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복이후 혼란하던 시기 남북통일을 위한 김구 선생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승만의 의도대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려 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활동하던 공산당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무장하고 제주도내 경찰서를 일제히 습격한다.(제주 4.3 사건)
이 과정에서 경찰관과 극우단체 회원들이 일부 희생당했고, 이게 눈이 돌아간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들은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무 관련없는 민간인을 포함해 수많은 살상을 자행한다.
제주도민들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돌아온 것은 더 지독한 학살이었고,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 인구의 10%가
아군에게 학살당하는 대 참극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의 가슴속에는 깊은 상처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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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에 쫓겨 부산으로 내려왔고 경상도 일부지역과
제주도만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노병 영감의 파워 철벽수비와 국군과 학도병들의 피를 댓가로 북한군의 대공세는 실패하고
노병 영감은 천조국종특 쇼미더머니의 치트키를 마구 눌러대며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하지만 인천에 선봉으로 상륙해야할 해병대가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병력을 모집하기로 하고 공고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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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병대의 모집공고를 본 제주도민들은 너나할것없이 수천명이 자원입대를 신청한다.
정부로부터 제주도민 전체가 빨갱이로 의심받으며 학살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가족들을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 해병대 자원입대였던 것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10 대 후반의 어린 청소년들은 대거 자원입대를 했고
해병대 3기와 4기는 그렇게 모집된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해병대는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지원한 소녀들까지 받아들이는 결정을 한다.
몇살로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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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들은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 평양탈환작전, 의주지구 방어작전 등
6. 25가 끝나는 그날까지 조국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수많은 전장에서 선봉에서서 피를 뿌리며 싸웠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우리가 웃으며 보는 사진에 숨어있는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