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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살펴보는 옷치긴 왕가에 대한 이야기 열 다섯번째?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8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9/5
조회수 : 75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2/02 10:35:31
Mongol_dominions1.jpg


우구데이 칸은 일찍이 차기 칸위 계승권자로 투레게네 카툰의 아들 쿠추를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1236년 남송 정벌중 쿠추가 전사함으로써 다음으로 선천적인 재능과 인품을 겸비한 쿠추의 아들 시레문을 자신의 오르두와 차기 칸위의 계승권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244년 봄 쿠케 - 나우르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는 우구데이 칸의 갑작스런 사망과 투레게네 카툰의 노력으로 구육을 칸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했고, 1246년 수메투르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마침내 구육은 몽골 제국 제 3대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즉위식에서는 소르칵타니 베키와 그의 아들들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동방에서 옷치긴과 그의 80여명의 아들들, 알치다이와 그의 숙부 그리고 당형제들, 차카타이의 자손들, 주치 가에서는 오르다와 시반, 베르케, 베르케 체르, 탕구트와 토카 테무르 등이 참가했으며 그외 주요한 귀족들과 장군들이 참가했습니다, 

이 쿠릴타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우구데이 칸의 사후에 대권에 도전하며 군사행동을 일으켰던 옷치긴과 늘상 구육과 분쟁을 일으켰던 바투의 참석 여부일것입니다, 옷치긴은 대규모의 세력을 이끌고 참가해 구육의 칸위 계승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으나 바투는 병을 핑계로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바투의 불참은 모든 황금씨족의 만장일치를 통해 칸을 선출해왔던 쿠릴타이라는 제도에 커다란 오명을 안겨준 사건이 아닐수가 없는데, 이러한 바투의 불참으로 명백해진 구육과 바투의 대립의 원인을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지바투.jpg



첫째로 바투와 구육의 대립은 손님이라는 뜻을 가진 주치라는 바투의 부친이 암시하듯이 주치의 출생을 빌미로 우구데이가 주치의 칸 계승권을 빼앗아 간 것에서 비릇되는데 이에 뿌리를 둔 보다 구체적인 사건이 몽골비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서방 원정중 양자간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러시아를 정복하고 난 후 열린 연회에서 촉발되었습니다, 당시 연회의 모습을 술회하며 우구데이 칸에게 구육의 잘못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긴 몽골비사 275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생의 하늘의 힘으로, 칸 숙부의 음덕으로, 메게드 성을 부수고, 올루스와 사람들을 약탈하고, 열 하나의 외방을 옳은 길에 들게 하였으며, 황금 고삐를 부여 잡고 '귀환의 잔치를 열자'고 해 큰 천막을 세우고 잔치를 할때 제가 모든 왕자들의 연장자로서 한 두잔의 의식의 술을 먼저 마셨다고 해 부리와 구육이 제게 기분 나빠하며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먼저 떠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부리는 떠나면서 '바투는 동등한 사이에 어찌 먼저 마시는 것인가? 수염난 노파들이 대등하게 되었으니 발로 차고 발로 밟아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구육은 이에 호응하며 '그 살동개 가진 노파를 너와 내가 가슴을 도려내버리자'고 했습니다, 부리와 구육은 이렇게 말하고는 의논도 없이 떠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칸 숙부의 분부를 알게 하소서'라고 아뢰어 보냈다.

바투에 따르면 모든 왕자들의 연장자로서 먼저 술을 마신 것이라 표현했지만 우구데이 칸을 대신해 원정에 참여한 구육은 동등한 사이에 바투가 먼저 술잔을 든 일은 우구데이 칸의 장자인 자신을 모욕한 일이라 여긴것 같습니다, 킵차크 원정군은 좌 우 양익으로 구성되었다 할수 있고, 그 통수권은 바투와 구육에게 각각 주어졌지만 바투가 킵차크 원정의 통수권을 주장하며 베푼 연회인 위의 몽골 비사의 기사는 바투와 구육 양자의 대립을 첨예화 시켰습니다.

사실 바투와 구육의 불화는 군사 작전시 바투를 비릇한 이들의 실책과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구육과 그 추종자들의 불만에서 시작된 것으로 몽골비사에서 '수염난 노파'들이라 해 남자라고 수염도 나고 활도 찼지만 전사로서 자격도 없는 노파와 같은 자라고 비난한 것에서도 이는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구데이칸은 원정 중에 발생한 사건이고 남은 원정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사건을 확대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아들을 질책하는 편을 택한것 같습니다, 따라서 구육을 소환해 그의 치졸함을 질책하고 러시아 원정의 공로가 바투와 수구데이 등에게 있음을 인식시키며 바투에게 구육의 죄를 묻도록 하였고 이는 바투와 구육간에 치명적인 상호 대립의 관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두번째로 톨루이의 아들 몽케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해 왔던 바투는 1246년에 앞서 두 차례의 쿠릴타이를 통해서 구육의 칸 즉위를 결사 반대해왔습니다, 따라서 투레게네 카툰은 칭기스 칸의 아들들의 자손들 중 최고 연장자인 바투가 불참한 가운데 1246년 쿠릴타이에서 구육을 칸으로 추대할수 밖에 없었고 이 자리에는 바투의 형제들은 참석했지만 바투는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는데 양 측의 불화는 더 욱더 극도로 첨예화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Golden-horde-map.gif

세번째로 구육칸의 즉위로 몽골 제국이 혼란 스러워졌고 서방 원정이 잠시 중단된 틈을 노려 킵차크 원정 중 점령한 볼가강 유역에 오르두를 건설하고 우랄산맥에서 크림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러시아 영토를 독차지 했는데, 이를 킵차크 올루스 또는 금장 金帳 (Golden Horde) 칸국이라 합니다, 바투는 킵차크 올루스 건설로 중앙아시아 북부와 동유럽 대부분을 자신의 손아귀에 쥘수 있었습니다, 그는 광대한 킵차크 평원을 동과 서로 나누어 동쪽 카자크 지역은 형 오르다에게 위임해 백장白 칸으로 삼고, 북쪽은 동생 시반에게 위임해 청장靑 칸으로 삼아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 거대한 땅이 바투를 중심으로 하는 주치가에 완전히 귀속되어 광대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자와 인력,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는 바투의 세력은 몽골 제국 중앙 정부를 능가할정도로 비대해졌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바투가 구육칸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것은 자명한 노릇이지요.

바투와 구육칸의 대립에서 촉발된 황금씨족 내부의 분쟁은 이미 몽골 제국을 동과 서로 갈라놓고 있었습니다, 비록 투레게네 카툰의 강권으로 열린 쿠릴타이에서 구육이 칸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바투의 불참은 그가 대칸의 권위를 멸시하고 있었으며 주치 올루스의 군사, 정치, 경제의 역량이 몽골제국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바투와 구육칸의 대립은 황금 씨족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그대로 드러낸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수 있는데, 특히나 툴루이의 카툰 소르칵타니 베키는 바투와의 인척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녀는 바투를 병문안 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장자 뭉케를 보내 차기 칸위 계승권에 대하여 논의하도록 하였으며 구육칸의 바투 친정을 바투에게 미리 알려주는 등 차기 칸권 쟁취를 위한 집요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지요.

집사의 기록에서도 이와 같은 바를 확인할수 있는데...나머지는 다음글에 잇도록 하겠습니다.




주석입니다,

1) 쿠케 -나우르 나 수메투르가 어디를 지명하는지 정확한 위치는 알수가 없습니다만 학계의 연구 결과를 놓고 볼때 쿠케 나우르는 몽골의 오보칸가이 주에 있었던 카라코룸 인근이며 수메투르는 항가이 산맥 북쪽 계곡에서 흐르는 옹긴 그러니까 오르콘 강의 상류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Selengerivermap.png



2) 옷치긴의 아들이 정말 80명이냐 하면 그 것은 아닐것입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祖, 子, 孫 로 세대 구분을 하는 몽골의 특성상 子에 해당되는 세대가 왔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3) 살동개란 동개라고도 하며 시복 즉 화살주머니와 궁대 그러니까 활 주머니가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래 사진과 그림과 같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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