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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해군장교가 한국전쟁 시기 이렇게 죽음을 당했다..
게시물ID : humorbest_12785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sert_Fox
추천 : 68
조회수 : 5859회
댓글수 : 1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7/14 20:16:51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7/10 17:27:5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52130&CMPT_CD=SEARCH

 

"김구 선생 지지했던 군인들,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해"

 




▲  마산형무소에서 이승만정권에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

 

- 한국전쟁기 형무소에 이미 갇혀있던 주요 반정부인사의 학살사례를 소개하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토대로 19개 형무소 희생자 수를 추정해 보면 적어도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 전쟁 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재판과정에 있던 분들이다. 학살된 분들 중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했던 분들도 많아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아마 근현대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집단학살사건에 있어서 반정부인사의 죽음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동안 알려져 있던 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례들이 있다. 형무소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구분지어 본다면 제주4·3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과 여순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이 가장 큰 규모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숙청 군인들도 한 그룹이 될 수 있다.

마산형무소에서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1913년생)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 전 숙청당한 군인들 수는 장교 242명을 포함하여 4400여 명이 된다. 김구 계열인 전 소령은 1949년 2월 여순사건과 관련 있다며 연행되는데,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의 암살 후 징역 6년형을 선고받는다. 전 소령은 같은 해 5월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강제 퇴역당해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그런데 마산형무소에는 같은 이유로 수용당한 군인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숙청당한 군인들은 1950년 7월 초 마산과 거제 사이 괭이바다라는 곳에서 동료 해군 헌병대들에 의해 학살당한다. 결국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군인들이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한 것이다.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으니 숙청당한 군의 규모가 무척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승화 장군 등의 수기를 보면 당시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숙청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한국전쟁 초기 왜 국군이 그렇게 일찍 붕괴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호극 소령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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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287044


해군 창설 주역도 학살 당했다전호극 소령 유족 "백범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1946년 해군 창설에 참여했고, 해군교육사령부의 전신인 해방병단과 해안경비대, 항해학교 등에서 교관과 소령으로 복무했던 한 군인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마산형무소 재소자 학살 때 함께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군인의 유족은 "아버지가 백범 김구 선생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이 누명을 씌워 구속시켰고, 그로부터 3개월 후 백범 선생이 암살당했다"고 주장해 주목된다. 즉 이승만 정권이 사전에 백범과 가까운 군부 내 고급장교들을 제거한 다음, 암살을 실행했다는 주장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마산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아버지 전호극(1913년생·해군 소령) 씨를 잃은 딸 전술손 씨는 "아버지가 1949년 2월 29일 진해의 관사에서 갑자기 끌려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김구 선생이 그해 6월 26일 암살당하기 전까지 3개월간 어머니께 생활비를 보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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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전 해군소령으로 민간인 학살 희생당했던 분의 친딸이 쓴 편지 전문입니다.

 

 

http://100in.tistory.com/3083

 

수십년 원망했던 아버지, 이제야 진실을 알았습니다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딸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그리운 아버지께.

죽음이 무언지도 모르던 다섯 살 아버지는 제 곁을 떠났습니다.

어린 나를 볼 때마다 우시던 삼촌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철이 없던 사춘기 소녀가 되어선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어머니는 문득문득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억울하다 하셨지만 그때마다 저는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하신 말은 저에게 모두 변명이었지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해군통신학교 교장으로 제자 몇 몇이 여순사건에 가담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죽었다고.저는 핑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가 자기 국민을 죽일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만한 죄를 지었을 거라고.

전술손 씨. 

 

잡혀가신 뒤 김구 선생으로부터 3개월 생활비를 받았다고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지하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도 민족의 미래를 생각해 해군에 투신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뜬금없이 위인들까지 끌어들인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심지어 우리가 아버지의 현명함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했어요. 위험을 미리 알고 가족이 있다는 것을 서류에 적지 않아서 살아 남은 것이라고. 어느 사령관은 일가족까지 다 죽었다고. 저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어요. 아버지니까 딸에게 좋은 말만 하시는 거겠지 하고.

 

갓 스무 살 때 병원에서 일할 때였어요. 하얀 완장을 찬 청년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는 무슨 죄인을 대하는 것처럼 저를 경멸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연좌제의 공포를 아버지는 모르시겠지요.

 

그렇게 오랬동안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할 바엔 왜 저를 낳으셨는지 원망도 많이 했고요. 왜 어머니를 홀로 두고 먼저 가셨는지 생각하며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이제 칠순이 다 되어서야 어머니가 했던 말이 모두 진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현명했으며,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헌신했던 나라로부터 돌려받은 것은 억울한 죽음뿐이었지요.

최소 717명 이상이 학살 수장당한 마산 원전 앞바다. 

그리운 아버지, 이제 수십 년 미워했던 아버지께 용서를 빌며 아버지의 불명예를 씼어 내는데 남은 생을 바치겠습니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밝혀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조작사건들의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우리 아버지들, 우리 어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의 불의와 부정의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명예를 회복시켜드릴게요.

 

항일 애국자로서의 명예, 민주주의자로서의 명예, 올곧은 군인으로서의 명예 말이에요. 웃으며 지켜봐 주시고,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될 그날 자랑스러운 딸로 반갑게 맞아주세요.

 

2016년 7월 9일 딸 전술손 올림

 

※전술손은 1950년 마산에서 억울하게 학살된 고 전호극 소령의 딸이다. 그는 지난 9일 마산 원전 앞바다 괭이바다 선상에서 치러진 제66주기 추모식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전술손 씨의 허락을 얻어 이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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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민족주의자로 반공주의 성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구선생을 지지했던 군인조차도 '빨갱이'로 몰아 죽였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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