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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관우의 형주 상실 배경과 그 한계.
게시물ID : history_270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른미르
추천 : 5
조회수 : 144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10/24 11:43:07

당시는 천거로 벼슬길에 나아갔던터라 명망을 중요시했고, 관계官界에 나아갔을땐 그를 추천해준 사람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어 밀어주고 당겨주고 하였던 시대임. 

그런 시대였던터라 사세삼공을 지낸 원씨가 동탁에 의해 멸족되자 원씨의 은혜를 입었던 수많은 문생고리들이 동탁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나게 된것임.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조조가 허소의 월단평을 간절히 원한 것이고 유비가 명문인 공융이 알아주자 감격하게 된 것이다. 

조조는 졸부에 환관 탁류, 유비는 지방 건달이었으니 명문이 알아주는 것으로 충분히 감격할만 하다. 


이제 관우 이야기로 가보자. 

관우는 민간전설에서 소금장수, 녹두장수 등으로 그려지고 있고 현재에도 재신이 된터라 그의 출신성분은 상인이 거의 맞을 것이다. 

그 외에 유비는 돗자리장수, 장비는 민간전승에 고기장수로 전해지니 유비군은 상인 연합 건달 혹은 상인의 뒤를 봐주는 건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관우는 어떠한 일때문에 하동군에서 탁군으로 망명하는데 당시엔 거주지를 자기 맘대로 옮기지못하였으니 아무래도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했을 것이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불법을 자행하는 토호를 죽이고 망명했다지만 ...

상인은 사농공상 중에 제일 마지막 신분이고 거기에 범죄까지 저질렀으니 관우는 태생적으로 하층민이라 상류층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고 거기에다 후한말 소위 청류파 명사란 것들이 저지르고 다닌 행태는 관우로서 환멸을 느낄 법도 했다. 관우는 그런 것 때문에 속다르고 겉다른 사대부를 경멸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관우의 양번 공략은 시의가 적절했다. 

그가 단독적으로 양번으로 진격한 이유는 

1.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격퇴한 것에 대한 분발 

2. 조인 등의 형주 공략에 대한 적극적 방어태세의 일환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수 있다. 

혹자들은 양번 공략부터가 잘못이라고 하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형주 내부 결속에 실패하고 거기에 더해 관우 본인은 그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지못한 것이다. 

그러나 관우의 양번전쟁을 관우만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이뤄졌다고 보기엔 사실 무리가 따른다. 전쟁은 나라가 건국된 후엔 긍정적인 여론도 있어야하고 전쟁을 단순히 사령관 혼자만의 판단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고대엔 군권에 대한 견제나 통제가 강했었다. 실제로 관우는 동독형주사 시절에 손권이 형주 3군을 침탈했음에도 군사적인 행보는 전혀 없었고 유비가 공안으로 출정할때 관우에게 익양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움직였음을 볼때 독단적인 군사지휘권이 당시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관우가 양번전쟁을 일으킨 것은 전장군에 임명되고 가절월을 받은 이후로 이때는 촉나라 정부로부터 군대지휘의 재량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분명 군인으로서 무용과 충의, 군재가 뛰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정치가나 외교관처럼 임시변통하여 기민하게 대응하는 능력은 없었다. 솔직하고 순수한 것은 군인으로선 커다란 장점이 되었으나 정치가로선 마냥 장점이 되지는 않는다. 정치가란 때로는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아야하기도 하니까. 


관우 개인적으로는 호오가 분명한 것이 큰 문제는 안될지라도 정치적, 정책적으로는 그래서는 아니되었다. 

기록을 보면 관우는 사대부를 멀리하고 밑에 사람에겐 잘해주었다고 하는데 당시 여론은 사대부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사대부들은 재력과 권력, 영향력이 상당했다. 

관우는 상용군의 유봉과도 사이가 썩 좋진 못했던 듯 하고 원로인 미방, 사인과의 관계도 그렇고 형주 토착 호족인 반준과도 불화했다. 열전엔 단지 개인의 일로 기록되어있지만 당시에 활약한 인사의 거의 대부분은 호족출신이었고 그들에게는 식객이나 빈객들도 상당했으니 한 인물의 의론은 그 해당 집단의 대표 여론으로 보는게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닐 것이다. 

(가설) 관우의 친서민적 정책은 사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융화가 되지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미방이 항복을 결정지었더라도 성내의 여론을 의식하지않을 수 없고 미방과 사인의 항복은 관우에 대한 형주 사족의 민심이반이 상당했던 것을 뜻할 것이다. 우번의 여몽에 대한 진언이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추측해보면 관우에 대한 형주의 민심이 완전히 이반하지않았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관우는 그처럼 대단한 사족들을 배제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해주었다하니 불행히도 나와 같은 민초들은 재력, 영향력, 권력과는 거리가 멀고 거기에 더해 실행력까지 떨어지니 관우는 사족의 여론을 크게 의식하지않은 정책을 펼친 것이 형주 상실의 주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한다. 

조조는 명성이 높던 화흠과 왕랑같은 이를 등용하여 여론의 지지를 꾀했고 유비 또한 허정을 경멸했음에도 비슷한 이유로 고위직에 임명했다. 또, 제갈량은 익주 내부 학자들에게서조차 위나라 정통론이 대두되었음에도 그들의 여론을 의식하여 끊임없이 등용하고자 하였고 그들을 벌할수 없었다. 

허나 꼰대같고 강직하던 관우는 그리하지않았다. 

그러한 정책들이 비록 현세에는 패망으로 끝났으나 관우의 사후로부터는 백성들의 심리를 자극하여 형주지방과 하동군에서 자발적으로 사당을 세우는 요인이 되지않았을까. 또 그로 인하여 후세엔 신이 된 것 같다.



<관련 링크 참고글> 


관우의 북진 시기 세력도. 

한중전, 관우의 번성 공방과 형주 상실. 

출처 http://smh2829.blog.me/2202728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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