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보고 난 후
게시물ID : movie_127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알수없다,
추천 : 3
조회수 : 42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7/03 21:53:00
 
 
 
 
 
 
 
   모든 존재가 외롭고, 외로우면서 소통되기를 바라나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한 채 시류에 합류될 뿐이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자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군중만 있을 뿐이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이가 있을 뿐이다,
 
 
  존재는 불행하지 않으나 진실에도 나의 진실과 타인의 진실이 있고, 그것이 엇갈리기 일쑤이다. 그런 연유-자의지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약한 자아로 거대한 자아, 즉 군중들에 휘말리고 그 속에 안주하면서-로 자신들을 불행하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불행을 타인에게 덧씌우고 있는 것이다. 타자는 계속 늘어나고, 늘어나는 타자만큼 불행은 겹겹이 싸여간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자는 약한 자, 약한 자가 작은 상처에도 민감하다, 작은 상처에도 아파하나 그것은 곧 그만큼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또한 작은 상처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타자에게 갈 작은 상처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만큼 타자들에게 최대한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SM 클럽이 나날이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SM club : small mind club]. 단순하고 대범한 것들은 결국 전두환이나 조져 부셔 같은 짓만 할 뿐이다.
  강한 자는 실로 약한 자, 아킬레우스처럼, 아니, 아킬레스로,
 
  그러나 실제로는 약자도 강자도 없다,
  우리가, 내가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 사유했던 것들 역시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구분은 허약한 인간들의 허약한 잣대일 뿐이다,
   모든 잣대를 지우며 나아가야 하리라,
  세상에게 얻은 잣대를 하나씩 부러트리며,
   모든 잣대를 한 번에 꺾을 수는 없다,
  그리하므로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아, 나는 어쩌자고 이리 생을 일찍 알아버렸는가!
 
  신은 외로웠다, 자신만으로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소통하고 싶어서 만든 인간들은 소통할 수 없었다,
 
  신은 막막한 어둠, 혹 빛 속으로 들어갔다,
  존재는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됐다,
  존재가 존재를 모른다면 존재한다 해도 존재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불쌍한 신의 어깨를 감싸줄 수만 있다면,
  당신을 그저 당신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나 그저 당신만 있다면 그 또한 존재는 존재가 아닐 터이니 존재하기 위해 존재가 존재를 부정하기도 해야 하리라,
  그러나, 그러나 존재 자체가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부정을 하고 긍정을 할 텐가,
  공[空]은 나도 너도, 어떤 존재도 있으며 아무 존재도 없는 것,
  그리하여 세상은 헛헛한 것이다,
 
   
  헛헛하니 돌아가보자,
  십우도다,
 
 
 
  죽음을 아는 것과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의 차이는 현격히 다르다.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키데이가 여행 도주 익사할 뻔 하다 살아났을 때, 그는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돈도 흩뿌리고 참고 살던 자신을[안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이 문제다. 내가 중학교 때 날아다니는 청소년 모드로 노선을 변경했을 때처럼] 억압하던 것들을 응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응징이라는 것이 응징에서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모순들에 정면으로 싸울 힘이 없기에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몇 명의 조무래기들과 함께 이끌어 간다.
 
  날아보고 싶다는 소망은 그만큼 자유롭고 싶다는 것의 반어적 표현이다. 밑도 끝도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자신의 현실.
  자살을 했던 소녀의 현실과 중학교 때의 내 현실이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그 또래에서 생각이 있는 친구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고민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하다가 그만 두고 평소처럼 살던가 키데이처럼 살 수도 있는 문제는 항상 내재해 있다.
 
==================== 
  89. 3. 10. 토. 맑음
  난 내 일기장이 운동 얘기로, 그것도 비관적이고, 슬프고, 괴로운 얘기로 가득차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나의 삶은, 삶의 지표를 잃어버리고 있다. 아니, 삶의 지표는 있으나 그 반대로 계속 흘러간다.
  나는 정말 죽을, 아니 말이 잘못 나왔다. 정신이상자가 될지도 모른다. 머리가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이것을 못 이겨 사람들은 자살을 하는 것일까?
  세상은 부조리 하다. 그 어느 누가 이러한 내 마음을 알며 알아 무엇하리.
====================
 
  맞다. 세상의 부조리는 존재와 존재들에게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마치 빠롤, 씨니피에와 랑그, 씨니피앙처럼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곳에 있더라도 차이는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기 전에 무엇이든 솔직하게 말을 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으며, 그 오해에서 오는 불행을 줄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말한다고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영화 중반 이후부터는 슬프다가 끝에 가서는 차라리 웃겼다.
  키데이를 죽게 한 것이 과연 릴리일까? 누가 릴리의 에테르를 더럽혔다는 것인가? 키데이를 죽인 것도 대중들이며, 그 에테르를 더럽히고 있는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에테르를 더럽힌다며 처벌한다. 이것은 마치 미국이 이라크를 이교도라며 신의 이름을 빌어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라며 이라크전을 성전으로 칭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키데이도 자신만의 소왕국을 결성했지만 나중에 소녀가 죽고 나자 그 때서야 무엇인가 잘못됐음을 알고 그 왕국의 가신들은 키데이를 응징하자고 모의를 한다. 그러나 막상 키데이를 응징하려고 하자 자신들 역시 잘못이 크기 때문에 결국 그만두게 된다. 여기서 아주 씁쓸하게 웃었다.
  키데이가 개별적 존재들보다 힘이 세거나 머리가 좋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모은다면 얼마든지 키데이 하나쯤을 어쩌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키데이의 지시에 따랐는가? 그것은 자신들보다 강한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즉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또한 키데이의 잘못이 심하다며 키데이를 응징하려 할 때와 같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들 또한 잘못 했으나 자신이 의지했던 곳, 즉 키데이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바로 인터넷에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대중, 군중들의 모습인 것이다. 누구 하나가 강력하게 나서서 주장을 하면 옳지 않은 것, 검증되지 않은 것까지 사실로 인정하고, 그렇게 믿으며 그 가설-가설이라 하기도 우습지만-을 지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면 무조건적으로 매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설이 잘못되었다고 할 때는 군중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쩐지 말하면서도 뭔가 찝찝하기는 했어." "나는 이 부분에서 뭔가 좀 걸리더라고."하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고 그 무리들이 다시 이쪽으로 이동해서 그 가설을 세운 당사자를 또다시 매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이자 군중들의 모습이니 어찌하여 그들이 무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대중과 군중들이 만드는 세상이 바로 릴리슈슈에 나오는 상황들이며 이 세상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을 뿐, 자신들의 행동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또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되돌아 볼 생각은 안 한다. 그저 자신들의 편리와 책임에서 도피만 할 수 있으면 될 뿐이다. 그들은 자유를 두려워 하기 때문인 것이다. 자유란 모든 것을 자신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이 힘들 때일수록 종교에 의지하는 것도, 또 탈레반 사건이 보여주듯이 그들이 그 개지랄을 떨 수 있는 것도 지들 뒤에 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갔지만 순교하고 싶지는 않았단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자신들의 하느님조차 버렸다 다시 하느님이라는 존재 뒤에 숨어버리곤 할 뿐이다. 자신들이 배후에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겠는가. 그들의 자유는 그 안에서만 국한될 뿐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만약 처음부터 자신 하나만이 세상에 있다면 그에게는 과연 존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존재는 존재를 통해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이며, 그 과정들 속에서 존재는 존재로 인정받으면서도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
 
  이 릴리슈슈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실존적인 문제, 즉 존재들에 관한 얘기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서든 어떤 문제에서든, 여기저기 난립한 포털사이트의 토크마당 같은 곳을 들어가서 보면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문제는 결국 하나이다.
  '존재의 무시' . 어떤 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라는 존재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돈이 필요한데 빌려주지 않는 것을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존재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이다.
 
  존재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가 최우선에 있어야 한다. 또한 이것은 최우선에 있는 것이며 언제나 놓지 말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저 유령들만 떠돌아 다닐 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큰 화면으로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이다.
  세상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일이란 잔인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에테르는 '빛을 파동으로 생각했을 때 이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로 생각되었던 가상적인 물질'이라고 하는 가상의 물질인데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실제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에테르'에 관해 연구하다 많은 것들을 발명하기는 했다.
  이와는 달리 내가 처음 에테르를 접하게 된 것은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이라는 책에서였다. 내가 영화를 보며 이해한 에테르는 대기, 공기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되고 어떤 색깔을 입게 되는가 역시 그와 같이 생각했음을 밝힌다.
 
  또한 모든 인간들은 어린이 시기를 지나면서 세상이 어떠한가를 알고 절망하나 그 절망에 순응한 채 그저 유령으로 살아간다. 어린이와 같은 꿈과 희망, 세상이 절망이 아닌 빛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삶이 그러려니 어쩌겠냐며 그냥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의 원하는 것들을 감추고, 아니라고 부정하며 껍데기를 자신 안에 씌우며 결국 죽을 때나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었어!'라고 외치며 심장을 움켜쥐며 죽어갈 뿐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살기를 희망한다.
  
 
  아, 진정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이자 이 모두를 있게 하는 것.
  '자기 자신'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