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인페르노] 조브리스트의 경고와 토마스 멜서스의 [인구론]에 대해서
게시물ID : movie_628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인간의자리
추천 : 2
조회수 : 84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11/03 19:18:30
인페르노 깊게 보기 1편.jpg



https://www.youtube.com/watch?v=e9Inh5NFO3s&list=PLwVicZNrg-qbVgPx3nJAt8zZlanf1N7ti&index=3



론 하워드 감독의 [인페르노]가 개봉했다. 댄 브라운을 원작으로 한 세 번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전작인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보다 [인페르노]가 가장 좋았다. 댄 브라운 작품답게 영화는 시종 수수께끼를 풀고 퍼즐을 맞춰가듯 진행되었고, 로버트 랭던이라는 캐릭터의 특징을 최대한 부각시킬 만큼 다양한 상징과 기호가 널려 있었다. 

댄 브라운의 가장 큰 장점은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문제제기. 사실 [다빈치 코드]에서 소개된 유다복음서는 영지주의를 공부했거나 조금만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흔히 알고 있던 크게 중요하지 않은 3세기 경에 쓰여진 일개 문서이다. 이것을 [다빈치 코드]에서는 무슨 대단한 비밀인양 중요한 소재로 삼아 대중들에게 흥미로운 이슈로 만들어 냈다. 대단한 능력이다. 

그런데 [인페르노]역시 [다빈치 코드]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인페르노]는 미국의 억만장자인 조브리스트의 대중 강연으로 시작된다. 이 강연에서 조브리스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이로 인한 환경파괴로 인해 인류가 곧 공멸할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마치 극장에 온 시청자들이 그 강연장에 앉아 있는 느낌마저 든다. 연출도 좋았지만 조브리스트의 문제제기가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 

중세 때는 그나마 흑사병으로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었기 때문에 인구조절이 가능했는데 의학이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배가되면서 곧 공멸의 시간이 온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인류의 절반을 죽이거나, 혹은 100년 후에 모두 죽는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조브리스트의 물음이다. 

조브리스트는 자신의 질문에 첫 번째 답변을 선택했다. 그래서 2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매우 위협적인 바이러스를 만들었고, 이것을 퍼뜨려 인류의 절반이상을 죽일 계획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하버드 대학의 종교기호학 교수인 랭던은 그 바이러스를 찾아서 조브리스트의 계획을 막아야 한다. 영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극중에서 랭던은 조브리스트의 의견을 듣고 ‘꽤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는 시청자들도 ‘꽤 설득력이 있네’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그런데 랭던 정도의 인물이 조브리스트의 견해를 듣고 마치 처음듣는 이야기처럼 ‘꽤 설득력이 있네’라고 반응한 것은 영화설정상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굉장히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오히려 ‘토마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190년 전에 이미 한 이야기잖아’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맬서스의 [인구론]은 사회학이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책이다. 랭던 정도의 석학이 맬서스를 몰랐을리 없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아니더라도 가이아 이론에서도 조브리스트의 문제의식은 이미 제기되었다.  

가이아 이론은 1978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저서에서 처음 주장한 이론으로 지구는 환경과 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생명체인 지구는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있기에 조브리스트의 말처럼 인간의 폭발적인 인구성장, 환경파괴,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 등으로 지구가 위협을 받을 경우 스스로 정화를 할 것이다. 그리스신화에서 대지신의 신인 가이아가 남편과 아들에게 복수하는 장면과 겹치는 부분.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랐고 그 대가로 천상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최고의 신이 된 크로노스 역시 가이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어머니인 가이아 여신에게 저주의 예언을 듣게 된다. 아들에게 천상의 권한을 빼앗긴다는. 결국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은 크로노스로 대표되는 티탄 신들을 물리치고 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 이 가이아의 복수가 가이아 이론에 반영되어 있다. 조브리스트의 인구증가에 대한 경고는 가이아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랭던은 종교기호학과 신화의 대가인데 가이아 이론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런 맥락에서 댄 브라운은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들을 마치 새로운 것처럼 극적으로 만드는 재능이 돋보인다. 

조브리스트보다 이미 190년 전에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경고했던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은 어떤 책이리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의 이르는 병]. 같은 고전이라도 소설들은 그래도 읽은 사람들이 많지만 철학이나 사상서는 그저 제목만 들어봤을 확률이 높다. 아마 맬서스의 [인구론]도 마찬가지일 듯.

유시민 전장관이 [청춘의 독서]에서 잘 정리했듯 맬서스 [인구론]의 핵심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 식량 생산량이 도저히 인가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구증가에 대한 맬서스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그 대책이다.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란다. 유아사망률을 낮추고 있는 공중 보건 정책이나 국가의 구빈제도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며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 소리친다. 사회가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들로 나누어지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가난한 것, 아이들이 태어나자 마자 굶어죽는 것을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 한단다. 그것을 회피하려 할수록, 극복하려고 할수록 문제가 더 악화될 뿐. 노력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는 것. 맬서스가 볼 때 자선행위는 고상한 동기로 저지르는 사회적 악덕이다.  

멜서스가 [인구론]을 쓰기 전 영국은 윌리엄 고드윈, 로버트 오언, 토머스 페인같은 진보적인 사상가와 혁명가, 자선가들이 대중들을 빈곤에서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601년 엘리자베스 구빈법이 제정된 상태였다. 세계최초로 성문화된 복지법이다. 구빈법의 핵심은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공급하고 그들의 자녀를 국가가 맡아서 기른다는 것. 
맬서스가 이런 감상에 젖어 있는 사상가와 자선가들, 그리고 영국 구빈법을 비판하기 위해 [인구론]을 저술했다. 

사실 인구론에서 맬서스가 하는 말은 조금은 다른 형태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복지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 반대의 논거와 비슷하다. 빛을 면책해 주고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온단다. 서민금융과 관련해서도 ‘도덕적 해이’이고, 어이없는 전기세 누진세를 비판해도 ‘도덕적 해이’ 때문에 어쩔 수 없댄다. 가장 도덕적으로 해이한 금융권에 대해서는 그렇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왜 개인들만 도덕적 해이라고 옳아매는 걸까?   

노숙자들에게 돈을 주면 그 돈으로 술을 사먹기 때문에 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 대북지원,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북한의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인도적인 차원에서 대북지원을 하면, 그것을 가지고 미사일, 핵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돌려준다는 극단적이고, 논리적 비약.

영국 구빈법으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먹고살게 해주면, 이들이 결혼도 하게되고 자녀를 낳을텐데 그러면 또 빈자들이 생기지 않냐는 멜서스의 비약과 다를 바 없다. 맬서스의 논리는 그 사회에서도 최상의 부자와 기득권층에게만 봉사하는 철학임이 분명하다. 

맬서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토마스 페인은 1791-1792년에 [인간의 권리]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페인은 왕정을 비판하고 공화정을 옹호했다. 부자들에게 누진적 소득세를 걷어야 하고, 그 재원으로 대중교육과 실업 구제 등의 공공사회정책을 실시하자고 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만들어진 [인권선언](1795)에는 토마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내용이 반영되었다.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모든 시민은 동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사회권적 기본권이 수립되는 순간이다. 이전까지는 자유권적 기본권만 있었다. 개인의 자유에 초점이 맞춰진 기본권을 얻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사회구조가 그대로인데 개인의 자유로 무엇을, 얼마나 개선하고 바꿀 수 있겠는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을 처도 살기는 여전히  힘들다. 병이 들어 직장에 나갈 수가 없고, 그래서 수입이 없을 때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사람이 병든게 개인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이 감당하기에 그 대가는 너무 가혹하다. 국가가 왜 있는 건가? 사회가 왜 존재하는 건가? 공동체가 왜 있는 건가? 개인의 고통을 함께 부담해야 한다. 그 개인에는 ‘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권적 기본권’은 상대의 호위와 동정에 기반한 기본권이 아니라는 것.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하고, 요구할 수 있는 기본권이다. 사회적 기본권을 요구하는 것은 개인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마땅히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헌법도 이런 사회권적 기본권의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신체장애자 및 질별, 노령 기카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헌법 34조]

그러나 맬서스는 기본적으로 이런 사회권적 기본권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맬서의 [인구론]은 토마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 이후 8년 후에 초판이 나왔다. 너무나도 다른 두 권의 책이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