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렇게 남편 망신을 줘야 속이 시원하겠어?" 형식은 결국 참고 참았던 불만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아니 뭐가?" 저,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 정말 내가 못 살지. 형식은 가슴이라도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꼭 장모랑 친척들 다 있는데서 주식으로 얼마를 날렸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쫑알쫑알 떠들어야 속이 시원하느냐고?" "아니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 미선은 뒷좌석에 있던 땅콩봉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저 처먹는 꼬라지 하곤. 도대체가 눈치라곤 개털만큼도 없는 여자다. 제 남편 욕먹이는게 결국 제 욕 먹는 건 줄은 모르고. 정말 몰라서 저러나 싶었다. "그저 남편 체면 한 번 살려줄 생각은 못하고 에이." 형식이 혀를 찼다. 그러자 땅콩을 쩝쩝거리며 미선이 받았다. "체면은 뭐 아무나 차리나. 것도 뭐 능력이 있어야 받아먹는거지." "에휴, 내가 무식한 널 데리고 무슨 말을 하겠냐. 됐다, 됐어. 내가 말을 말지." 형식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미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무식? 당신 지금 나 무시했어." "아니, 내가 뭘?" 미선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며 형식이 어깨를 으쓱 했다. "그래. 늘 이런 식이지. 넌 무식하니까 암것도 몰라 하고 먼저 말이나 틱틱 끊어대고 툭 하면 무시하고. 그게 얼마나 재수 없는 줄 알아?" "허이구, 어쩌겠습니까. 사실이 사실인걸." "야, 김형식!" 그의 비아냥거림에 성이 난 미선은 소리를 빽 질렀다. "야, 김형식? 이게 어디서......이걸 그냥 확." 형식은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주먹을 치켜들었다. 미선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이참에 그냥 저질러 버리고 끝내버려? "여, 여보. 앞에, 앞에, 앞, 앞, 앞!" 갑자기 미선이 비명을 지르며 앞을 가리켰다. 심상찮은 느낌에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둔탁한 충격이 온 몸을 감싸더니 차가 덜컹 하고 멈추었다. 형식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산책을 나왔는지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온 미선이 말했다. "주......죽은 거야?" "그......글쎄." 형식은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하곤 여자의 코에 귀를 갖다 대 보기도 하고 손목을 잡아보기도 했다. "주, 죽었어." 형식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떡해?" "어, 어떻게 하긴. 빨리 차에나 타!" 그의 기세에 눌린 미선이 차에 오르자 그는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에겐 천만 다행으로 목격자는 커녕 카메라 하나 없었다. 하긴 새벽에 나돌아다니는 년이 미친 거라고. 미친 년 하나 때문에 감옥에 갈 수야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당신 미쳤어?" 미선이 그의 어깨를 때리며 말했다. "시끄러워! 이게 그냥 사고로만 끝날 일 같아? 사람이 죽었다고. 내가 감옥에 들어가면 당신이라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형식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여태껏 봐온 남편의 얼굴이 아니다. 그곳엔 남편의 얼굴을 한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섬뜩한 한기를 뿜으며 앉아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꾸 신경이 쓰여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그 여자가 벌떡 일어나 그들을 쫓아올 것만 같았다. "뒤돌아보지마. 재수없으니까." 형식이 말했다. "우선 집에 가서 내일 아침에 피부터 싹 씻어버리자구. 범퍼도 갈아버리고, 타이어도 교체해야지. 헤드라이트도 안깨졌으니까 경찰도 추적 못해. 지들이 뭐라고." 쉴 새 없이 그는 중얼거렸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네 시를 지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느때보다 푹 잠이 들었다. 미선 역시 한층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깊게 한 숨을 내쉰 뒤 형식이 누워있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남편이 알아서 잘 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말이다. 아침부터 요란스럽게 초인종이 울렸다. 미선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선 현관으로 나와 말했다. "신문 안 봐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어제 일이 선명하게 뇌리에 스쳤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형식이 그녀의 옆에 섰다. "신문이 아니라 경찰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마 탐문 때문에 왔을거야. 우릴 의심하고 있다면 지들이 지들 입으로 경찰이라고 하겠어? 단 몇 시간만에 그렇게 뚝딱 하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형식이 미선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는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히며 고개를 내밀었다. 문틈 사이로 짧게 머리를 깎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중늙은이 하나가 서 있었다. 사내는 형식을 보자마자 문 틈 사이로 발을 끼워넣곤 그의 팔을 붙들어맸다. "김형식 씨. 당신을 뺑소니 살해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서까지 동행해 주실까요?" 사내가 수갑을 채우며 미란다 원칙을 일러주었으나 형식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중늙은이는 그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역시 미선에게 수갑을 채웠다. 미선은 별 반항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았냐구요?" 모르긴 몰라도 뺑소니 검거율이 썩 높지 않은 걸로 그는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목격자도 없고 이렇다할 증거도 없지 않은가? 대체 이 자들이 어떻게 찾아온거지? 불과 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이, 동규야." 사내가 차고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앳된 얼굴을 한 청년 하나가 "예." 하고 대답하며 차고에서 걸어나왔다. 그제야 형식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규란 사내가 차고에서 들고 나온 것은 한 마리 커다란 개의 시체였다. 개의 목엔 푸른색 산책용 목줄이 어지럽게 꼬인 채 묶여 있었다. 그리고 개의 몸은 바닥에 바닥에 잔뜩 쓸린 듯 털이 다 빠진채 뭉개져 있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몸에선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형식은 그만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출처 웃대 - 왁스원샷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