 
가령 최하위의 궁녀들이 한 달에 곡식으로 5~6말 1년에 근 10가마에 달하는 봉급을 받았는데, 이는 왠만한 중상층의 생활을 넘을만한 수준이었고 여기에 옷값과 반찬값등의 추가적인 금액이 지불되었고, 정기적으로 명절이나 기타 상여금이 지불되었으니 더 말할것도 없겠지요.
 
한가지 재밌는 것은 방자,파지,무수리,수모등 궁녀의 하인들도 월급이 제법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들은 노동강도에 따라 봉급이 달랐는데 궁녀와 비교해도 나름 손색은 없었습니다, 가령 견습 나인의 기본급은 쌀 4말, 콩 1말 5되, 북어 13마리이지만 하인들 중에 가장 봉급이 적었던 방자의 월급은 쌀 6말, 대구 4마리였습니다, 왠만한 시골 지주 부럽지 않았지요. (여기서 대구는 형편에 따라 북어로 대체되기도 했습니다.)

 
장옥정_사랑에_살다_16회_리뷰.png

그리고 끝으로 후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후궁은 승은후궁과 간택후궁으로 나누어 볼수 있습니다,
 
승은 후궁은 말 그대로 왕의 승은을 입어 후궁의 자리에 오른 것을 말하며 간택 후궁은 대왕대비나 대비께서 명문가의 여식을 골라 후궁으로 올리신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승진 속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벌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궁녀가 왕에게 승은을 입는다고 바로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승은을 입으면 품계에 상관없이 특별직인 정 5품 승은 상궁이 되며 여기서 회임을 하거나 왕의 총애가 두텁거나 왕실에 행사 등 특별할 사정이 벌어질때 비로소 종4품 숙원의 품계를 받고 후궁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상기 조건이 충족안된다면 영원히 승은 상궁으로 남을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후궁이 되었다 해서 승진이 고속도로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더이상 회임이 불가능하거나 왕의 사랑이 식으면 종4품 숙원으로 쭈욱 남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잦은 승진은 신료들의 반대를 뜷고 넘어가야 했는데 이는 경국대전을 기준으로 급감한 후궁첩지의 남발을 통해 알아볼수 있습니다, 빈이라는게 참 되기 힘든 것이지요.
 
반대로 간택후궁은 그 집안 만큼이나 저 미천한 천얼들과는 출발선이 달랐습니다, 이들은 보통 승은을 입기 이전에 종 3품 숙용에서 집안이 괜찮으면 종 2품 숙의로 시작합니다, 왕자, 공주 한 둘만 낳으면 빈이 되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지요.
 
이러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로 2남 1녀를 낳았으나 종 3품 숙용으로 인생을 마쳐야 했고 이후에 선조가 빈으로 품계를 끌어올려주게됩니다, 반대로 LTE 급의 승진 속도를 보여준 희빈 장씨는 그 미색도 출중했겠지만 아버지가 종 1품 숭록대부에 올랐을 정도로 집안이 잘 살았던 인물이었지요.
 
우스갯소리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집안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게 아닐까 싶은 사례가 바로 이 궁녀입니다, 같은 궁녀라 할지라도 집안에 따라 출발선이나 요직을 차지할 확률이 널뛰기 하듯 달라지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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