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꿈꾸는 소년 (가제)
녀석은 어디에나 있다
낮 두 시쯤 기상했다. 평소대로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오고서도 기상시간에는 변함이 없다.
늦은 오후가 되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밥통은 텅 비어있었다. 쌀통도 텅 비어있었다. 라면마저 떨어졌다.
냉장고 문에 배달음식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원룸 전 입주자가 새삼 고맙다. 밀가루 음식은 지겹다. 밥 종류 중 가장 만만한 건 김밥이다. 싸고 맛있고 영양가도 있으니까.
김밥집에 전화를 했다. 주문한지 단 오 분만에 초인종이 울렸다.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김밥 세 줄과 오뎅탕 한 그릇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청년에게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잔돈을 거슬러 주더니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12:17am. 태진랑이 죽어간다. 연화공주는 죽어가는 태진랑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린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연화공주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글을 잇지 못했다. 태진랑을 벌써 죽이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쯤해서 임팩트 있는 장면이 필요해. 어쩌지.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너무 가볍다. 담배가 한 대도 없다. 제길. 빈 담뱃갑을 방구석에 집어던졌다. 마른 손을 비볐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태진랑은 여전히 죽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담배는 여전히 없었다. 이래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카디건을 걸치고 원룸을 나섰다.
원룸건물을 벗어나 언덕 방향으로 세 번째 건물에 편의점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산대의 청년이 눈인사를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혹시 아까 김밥 배달했던 그 녀석인가.
아니겠지.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다.
5:40am. 연화공주의 심복 비룡경이 의술에 능하다는 노인 하나를 데려 온다. 노인은 태진랑을 살려낸다. 그러나 노인은 월천향의 수하였다. 태진랑은 목숨을 건진 대신 환각제에 중독된다. 연화공주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 태진랑. 마침내 그는 공주의 목덜미에 독침을 꽂는다.
여기까지 게워내듯 써냈다. 정오까지 원고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원고지 20장 분량을 더 써내야 했다. 하품이 연방 나왔다.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제법 쌀쌀한 공기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모처럼 약수터에 가볼까 싶었다. 약수터는 가까운 공원 내에 있었다.
좁은 복도를 빠져나가다가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상대는 신문을 한 뭉치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무심코 눈인사를 나누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청년이었다. 청년은 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잽싸게 사라졌다.
낮에 김밥을 배달했던 청년이 밤에는 편의점 계산대에 서 있었는데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있다니. 프리터 족인가. 이 동네 알바라는 알바는 모조리 저 청년이 꿰차고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어려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은 한 걸까.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녀석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후로도 청년은 줄기차게 내 눈에 띄었다. 때로는 한밤중에 철가방을 들고 인근 만화방에서 나왔고, 때로는 대낮에 동네 잡화상에 상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때로는 늦은 밤 당구장에서 큐대를 정리하고 있었고, 때로는 이른 아침부터 손세차장에서 차에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시간대도 랜덤, 하는 일도 랜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혹시 세쌍둥이는 아닐까? 혹은 도플갱어? 혹은 정부비밀요원? 아니면 순간이동 능력자?
건물주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내 원룸 바로 위층 화장실 배수관에 문제가 있는데, 내 방 천장이 새지는 않았나 보러 왔다고 했다. 천장은 멀쩡했다.
방은 지낼 만 허든가.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엉뚱한 대답을 해버렸다. 동네에 특이한 청년이 하나 있던데요. 아주머니가 픽 웃었다. 정우 말인갑네. 해사하게 생겨갖고 잘 웃고 동네방네 여그저그 나타나는 청년 말이제? 그 청년이 그래도 착하긴 무지 착허구먼. 잘 지내 봐. 참 갸 별명은 요구르트여. 아주머니는 뜻 모를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