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생태 보고서
: 살인마, 돌아이 거기에 왜 하필 나?
<6>
인생사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이 주마등(走馬燈)이라 했던가? 삶의 시계를 멈추는 너무 이른 경험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미칠 듯 한 정적인 고요 속에 날카롭던 비명소리조차 늘어진 비디오 테잎 마냥 낮아지다 끝내 사라진다. 사정없이 튀어오르던 핏물과 살점도 꽃가루처럼 허공에 멈춰 서고, 최후의 순간이 만들어낸 기이한 시간의 변주가 나를 끝없는 아득함 속에 파묻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일까? 아니다. 시야 너머의 한 점, 그 곳의 무언가는 멈추지않고 고요히 날아들었다. 나를 향해 날아드는 차갑고 충분히 날카로운 은빛의 물체,
그리고 한 마디...
“死(쓰 : 죽어라)!”
알 수 없는 중국어건만 그 뜻만은 확연히 느껴졌다. 은빛의 날 위에 매인 알고 싶지 않은 의미의 잔인함이 너무도 분명해 찔끔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죽는건가? 허무하게?’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니 남는 것은 역시 후회 뿐이다. 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허나 돌이킨다 한들, 과거의 우유부단함을 잊고 새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끝내 같은 결말이 예정된 의미없는 삶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무섭고 두려웠다. 칼날이 뿜어 내는 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떻게든 살고 싶은데, 느려진 건 칼날도... 비루한 내 몸뚱이도 마찬가지라, 도무지 꼼짝 할 수 없었다. 자포자기한 심경으로 질끈 눈을 감으니 모든 것이 허망했다.
나오라는 눈물은 나지도 않고, 애꿎은 절망의 방뇨만이 얄팍한 괄약근을 원망하며 허벅지를 따라 흘렀다.
뜨겁게... 아주 뜨겁게...
이럴 땐 보통 지나간 연인들이 떠오른다더니, 나 또한 그랬다. 첫 사랑의 그녀, 두 번째, 세 번째의 그녀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아련했다.
‘안녕 아오이 소라 누나, 누가 뭐래도 누난 내 첫사랑이었어. 사쿠야 유아... 비록 은퇴했지만 넌 최고야. 네 복귀작 꼭 보고 싶었는데..., 고마워 스즈미야 아이리. 내 휴지끈의 8할이 너였단거 혹시 아니? 그래... 즐거웠다 모두... 이젠... 안녕!’
더 이상 그녀들의 신작을 볼 수 없다는 서글픔에 목이 매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멈춰진 나의 시계 속에 시간의 상대적 흐름을 실존적으로 증명하는 상대성 이론의 총아(寵兒)가 있었다. 그것은 초 단위의 시간을 0.5, 0.1, 0.05로 잘게 나누어 끊어 내더니 이내 물리학의 기본 개념마저 파괴한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 올랐다.
“이눔들!”
엄청난 짐승의 몸부림이 느껴졌다. 피보라를 일으키며 휘몰아치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흉폭함, 그렇다. 오랑캐의 만행에 분노하신 우리의 장군님이 드디어 그 용맹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것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나타나 날카로운 식도를 무력화하며, 그대로 거한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헉!”
“B야!”
감탄사와 함께 주마등의 시간이 사라지자. 현실과 망상의 경계 역시 어지러이 흩날렸다. 이것은 과연 꿈인가 현실인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거한은 이미 피를 토하며 맥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괴력의 장군님 앞에 왜놈이든 떼놈이든, 오랑캐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B가 피투성이의 거한 위에 가볍게 올라서자,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에 경악한 주방장의 허망한 목소리로 외쳤다.
“这是怎么回事?(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역시나 알 수 없는 중국어지만 표정과 말투 그리고 절박함에서 그가 느꼈을 공포와 무력감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비록 내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 삼킬뻔한 악(惡)의 근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가장 믿을만한 존재는 역시 B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엔 남은 세 명의 거한 중 두 명이 일제히 달려 들었다.
“死(죽어라)!”
안타까웠다. 이것이 무리의 수장과 조무래기의 차이인가? 단박에 B의 공포를 깨달아버린 주방장과 달리 수하의 조무래기들은 B의 무시무시함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서운 얼굴로 달려들지만 결국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한 무리의 부나방 떼에 불과했다. 이미 한 명의 수하를 잃어버린 주방장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B는 몸을 솟구쳐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停止(그만둬!)”
“크와아아앙!”
만류의 목소리와 살육의 포효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되돌아 온 메아리는 오직 처참한 만용의 댓가뿐이었다. 핏빛 회오리가 몰아치고 두 명의 장정은 끝내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참혹한 시체의 언덕 위, 불나방들의 낭자한 선혈에 물든 B의 모습은 사신(死神) 그 자체, 겁에 질린 주방장이 외쳤다.
“你是关云长的化身吗(당신은 관운장의 화신인가)?”
호가호위(狐假虎威) - 여우가 호랑이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떤다 - 라 했던가? B가 절대적 무용(武勇)으로 상대를 압살하자 이제껏 두려움에 떨던 나도 그 기세에 한껏 고무되기 시작했다.
B는 나의 친구, 그러니까 B의 힘은 곧 나의 힘, 뭐 그런 얄팍한 계산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알아 들을 수 없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주방장의 행태도 자꾸만 나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호기(浩氣)라면 호기고 만용(蠻勇)이라면 만용일텐데, 나는 그렇게 겁도 없이 곁에 선 주방장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치며 소리쳤다.
“야 짱깨! 너 한국말 할 줄 알잖아 여기가 니네 나라야? 한국어로 해! 한국어로! 확 짜장면처럼 비벼버리기 전에!”
실로 용맹무쌍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어깨가 으쓱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나름 보스라 할 만한 주방장에게 모욕을 줌은 물론 구타까지 한 것이다. 나의 생뚱맞은 기행(奇行)에 놀란 주방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너는 대체 뭐냐해?”
“나?”
갑작스런 질문이 나를 당황케했다. 나는 누구인가? 신분조회요청이라 하긴 애매하고 그렇다고 철학적인 질문이라 생각해 답하기엔 너무 현학적이었다. 이름 외엔 나를 설명할만한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해서 ‘나는 A다.’ 할까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너무 폼이 안난다. 말해봐야 모를 것도 같았고,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뭐랄까 나는... 쟤(X)하고 쟤(B), 걔들의 정신적... 지주?”
“心理控股(정신적지주)?”
“임마! 한국어로 하라고 한국어로!”
나는 정신적 지주란 말에 놀라서 다시 중국어 쓰는 주방장의 머리통을 재차 후려치며 말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정신적인 지주’, 실체는 없지만 듣고 있자면 무언가 있어보이는 간지폭풍, 후까시 작렬의 고급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방장도 내 말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미 X는 물론 B의 압도적 위력까지 목격한 주방장이 아닌가? 그는 한층 더 겁에 질린 얼굴로 내 앞에 무릎꿇고 빌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저 놈도 괴물같고 저 여자는 완전히 무신(武神)의 재림(再臨)이다해. 울리 살람 제발 죽이지만 말아달라해! 제발 살려달라해!”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지 아니한가?’란 말처럼 더 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X와 B의 표정도 조금은 사그라드는 듯 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그야말로 완벽한 압승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승리’ 이 얼마나 감미로운 단어인가? 그 간의 절망이 환희로 바뀌는 순간 이었다. 물론 이 쾌거는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우리 모두의 공이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중 나의 활약을 특별히 더 치하하고 싶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맹한 모습으로 적의 우두머리와 독대(獨對 - 홀로 마주하여 이야기하는 것)한 것은 물론, 강한 어조로 상대의 전투의지를 상실시킴과 동시에 끝내 백기투항케 만든 단초를 제공한 나의 활약은 충분히 칭송받아 마땅하지 않을 수 없지는 않지만 또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하긴 애매한, 여튼 바로 나니까 칭찬해 달란 말이다.
그렇게 나의 좁은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바로 그 순간, 역시나 방심은 모든 반전의 어머니라 말하듯, 발밑에서 무릎 꿇고 빌던 주방장이 갑자기 개처럼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이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근데 너... 정신적 지주가... 바지에 오줌 지렸냐해?”
그 순간 잠시 가출했던 현실감이 돌아왔다. 아픈 기억들도 떠올랐다. 처음 거한이 달려들 때 생긴 주마등의 시간, 정녕 마지막이란 절망 하에 이뤄진 미필적 고의의 괄약근 해제, 눈물 대신 흘러나온 미세한 체액과 오며 허벅지를 타고 흐른 뜨끈함.
그냥 사라져줬으면 좋았을 나의 흑역사가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떴다.
하지만 난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었다. 비록 나는 ‘쉬를 하긴 했지만 쉬를 한 건 아니라고.’
앞 뒤가 안맞는게 뭔가 이상하다고? 아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건 당신의 기분 탓일 것이다.
결국 당면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 고분분투하던 나의 머리는, 조금 구차하긴하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그럴싸해서 ‘오! 그렇수도 있겠는데?’ 싶은 회심의 반박으로 사태를 진화하려 나섰다.
“어허... 이건 아까 나온 보... 보리차를 마시다가 그만...”
완벽하다. ‘내 바지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은 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보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는 완벽한 한 수다.’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아주 조금, 지극히 적은 양의 체액만을 지렸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무도 모를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경기도 오산이었던가?
하지만 놈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듯 즉각 나의 말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우리집은 보리차 안 준다해! 자스민차만 준다해. 거짓말 하지 말라해! 지린내가 진동해서 내 코가 썩는다해!”
논리정연한 반박이었다. 이쯤되면 놈이 북경대 논리논술학과(?)를 나온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하지만 난 절대 물러 설 생각이 없었다.
“이 짜! 짱깨가 호... 혼 좀 나봐야 정신을 차릴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역시나 최선의 답은 비상식이었다. 놈은 겁을 먹기는커녕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아번엔 그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너 살려달라 했다해. 내가 분명히 들었다 해!”
계속된 폭로와 반박에 아찔해진 나, 이제 나에겐 권위에 의지한 설득 외엔 방법이 없었다.
“야! 나 저... 정신적 지주야. 쟤네 봤지? 내... 내가 지...지주래도?”
“정신적으로는 지주인지 몰라도, 육체적으론 아닌 거 같다해.”
“히이익!”
급히 몸을 틀어 도망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놈의 우락부락한 손길이 이미 내 머리칼을 쥐어 뜯었다. 위엄있는 목소리로 ‘아야야! 아프잖아! 머리를 왜 땡겨 너 여자애니?.’하고 외쳐봤지만 소용없었다. 놈에게 끌려 들어감은 물론 어느새 내 목엔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닿아 있었다.
“엄마야!”
놈이 말했다.
“오줌싸개! 니가 구멍이다해!”
충격적 대 반전, 일생일대의 위기, 나는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살려줘어어어!”
※ 등장하는 모든 사진, 인물, 이름, 지명, 배경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흐흐흐 소용없다해 가까이 오지마라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이 놈 모가지를 뎅겅 잘라버리겠다해!”
놈은 무자비하게도 칼로 목을 긁으며 소리쳤다. 절친한 친구이자 오랜 소꿉동무인 X와 B는 나의 위기에 당황한 듯 예의 그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나는 홀로 두려움과 맞서 싸우며 정상적인 체액배출 행위를 통해 강인한 의지를 불태웠다.
“또 지렸냐해? 왜 몸을 떠냐해?”
“지... 지리다니... 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다해. 지금 내 다리 뜨끈하다해!”
거듭되는 유언비어 날조와 허위사실 유포에 강력 대응코자 했지만,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소를 제기하기엔 마뜩치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UN의 인질 억류방지에 대한 국제협약을 열거하며 놈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야! 너 임마 인질 억류가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나 이러는거야? 나 지주야 지주! 정신적 지주! 너 자꾸 이... 이상한 소리 할래?”
“너 지주 아니다해! 쟤들 반응 이상하다해.”
“무슨 소리야! 내가 쟤들이랑 얼마나 친한데... 잘 봐... 엉?”
놈의 가당치 않은 헛소리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나의 친구들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최고로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X는 나를 향해 묻기 까지 했다.
“구해야 되는 거야?”
“당연하지 자식아!”
“그냥 이리 오면 안돼?”
“그게 되면 내가 여기서 이 아저씨 암내나 맡으면서 이러고 있겠냐?”
“그럼 구할게.”
7살 짜리 어린애도 아닌데 꼭 그걸 물어보고 해야 하는건지 버럭 화가 치밀었지만, 그 보다 더 똥줄이 탔던 건, X가 움찔하자마자 내 목을 조여온 주방장의 칼날이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자른다해!”
“자른다는데? 그래도 구해?”
“야 이 미.친 삐리리야! 멈춰! 멈춰야지 당연히! 으아아 피! 피!”
목젖 부근 어딘가가 시큰하더니 뜨끈한 것이 타고 흐른다.
‘위에도 아래도...’
“또 지렸냐해? 우리 사람 더러워 죽겠다해!”
“아니 썅! 드러우면 놔주던가!”
“그건 안된다해! 나도 살아야한다해!”
“아놔! 제발 나 좀 놔주면 안돼? 짱깨라고도 안하고 이렇게 부탁할게 응?”
“나야말로 부탁한다해!”
“뭘?”
“큰 거는 싸지 마라 해. 지금도 지린내가 엄청나다 해!”
“쌀 거야! 똥을 쌀 거야!”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인질로 잡혔다는 절박함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켰다. 내가 부질없이 항문에 힘을 쏟은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몰랐다. 뭐 일찍이 최고의 성군이셨던 세종대왕께서도 그리 당부하지 않으셨던가
‘집현전 학사들께선 부디 학문을 갈고 닦는데 매 순간 온 힘을 다하도록 하시오.’
항문의 길은 끝이 없다. 뭐? 받침 하나가 틀리지 않냐고? 뜻이 전혀 다르지 않냐고? 아니다. 천천히 다시 발음해보라. 소리내어 읽으면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다. 혹 아닌 것 같아도 그냥 그런 걸로 하자. 쪽팔리니까.
어차피 낑낑거리기 시작하자 낌새를 챈 놈이 곧장 칼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지금 하려는 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길 바란다해.”
“흥! 내가 알 게 뭐야! 어차피 죽을 판에 응차! 끙차!”
“경고해두지만, 나는 섬세한 편이다해. 그 냄새를 맡으면 흥분해서 인질이고 뭐고 당장 끝장 낼 지 모른다 해!”
“으히이익!”
회심의 역작이었던 항문의 길마저 가로막히자 갑자기 슬퍼졌다.
#끝없이 항문을 갈고 닦는 것 #그것이 항문의 길 #지은이 : 괄약근 #feat : 방귀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나는야 자아를 잃고 헤매이는 슬픈 발레리나 보이...”
절망에 빠지자 가동된 나의 행복회로가 현실을 도피해 망상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분홍색 발레리나 복을 입고 무대 위를 춤추는 나는야 한 마리의 슬픈 발레리노!
그때 눈치 없는 X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끼어들어 채근했다.
“A야. 구해? 말아?”
“야 이 새끼야 넌 생각이란 게 있냐 없냐! 그걸 왜 물어! 임마!”
슬펐다. 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인질이라니, 그것도 만두 먹으로 왔다가..., 처량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절박한 내 심경을 모르는 주방장은 지린내가 난다는 둥, 축축하다는 둥 구박을 일삼고, 믿었던 – 그냥 믿었던 걸로 하자 – 친구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시큰둥함으로 일관하니 차라리 죽고 말자 싶을만큼 괴로운 심경이었다.
“너 지금 울어? 왜? 왜 울어?”
“왜 울긴 이 새끼야. 내 신세가 처량해서 운다 임마! 아우! 넌 자식아! 지금 내 심정이 어떨지 정말 모르겠냐?”
“사실 난 잘 모르겠어.”
X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듯 말했다. 보건데 저건 절대 장난이 아니다. 진짜 모른다는 표정이다. 알고 싶어 죽겠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순도 100%의 정서적 결함이 느껴졌다.
“이런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 널 따라다닌 내가 등.신이지! 어휴!”
무심코 튀어나온 한 마디, 그 말에 순간 X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아뿔싸, 내가 너무 과했나?’ 또 입이 방정인가 싶은 그 순간, 섬뜩한 눈빛으로 변해버린 X가 물었다.
“알고... 있었어?”
“엥?”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시체를 모으는 살인자의 잔혹한 이면에 가려 보지 못했던 X의 실체가 두꺼운 가면을 벗고 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뭐야? 저 자식도 좀 모자랐나?’
긴 시간, 나까지 해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알아채지 못했을 뿐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묻을 곳이 없기로서니 버젓이 냉장고에 시체를 유기하는 단순무식, 거기에 그러고도 제 정제를 모를 줄 알았다는 저능함. 이건 단순히 공감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그냥 멍청한거였다.
‘좀 많이 덜 떨어진 모지리 사이코패스’
“야! 이 빙구야! 우리 집 냉장고에 그딴 거를 하나 가득 채워넣고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모르는 게 바보지 이 등.신.아!”
말이 너무 심했을까? X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안면근육도 꿈틀 거렸다. 두려움이란 이름의 파도가 밀려왔다. 하지만 나도 이판사판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차피 죽을거라면 그간 당한 설움까지 더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죽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길길이 날뛸거라 생각했던 놈이 갑자기 감동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모른척 해준거야? 날 위해서? 친구라서?”
‘뭐야! 이 생뚱맞은 시츄에이션은. 설마 지금 감동받은거야? 왜? 대체 뭐가? 무엇이, 어떻게, 왜 나한테!’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 생애를 다 바쳐도 끝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이 세상 B뿐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방금 하나가 새로 추가됐다.
‘모지리 취향독특 사이코패스 살인마 X, 너 왜 그래!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이다 보니 머릿속 감동회로에 이상이라도 생긴거니? 나사가 하나 빠졌어? 그래 X야?’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부질없었다. 어느새 놈은 슬픈 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으로 분해 격앙된 독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외로웠어. 난 늘 혼자였으니까. 또래는 많았지만 언제나 고독했지. 난 그들과 다르니까. 타인의 고통, 슬픔, 그리고 아픈 감정들이 도무지 내겐 느껴지지 않았어. 무언가 고장났다고 생각했지.”
‘암...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났지! 신이시여 왜 이리도 불공평한 겁니까? 어차피 저따위로 살 거면 저 얼굴 저한테 주셔도 좋았잖아요!’
“그때부터였어... 아파하고, 절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 시작한게. 하지만 소용없었어. 아무리 죽여도 그 감정은 내것이 되지 못했지. 남들과 다르다는 거, 그걸 사람들이 아는 게 싫었어. 그래서 항상 밀어내고 또 도망 다녔지.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그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가, 왜 하필 우리집이었던 거냐! 왜!’
“그리곤 계속 죽였어. 그러다 보면 답을 알게 될것 같았거든. 그래서 죽이고, 또 죽였지. 그것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해답을 찾았어. 그건 말이지... 바로 너희들이야!”
‘아... 감동의 파도가 밀려오긴 커녕 욕 나온다 이 미.친.놈아. 그러니까 왜 하필 내가 니 해답인건데? 그리고 누가 지금 저 새끼한테 핀 포인트 조명 쏴주는 거야! 짜증나게! 맞춰주니까 더 오글거리는 소리만 하잖아 지금!’
손 발이 오글거리고 독설을 퍼부어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데, 자의식에 심취한 놈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멍때리는 B를 향해 독백을 이어나갔다.
“처음이었어 B, 거을 속 나를 보는 것처럼 나와 닮은 사람, 내 안의 또 다른 나. 너를 만나 드디어 난 심장이 뛰기 시작했어”
“옴마나... 어떻게 그런 낯뜨거운 말을... 하아하아! X”
자의식의 발현도 이쯤되면 중증이라 할 만한데, 놈은 멈추기는커녕 이번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처음이야. A, 이렇게 까지 나를 이해해줬던 사람. 내 상처까지 보듬어주는 진실된 버팀목!”
“야! 이 새끼야! 그 버팀목 썩어문드러지다 못해 지금 모가지가 뎅겅 달아날 판이라고!”
“이제야 알겠어. 내가 살아가는 이유. 지금까지의 난 껍데기에 불과했어. 너희들을 알고 비로소 난 다시 태어났지. 이젠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야. 새 사람이 됐다구 하하하핫”
X의 지.랄.염.병이 B에게는 감동을, 내게는 손발의 오그라듬을, 그리고 주방장에겐 늘어지는 하품을 선사했다.
뭐 그렇게 또 상황은 어처구니없는 국면으로 흐르는가 싶었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때마침 문 밖에서 거친 함성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은 순식간에 우리 모두를 얼어 붙게 만들었다.
“경찰이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이 문 열어! 어서!”
‘쾅쾅쾅’ 닫힌 문이 토해내는 둔탁한 소리가 모두의 심장을 두들기고 있었다.
<7>
멘붕이란 말 외엔 다른 어떤 말로도 그 심경을 표현 할 길이 없었다.
‘쿵쿵쿵’
“문 열어 어서!”
누군가의 장난, 혹은 거짓이란 느낌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급히 돌아보니 살해당한 손님들의 시체 대부분이 휴대폰을 들고 있다. 이유야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어느새 창 밖에선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점점 옥죄어 오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주방장 놈 한테 죽을 것이냐. 아니면 정신나간 이 년놈들 따라다니다 제 명에 못 살것이냐. 그도 아니면 경찰에 투항해서 평생 철창신세를 질 것이냐. 이게 바로 진퇴양난이구나!’
의미없는 선택지가 나를 괴롭게 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천길 낭떠러지 뿐인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고민스러운 건 비단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닌듯, 주방장도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걸음을 걸으며 호들갑을 떨더니 이내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대고 있었다.
“나... 나는 불법체류라 잡히면 보... 본국으로 쫓겨난다해. 이거! 참! 가면 공안한테 죽을거라해! 우리사람, 음식가지고 장난치면 죽는다 해!”
사람을 죽여서 인육을 다지고, 그걸로 소를 만들어 만두를 만들어 팔았는데, 고작 걱정하는 게 ‘불량식품의 제조 및 판매 죄’라니, 불량식품을 4대악으로 지정하고 있는 우리나라보다 그 쪽의 처벌이 더 엄중한 것을 감안하더래도, 이 인간도 참 매사에 긍정적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여차해서 붙잡히는 날엔 조사를 받을테고, 혹 운 좋게 풀려나더라도 의심을 품은 경찰이 집에 방문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게다가 B에게 두드려맞은 세 명의 거한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 중에도 사망자가 생긴다면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갈 판이다.
‘아! 이 곳에서 벌어진 살육의 책임은 오롯이 그들 것이건만, 불안은 왜 내 몫이어야 하는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복안이 필요했다. 상황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면서 나의 안전도 확실히 답보 할 수 있는 그런 환상적인 계획... 나는 이제껏 꽤 오랫동안 녹슬어 있던 나의 사고 회로를 200%오버클록하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자유를 위해서...
Oh! My Freedom!
‘생각해! 생각해 내야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그런 환상적인 방안을!’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리도 치열하게 고심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집중했다. 물론 종종 ‘우리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서 그래요.’ 같은 엄마의 의욕 고취용 변명을 떠올리긴 했지만, 뭐 또 ‘우리 애는 착한 데, 친구를 잘 못 만나서...’ 같은 책임 전가형 변명도 떠오르긴 했지만, 여튼... 끝내 떠올리고야 말았다.
나의 안전을 답보하며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가장 환상적인 방법을...
“주방장... 이 봐 주방장!”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오직 놈 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왜그러냐해! 지금 밖에 경찰이 와 있다해! 우리 사람 큰일났다해”
“쉬쉿! 자... 작게 말해! 애들이 듣잖아! 내... 내가 좋은 방법이 있어서 그래!”
“조... 좋은 방법?”
좋은 방법이란 말 때문이었을까? 다급해진 놈은 급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보였다. 다행히 X와 B는 문 밖의 경찰은커녕 나조차도 잊은 채 서로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B, 사람을 칼로 찌른 다음 치료비를 부담하는 걸 다섯글자로 뭐라고 하는 지 알아?”
“응? 몰라몰라 뭐라고 할까?”
“후훗... 그런 걸 말이야 쑤신자 부담이라고 하는 거야.”
“어맛! 호호홋 호호홋 아이고 배꼽이야. 나 그렇게 웃긴 얘기 처음 들어봐!”
“참! B, 이따가 잊지말고 나 길 좀 가르쳐줘”
“어딜 갈 건데?”
“니 마음속”
“옴마나 옴마나!”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작태들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반대로 그 만큼 나의 확신도 강해졌다.
현실 감각이라곤 제로에 수렴하는 저 커플...
‘그래! 저 것들을 미끼로 쓰는 거다!’
절망에 차 있던 내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어렸다. 저 생각 없는 바보 커플을 꼬드겨 문 밖으로 내보내고 그 사이 나는 뒷 문으로 도망을 치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이 동네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고 날은 이미 꽤 어두워져 있었다. 적당히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도망친 후 최초의 계획대로 돈과 짐가방을 챙겨 떠난다.
그거면 만사 OK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나를 억류중인 주방장부터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첫 번째고, 도주중에 필요한 2차 미끼로서의 가치가 두 번째였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경찰이라면 중국집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누굴 제일 먼저 쫓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주방장은 충분히 가치있는 전략적 동반자였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나는 필요에 따라 적과 손을 잡겠노라 다짐하고야 말았다.
“저 둘을 문 밖으로 내보내고 그 사이 나보고 뒷 문으로 도망치라 그거냐해?”
“그래! 바로 그거야!”
“거짓말 말라해! 우리 사람 안 속는다해! 너는 정신적 지주다해! 니가 나를 도와 줄 이유가 없지 않냐해!”
“아 이거 답답한 인간이네... 언제는 정신적 지주라니까 개무시하더니 그럼 니가 저 문으로 나갈래?”
답답해진 내가 ‘쿵쿵’거리는 사망유희의 정문을 가리키며 말하자 주방장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싫다해! 저기 경찰 있다해! 나가면 잡힐거다해! 경찰 총 가지고 있다해!”
“그러니까 당연히 뒤로 나가야지 이 멍충아!”
“우리 사람 한국말 안다해! 나 멍충이 아니다해! 하지만 네 말... 일리가 있다해!”
“그럼 얘기가 된건가?”
주방장에게서 설득의 기미가 보이자 나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놈은 여전히 나를 풀어줄 생각은 않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재차 물었다.
“그런데 저 둘이 순순히 저 문으로 나가겠냐해?”
“이거 왜 이래! 나야 정신적 지주! 장담하는데 이거 풀어주면 내가 쟤네 반드시 저기로 나가게 만든다. 약속해!”
“우리사람 불안하다해!”
“뭘 고민해! 지금 그 수 밖에 더 있냐? 더 좋은 방법있으면 니가 얘기해봐!”
주방장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 제안을 듣고 고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의 칼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우리 사람 잡히면 안된다해! 니 제안... 수상하지만, 더 좋은 방법, 생각나지 않는다해!”
“잘 생각했어. 옛 말에 그러잖아.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다해!”
“좋아좋아! 벌써부터 손발이 딱딱 맞는데?”
“손발 아니다해! 나는 입으로 말했다해!”
“아... 그게 그러니까. 아니다! 됐고. 너는 그냥 닥치고 계세요. 내가 잘 구슬러서 쟤네 내보낼 테니까!”
“닭? 우리 가게는 닭요리 없다해. 닭 안 판다해. 닭은 청와대에 있다해”
또 다른 바보와 손을 맞잡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지금은 시간이 부족했다. 아직은 한 명이지만 경찰의 수가 늘어나 가게를 포위하면 계획이고 나발이고 다 허사였다. 최대한 빨리 미끼를 던진 후 안전한 루트로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마지막 이별의 선물을 주려 사랑하는(?) 친구들 앞에 섰다.
“이봐 B, 둘이 먹다가 둘 다 죽어도 모르는 금단의 과일이 뭔지 알아?”
“으흥으흥! 나는 몰라. 나는 너 밖에 몰라!”
“곶감 – 곧 감 – 이래! 하하하핫!”
“어멍! X 센스 대박! 어쩜 난 상상도 못했어! 너무 재밌다 얘 까르르르”
“널 만나고 난, 감옥에 가고 싶어졌어.”
“아니 왱!”
“너란 이름의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고 싶어.”
“어맛! 난 몰라! 난 몰라! 아잉! 까르르르!”
기분 탓일까? 희미하게 존재하던 죄책감의 안개가 사라지고, 분노의 태양이 이글거린다. 내 손발이 더 오그라들기 전에 이것들을 내몰아야 겠다는 생각만이 가득 차올랐다.
“에헴! 에헴!”
“이런 A 너 어떻게 풀려난거야? 귀찮은 일을 하나 덜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나도 뭔가 방해받는 느낌이긴 하지만 풀려나서 다행이다 얘! 까르르”
‘뭐? 귀찮은 일 하나? 방해받는 느낌? 두고보자 이것들아! 날 무시한 대가!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시간은 밤 11시, 인간이 가장 잔혹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친구 두명을 팔아 넘기더라도 조금의 죄책감조차 남지 않을 그런...
“그... 그게 말야. 쟤네들 자수한다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나가면 될 것 같아.”
“오? 그럴까? 그럼 음식값도 받지 않는거겠지? 어차피 그런 저질의 고기를 쓴 음식따위 돈을 낼 가치도 없지만 말야!”
“어머 공짜?”
죄없이 희생당했을 폐지 노인의 사체가 왜 저질 고기 취급을 받아야 하는 지 그리고 인육만두를 먹고도 그게 공짜라는 사실에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미 상황은 그런 허무맹랑한 설정에 연연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나친 지 오래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친구들을 인도했다.
“그럼! 당연히 공짜지! 그쵸?”
“아! 그렇다해! 우리사람 돈 안받는다해! 그냥 가라해!”
“들었지? 자! 어서 이제 나가면 돼!”
“그래 좋아. 하지만 이 말 만큼은 꼭 해야겠어! 앞으론 그런 저질 고기는 절대 쓰지마! 양질의 고기를 쓰라고! 정 구할 수 없으면... 차라리 나를 찾아오고! 알았나!”
“하하하 알았다해! 걱정말라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X는 고기의 등급을 중요시 여기는 진성 고기덕후였다.
다만 좋아하는 고기의 육종(肉種)이 우리와 조금 다른...
“그럼 갈까?”
“어디로?”
“너라는 여자의 마음 속으로!”
“옴마마! 까르르륵! 어쩜 이리 달아? 응?”
“네 혀에 닿아 녹을 수 있다면... 설탕조차 행.운.아!”
도저히, 도저히 더 듣고 있을수가 없었다. 어느새 주방장도 귀를 막았다. 이 두 사람과의 결별은 아마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가자 B”
“그래. 까르르륵!”
‘쿵쾅’대며 울리는 위급한 문소리도, 등 뒤에 쌓인 시체의 산도, 새로이 시작하는 연인에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맞잡은 두 손과 끝없이 펼쳐진 미래만이 그들을 한 없이 축복할 뿐이었다.
‘차가운 은팔찌와 함께 철컹! 철컹!’
현실감각 따윈 일찌감치 안드로메다로 보낸 두 사람이 문 앞에 서고, 나와 주방장의 시선은 문의 잠금장치에 꽂혔다. 내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자 주방장도 나를 따라 문워크 – 마이클잭슨의 뒤로걷는 춤 –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최후를 위한 마지막 춤사위가 시작된 것이다. ‘둥둥따다 둥둥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추는 마지막 춤판, '빌리진’의 흥겨운 BGM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내 얼굴에 화색이 돌자 덩달아 신이 난 주방장이 말했다.
“지주... 이봐 지주...”
“아 왜! 뒷문이나 열어놔! 후다닥 튀어나가게!”
“뒷 문 벌써 열었다 해!”
“좋아 굳! 굳! 굳! 둥둥따리 둥둥따리 빰빰! 빰빰!”
신이났다. 이것이 바로 배신의 쾌락일까? 나는 마치 마이클잭슨에 빙의라도 된 듯 머리와 배를 감싸며 흐드러진 춤사위까지 선보였다.
말도 안되게 통쾌한 기분이었다.
그 지나친 흥분이 나로하여금 거창한 추임새까지 넣게 했다.
"Put your hands up! hands up! hands up!"
주방장도 나처럼 흥부자였던지 어느새 내 추임새를 따라 하고 있었다.
“꼬! 꼼짝마! 손들어!”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지만 주방장이 번쩍 두 손을 든다.
나는 계속 노래했다.
자유를, 기쁨을, 배신의 쾌락을...
'Put your hands up!'
'hands up!'
'hands up!'
'다 함께 손 머리 위로!'
"꼬! 꼼짝 마라고!"
※ 등장하는 모든 사진, 인물, 이름, 지명, 배경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그때, 내 뒷통수에 차가운 무엇이 와 닿았다. 칼은 아닌데... 딱딱하고 금속의 느낌이 나는 무언가.
그제야 떠올랐다. 경찰의 출동은 늘 2인 1조, 정문에는 이미 하나.
그러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X마저 닫혔던 비밀의 문을 연다.
“맙소사! 세상에 이런!”
경악에 찬 탄식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섞여 안그래도 붉게 물든 사망유희를 더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X됐다. 젠장... 난 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건데?”
'둥둥따리 둥둥따리 빰빰! 빰빰!'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그냥 좀 돌아이 같은 글을 써보고 싶어서...써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