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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항모이야기] 최초의 전공자
게시물ID : military2_5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산트카치야
추천 : 14
조회수 : 2708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11/02 19:06:15
0. 항공모함 요즘 모함?

미국이 USS CV-1 랭글리Langley를 완성시키며 비로소 항공모함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20여년에 걸친 항공모함 개발의 난맥상을 일거에 타파하지는 못 했다. 항공모함이란 분야는 여전히 각국 해군에게 미지의 영역이었고, 이 분야의 선구자였던 영국조차도 남들보다 먼저 '조금 많이 과감한' 한 걸음을 더 내딛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이 거둔 기술적 성과는 분명 큰 것이었지만 이는 순식간에 - 항공모함에 관심을 가진 각국 해군에 의해 - 순식간에 도입되었고, 그로 인해 영국과 그 외 국가의 항공모함 건조와 운용에 대한 그렇게 크지 않았다. 특히 운용면에 있어서는 그러한 면모가 더욱 강했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항공모함은 함대의 보조전력으로서 그 중요도는 기존의 중심인 전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함대의 운용은 여전히 전함과 순양함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고, 항공모함은 이를 돕는 역할로서 제한된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약 20년 뒤에 나타날 항공모함의 집중배치 및 활용이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로 함대간의 승패가 결정되는 모습은, 적어도 랭글리가 취역할 때까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항공모함의 중요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승했다. 거기에는 항공병기의 발달이 맞물려 있었다. 초기 항공기는 상대 항공기를 공격하기 위한 중소구경 기관총이나, 지상을 공격하기 위한 폭탄을 탑재했다. 1914년 7월, 영국에서 최초의 항공어뢰가 발명되었다. 잠수함이나 구축함에서 발사하던 기존의 어뢰보다 가벼우므로 위력은 약했지만, 이전에 항공기에 기대할 수 없었던 대함공격력이 추가된 것이었다. 항공어뢰가 거둔 최초의 전과는 영국의 수상기에서 투하된 항공어뢰가 터키의 보급함을 격침한 것이었다. 이로써 해상에서 항공기가 직접 적의 군함이나 함선을 공격해 격침시킬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바다 위에서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항공모함의 가치가 상승한 것이었다.
1차 대전이 종료된 후에도 항공모함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까지 시도된 적 없었던 새로운 분야─ 오로지 항공모함으로 쓰일 것을 전제로 건조된 '완벽한 항공모함'을 모색하는 국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서 제일 앞서 있던 것은, 놀랍게도 당시까지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었던 일본이었다.





1. '정규공모'의 등장

앞선 편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일본은 항공모함, 보다 범위를 넓혀 '항공기를 탑재한 군함'이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있어서는 철저한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이 분야를 선도한 것은 전술했듯 영국이 제일이었고, 일본은 영일동맹의 밀월관계 아래에서 영국이 앞서 경험한 것을 후발주자로서 착실히 따라가고 있었다.
일본이 공모의 유용함을 깨달은 것은 수상기모함 운용경험을 통해서였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수상기모함 와카미야若宮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칭따오 요새 공략전에 와카미야의 수상기가 투입되어 지상에 폭격을 하면서 일본 해군은 수상기모함이 가져다주는 유용성에 감탄했다. 이후 일본은 대형 급유선을 개조한 수상기모함 노토로能登呂를 추가로 건조하며 일본 해군 내에 <수상기모함>을 정식 함종으로 편입시켰다. 동시에 영국이 했던 것처럼 기존의 순양함 등에 활주대를 설치해 한두 기의 수상기를 운용하는 실험 역시 진행되었다. 다이쇼 11년 11월에 전함 야마시로山城의 포탑 위에 활주대를 놓고 수상정찰기를 발진시키는 실험이 있었는데, 발진 자체는 성공했지만 이후 야마시로가 주포를 발사하자 활주대가 주포 발사시의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기존 군함에 정찰기를 탑재하는 안건은 추후 함체 중앙의 크레인을 사용해 수상기를 수면에 내려놓아 발진시키는 방향으로 완성되었다.
Yamashiro_initial_trial.jpg
항해중인 야마시로(개장 전)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영국 해군이 항공모함의 능력을 입증하자 이에 고무된 일본 해군 역시 공모를 건조하기로 결의했다.
최초로 요구된 성능은 배수량 1만 톤, 속력 30노트에 190미터 비행갑판을 장비하고 함재기를 19기에서 최대 24기까지 탑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요구안은 일본 해군의 86함대 계획안*1의 보조함 전력으로서 제출된 것이었다. 의회로부터 예산 승인이 떨어지자 곧바로 설계가 실시되었는데, 일본의 첫 공모는 처음부터 공모로서 설계되고 건조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설계 당시에는 전 세계 어디에도 그런 군함이 존재하지 않았다. 1차 대전에서 활약하는 영국의 공모조차도 전부가 다른 군함/함선에서 개조된 것이었다. 영국이 순수한 항공모함으로서 HMS 헤르메스를 건조하고 있긴 했었으나 아직 준공되지 않아서 어디에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일본의 함선 설계국은 미국의 USS 랭글리, 영국의 HMS 아르거스나 HMS 이글을 참고로 삼아 공모 설계에 도전했다. 설계가 완성되어 조선소에서 건조가 시작된 것은 다이쇼 8년, 서기 1919년의 일이었다. 건조를 담당한 조선소는 공모는커녕 수상기모함, 그 이전에 군함을 건조한 적도 없는 아사노淺野 조선소였다.*2 일본 해군으로선 다행스럽게도 선체는 큰 문제 없이 완성되었고, 기공으로부터 2년 뒤인 1921년에 진수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신형 공모는 제 7호 특무함으로 불렸고, 그에 따라 함명은 특무함의 명명방식에 따른 탓피竜飛*3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모의 명명방식이 새로이 제정됨에 따라 새로운 이름, 호쇼鳳翔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상서로운 동물인 봉황이 비상한다는 의미였다.

진수된 호쇼의 선체는 이후 요코스카 해군 공창으로 옮겨져 갑판 및 각종 장비를 장착하는 공사를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동맹국 일본에 윌리엄 프랜시스 포브스 셈필William Francis Forbes Sempil (1893~1965) 이 단장을 맡은 군사기술단을 파견했다. 군사기술단은 공모의 핵심인 갑판의 설계를 지도했고, 호쇼는 그로부터 1년 뒤에 준공될 수 있었다. 준공일은 1922년 12월 27일로서, 호쇼보다 먼저 기공된 영국의 HMS 헤르메스가 준공되기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이로써 호쇼는 '정규공모'로서는 최초로 준공된 군함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준공 직후의 호쇼는 당초 계획에서 요구하던 것에 못 미치는 성능을 갖고 있었다. 배수량은 약 3천 톤이 줄어든 7470톤이었으며 속력은 25노트에 불과했다. 갑판 역시 약 160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요구성능을 만족한 것은 함재기 탑재량으로, 호쇼는 작은 선체에도 불구하고 21기의 함재기를 탑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 해군의 성공이었다. 수상기모함을 2척 건조한 것이 '이 분야'에서의 유일한 경험이었던 일본 해군과 조선소가 만들어낸 것치고는 높은 완성도였던 것이다. 더구나 많은 경험을 가진 영국이 건조한 정규 항공모함인 HMS 헤르메스 역시 성능에 있어서는 호쇼와 엇비슷하기까지 했다. 세계 최고의 항공모함 선진국이 야심차게 건조한 것과 같은 성능을 가진 공모를 공모의 첫 걸음을 떼는 일본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2. ホウシャウ

설계 단계에서부터 외국 항공모함의 장점을 벤치마킹하려 했고, 건조 단계에서는 영국 함선 설계기사들의 영향을 받았던 탓에 초창기의 호쇼는 영국의 색채가 짙게 나타났다. 영국이 HMS 이글Eagle을 통하여 도입한 아일랜드형 함교를 채택했으며 전방을 향해 경사진 비행갑판과 폐쇄식 격납고를 사용한 것이었다. 물론 호쇼에서 영국적 색채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군함이 항해하면서 내뿜는 고온의 증기를 처리하기 위해 미국이 랭글리에 적용한 방식인 기도식 연돌燃突 3기를 우현의 함교 뒤쪽에 장비한 것이다. 함교는 비행갑판 전체의 3분지 1 지점에 있었고, 독특하게 원기둥 모양이었다. 함교 위로는 신호용 삼각 마스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Japanese_aircraft_carrier_Hosho_1922.jpg
초기 호쇼의 특징인 삼각 마스트, 원통형 함교와 기도식 연돌 3개, 전방으로 기운 비행갑판이 모두 보인다. 사진은 1922년 준공 직후 촬영되었다.


여타 항공모함과 비슷하게 호쇼 역시 비행갑판 아래에 격납고가 있었으나, 독특하게도 함교를 기준으로 전방과 후방의 격납고가 분리된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격납고와 갑판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도 두 기가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설계는 전투기와 공격기*4를 별도로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각 격납고에 탑재되는 함재기는 최초의 일본 국산기였던 10식 함상전투기와 10식 함상뇌격기였다.

10siki-kansen_1MF3A.jpg
10식 함상전투기
Mitsubishi_1MT.jpg
10식 함상뇌격기



10식 함상전투기는 미츠비시에서 설계하고 다이쇼 10년(1921년)부터 생산한 것으로, 7.7밀리미터 기관총 2정을 장착한 복엽기였으며 10식 함상뇌격기는 46센티미터 항공어뢰를 1기 장착한 1인승 삼엽기였다. 두 함재기는 생산되는 즉시로 호쇼에 탑재되어 곧바로 이착함 훈련에 이용되었다. 호쇼에서 치뤄진 첫 이착함 훈련은 1924년 2월이었는데, 이때에도 미츠비시에서 근무하던 영국인 파일럿 윌리엄 랜슬롯 조던William Lancelot Jordan (1896~192) 이 훈련에 참가했다. 조던이 먼저 이착함 시범을 보인 뒤 일본인 파일럿도 이를 따라서 이착함을 했는데, 일본인 파일럿이었던 키라 슌이치吉良俊一 (1913~1945) 대위는 첫 번째 실험에서는 성공했으나 두 번째 실험에서는 함재기가 갑판 옆으로 미끄러지다가 추락하면서 실패했다. 키라 대위는 구조된 후에도 호쇼에서 이착함 실험에 계속 참가했다.

이렇듯 반복되는 실험과 연습 속에서 호쇼가 가진 문제점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첫 번째는 함교의 존재였다.

Japanese_aircraft_carrier_Hōshō_Tokyo_Bay.jpg
도쿄만을 항해중인 호쇼. 2기의 엘리베이터가 열려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호쇼의 갑판은 함미에서 함수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다. 더구나 함교는 갑판이 본격적으로 좁아지는 지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갑판의 폭은 더더욱 좁아지게 되어 이착함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함수의 갑판이 미끄럼틀처럼 기울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함하는 함재기에 양력을 더하기 위한 요소로 고안되었으나, 정작 실제로 운용해본 결과 이함시의 안정성을 오히려 해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결과에 따라 호쇼는 그 해 바로 개장되었다. 함교를 제거했고 함교의 시설은 전부 갑판 아래로 옮겨졌다. 사라진 삼각 마스트 대신 기도식 볼 마스트가 설치되었고, 갑판도 완전한 수평이 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형 함교를 가진 호쇼는 갑판 위에 아무것도 없는 플러시 덱 공모가 되었다. 이후에는 함재기의 중량 증가로 제동이 어렵다는 평에 따라 새로운 제동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것은 미국이 랭글리에 채용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제동삭을 이용해 - 위에서 키라 슌이치 대위가 겪은 것처럼 - 갑판 바깥으로 떨어지거나 제동력이 부족해 멈추지 못 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다. 또한 기도식 연돌도 하향 고정식 연돌로 교체되었다. 기도식 연돌이 기도장치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함체 복원성에 약영향을 주었던 탓이었다.

ghtyghty.jpg
ghtyghty1.jpg
이로써 호쇼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3. 일본 공모의 어머니

당연한 것이지만, 호쇼는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기공되어 대전 후에야 준공, 취역했다. 또한 일본 해군의 첫 공모로서 실험함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에 실제 전선에서 활약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공모가 전장의 주역이 되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이 되니 호쇼는 그 당시 기준으로도 구식 소형 공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호쇼가 아무런 전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창 일본 군부가 폭주하던 1932년에 일본이 상하이를 침공*5했는데, 이때 공모 카가加賀와 함께 제1 항공전대를 편성, 상하이만에서 작전활동을 벌였다.
상하이만에 도착한 호쇼는 카가와 함께 상하이에 상륙하는 일본군 병력을 지원하고 중국군 진지를 폭격했으며, 2월부터 나타난 중국 공군기를 격추하는 등의 '성과'를 쌓았다. 소주蘇州 상공에서 미국의 전투기 P-12에 탑승한 미국인 파일럿을 격추하고 항주航州의 폭격 임무를 담당하는 등 호쇼는 첫 출전에서 보란듯이 '활약'할 수 있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상하이 및 광둥 방면에서 활동했는데, 이듬해인 쇼와 13년 (1938년) 부터는 구식 예비함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고,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는 연합함대 기함 야마토大和의 호위함으로서 같이 활동했다.*6

그러나 대형 정규공모가 전장의 주역이 된 가운데 고작 21기의 탑재량을 가진, 심지어 그 중 6기는 예비기로서 곧바로 쓸 수도 없는 빈약한 탑재량을 가진 호쇼는 일선에서 활약하기엔 지나치게 저성능이었다. 따라서 호쇼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 세토 내해로 이동, 그곳에서 신규 파일럿 훈련을 위한 연습공모로서 이용되었다. 연습공모로서 호쇼는 일본 해군의 현역 공모들과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파일럿이 큰 장애 없이 다른 공모에 가서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전선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시에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은 극소수 군함 중 하나였다. 생존함 중 대형이라는 점과 수송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으로 종전 이후엔 태평양 각지의 일본군 부상병을 본토로 수송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1947년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보듯, 호쇼는 대다수 일본군 공모와 다르게 큰 전공을 세우지도 못 했고, 크게 활약한 장면도 없었다. 그러나 호쇼를 설계 및 건조하면서 얻은 경험이 이후 공모들에 전수되었다는 점, 또한 호쇼에서 실시된 실험을 통해 일본 해군의 공모 운용전략이 수립되었다는 점과 연습공모로서 파일럿을 양성하여 각 공모에 공급해주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호쇼는 일본군 공모의 진정한 근간으로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세계 최강을 넘보았던 일본군 공모세력이 탄생할 수 있었던 기반, 호쇼의 역할은 말 그대로 '일본 공모의 어머니'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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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6함대 계획안 - 일본 해군의 군비증강 및 전함 건조계획인 88함대 계획안의 하부계획. 88함대 계획은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을 기간으로 하는 함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이를 위한 예산을 요구하면 의회가 거절할 게 당연하므로 84함대 계획, 86함대 계획을 통해 순차적으로 예산을 타낼 복안이 있었다.

*2 비슷한 사례로, 폐업 위기에 처한 카와사키川崎 조선소를 구제하기 위해 건조자금과 중순양함 마야摩耶를 발주한 적이 있었다. 카와사키 조선소는 현 카와사키 중공업.

*3 한자 (한국 한자로 쓰면 龍飛) 때문에 탓피란 이름 역시 상서로운 동물인 용에서 따온 것이라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 탓피 곶에서 따온 이름이다.

*4 뇌격기라고도 한다. 2차대전 당시 공모에 탑재된 함재기는 무장에 따라서는 세 가지로, 용도에 따라서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공격기는 용도로 분류한 이름이다.

*5 일본측 명칭 1차 상하이 사변. 일본이 만주를 침공해 만주국을 세우면서 시선을 돌리기 위하여 상하이를 공격한 사건.

*6 야마토와 호쇼의 인연은 이뿐만이 아니라 야마토가 건조될 때 호쇼가 옆에서 가림막 역할을 해준 적도 있었다. 두 군함의 크기 차이를 생각하면 도움이 됐을 것 같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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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두 달 하고도 5일 정도만에 씁니다.

...으헿. 다음은 아카키/카가가 될지도 모릅니다.
출처 각 위키피디아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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