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비가 내렸다. 여자친구 퇴근길에 택시를 잡으려다, 튀는 빗물에 둘 다 바지와 신발이 젖었다. 카페에서 제페토 씨 시집을 함께 읽을 예정이었지만, 비 때문에 곱창에 소주를 마셨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일했었다. '었다' 라고 쓴 것은, 나는 지금 백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자친구를 보기 위해 자주 가고 있다. 어제 예전 직장동료를 만나 담배 한 대 피웠다. 한 달 전 일을 그만둔 커플의 소식을 들었다. 논산이었나, 각자 매장 운영을 하며 월세에서 돈을 모으고 있다 했다. 잘 됐다고 생각하며 우리에 대해 떠올렸다.
백화점 앞에는 작은 천막이 있다. 백남기 씨 사망에 대한 올바른 규명과 정부 사과에 관한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월호 추모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상 규명 운동을 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로부터 벌써 2년 반이 지났다. 백화점 옆으로 미술관을 지나면, 크고 썰렁한 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앉아있다. 아베 총리는 한국 정부에 110억 원을 지급한 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앉아 있는 소녀상 철거를 재촉하며 사과는 없다고 말했다.
어제 미드 '왕좌의 게임'을 봤다. 죽음은 내게 닥치지 않았을 땐 남 일 같다거나, 내일 전쟁을 시작해야 하니 오늘 푹 자 두라는 대사들이 생각난다. 전쟁 중이다. 미사일도 폭탄도 아닌 빗방울만 떨어지지만,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국가와 이념은 멀다. 연인과 친구가 넘치는 거리에 사람들은 생활과 사랑에 싸우고 있다. 버거워하고 있다.
2016년.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정보처럼 내 가치와 미래는 공식이 있어 보인다. 운명, 유전자, 환경은 같은 말처럼 느껴진다. 피곤하다. 술이 술을 마시듯, 무기력한 내가 무기력한 나를 마신다. 하지만 또 일어선다. 살아있고, 살아있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빗길에 넘어지지 않았지만, 그들도 나도 다시 일어선다. 젖은 자존감을 다시 볕에 쬐인다. 작은 웃음과 위로, 손과 눈으로. 몇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 공식은 없어지고 오늘은 따뜻해진다. 비가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