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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한 여자의 인생
게시물ID : gomin_12843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ZGRlZ
추천 : 14
조회수 : 1440회
댓글수 : 100개
등록시간 : 2014/12/10 22:24:50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살이 쪘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중학교 들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근데 그게 콤플렉스로 와닿은 게 아니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마는 문제였다.
무심한 성격탓도 있지만 나는 다름은 그저 다름일 뿐, 이게 어떠한 이유가 되어 내게 비난의 화살이 꽂히리라곤 생각지 못하였다.

집안 사정은 그리 유복하지 못했다.
이사를 가게되면서 교복 비용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엄마와 아빠가 돈 문제로 다투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나는 전학 온 학교의 선생님이 안내해 준 교실에서 선배들이 남기고 간 교복들을 물려받았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춘추복에 입는 조끼가 내 몸집에 비해 사이즈가 작았다. 다른 사이즈가 없었다.
조끼를 입으면 단추 사이가 벌어지고 단추 주위로 접히는 주름이 생겼다.
숨 쉬기 힘들었지만, 못 버틸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입고 다녔다.

"세상에, 야, 저거봐. 예쁘고 날씬한 언니들이 조끼 줄여 입으면 멋있는데...
뚱뚱한 사람이 줄여 입으니까 진짜 아니다."

지금은 교복이 몸에 딱 맞게 나온다지만, 당시는 아빠 옷을 입은 것 마냥 붕하게 입는 학생도 꽤 있었다.
소위 잘 나간다는 아이들이 허리 통을 줄여 입거나 치마를 짧게 올려 입곤 했다.

그 애는 내가 무슨 사정으로 이렇게 입는 지 몰랐겠지만,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서글펐다.
줄인 거 아닌데, 하고 떨떠름하게 생각하다가 나는 처음으로 내가 뚱뚱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깨닫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그냥 세상에 눈감고 귀닫고 살았던 것 마냥, 뚱뚱한 나에게 온갖 비난들이 쏟아졌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와중에
"야! 조선 무다 조선 무!" 하고 왁자지껄하게 내 다릴 보며 웃고 지나가던 20대의 남자들.
나는 치마 한 벌 없었지만, 그 후로는 교복 치마도 잘 입지 않게 되었다.

"아, 아줌마! 옆으로 좀 비키라고요! 몸집도 커 가지고!"
"너 목이 없다 ㅋㅋㅋ 목 없는 아이."
"아가씨, 내가 아가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살 좀 빼. 보기 정말 안 좋아."

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누군가가 근처에서 웃으면 나를 비웃는 것 같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도 뚱뚱한 나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초리들은 내 고개와 목, 그리고 등을 점점 수그리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 하는 것은 무척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그 어느것도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고, 그네들이 지나가며 농담조로 던진 말은 비수가 되었다.
비참하고 암담했지만, 나는 왜인지 살을 뺄 수 없었다.
비난을 받으면 발끈해서 조목 조목 따지는 타입이라기 보다는, 속에 난 생채기를 홀로 다독이려 하는 편이었다.



청춘의 꽃,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대학 시절, 나는 뭐랄까, 여자가 아닌 생물이었다.
소수 인원의 학과라 동기들도 모두 잘 대해주고 소외 받는 일은 없었지만, 외부와 관련 있는 일이 있을 때 언제나 나는 뒷전이였다.
그 흔하게 하는 미팅 한 번 해보질 못했다. 그다지 한이 되지 않지만 씁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런 나도 연애는 해보았다.
신입생 시절,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만난 사람과 분위기에 휩쓸려 사겼으나, 1년을 못 채우고 헤어졌다.
나는 애늙은이에 가까운 타입이라 주변에 잔소리를 잘 하는데, 그 사람은 너무 철없고 애 같았다. 나는 그게 몹시 싫었다.
그 다음 해에는 갑작스레 열병을 앓듯이 짝사랑도 해보았다.

2학년이 되면서 화장을 배웠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겠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무지 원피스라든지, 반바지나 치마는 입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는 뙤악볕이 뜨거운 한 여름에도 긴 청바지를 고수했다.

"그 다리로 짧은 거 입지 마라. 그 몸에 가당키나 하냐."



휴학을 하고 해외를 나가게 되었다. 엄마가 말씀하시길, 거기는 뚱뚱한 사람도 그냥 짧은 치마도 입고 그런다더라, 하고서
허벅지 절반까지 오는 반바지와 치마를 사주셨다. 생애 처음으로 굽이 있는 구두를 샀다.
처음 반바지에 티를 입고 거리를 나서는데, 너무도 떨렸다. 마치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I like your outfit, you look nice!"

머리 숙인 내 등뒤로 누군가가 던진 말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아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웠다.
그저 지나가면서 던진 한마디였고, 원래가 그런 말들을 주고 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날 너무 들뜨고 가슴이 쿵쾅거려서 진정할 수 없었다. 방문을 잠그고 이상한 춤을 췄을 정도로 기뻤다.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지 않아.

내 체형을 커버해 줄 수 있는 옷들을 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입으면 엄마한테 잔소리 들었을 법한 짧고 달라 붙는 치마도 사 보았고,
영화에서나 보던 파티 드레스도 여러벌을 샀다. 여자 구두는 이렇게 종류가 많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서 옷에 관한, 혹은 외모에 관해 칭찬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내가 나를 가꾸고 사랑하니까 내게 당당해지고 그런 자신감이 사람을 생기있게 만들었다.
살은 오히려 쪘는데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연애도 해보고, 번호도 따이고. 한국서 겪어보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을 다 날릴만큼 무수한 일을 겪었다.
외국에서 나는 나 자체로 살아 있었다. 이게 나구나. 나 생각보다 사교적이고 밝은 사람이구나.



나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에게 교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고, 아이들과 어울려 함께 노는 것은 더욱 좋다.
그런데 친구들은 내가 아이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활동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거리를 두고 구석에서 사진을 찍어주거나,
그저 나를 필요로 하면 도움의 손길을 주는 정도로만 행동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가 나를 종종 무너뜨리곤 했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걸 두려워했다. 
겁쟁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 예쁘고 오물조물한 입에서 "뚱땡이" 하고 못난 말을 내뱉는 모습은 정말 아팠다.

나는 사실 핑크빛이나 파스텔 톤의 옷을 좋아하고, 적당한 레이스가 있는 옷도 좋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캐릭터들도 좋고, 잘 때는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잔다. 

나는 성숙하진 않지만,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으려고 노력한다. 가끔씩은 애교도 부려보고 싶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모습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난 애들 싫어해, 징징대고, 시끄러워.
핑크색 말고 검정색이나 좀 어두운 색상은 없어요? 아 이런 리본 같은거 달면 여성스러워 보이고 싫어.
내가 좀 털털하잖아. 나는 좀 남자같은 성격이라.

그동안 속여왔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에 대해 얘기해도 비웃음 사지 않았다.
으, 너랑 안어울려. 하는 말이 돌아올까봐 전전긍긍하던 내게 친구가 선물해 준 소녀 감성의 팔찌는 지금도 내 손목에 채워져 있다.
나는 나를 돌아볼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나는 무슨 성격의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간 부정해왔던 것들을 받아들였다.



다시 한국을 돌아왔다. 즐겨 입던 화려한 옷은 입을 수 없었지만, 예전처럼 펑퍼짐한 옷에 사시사철 통넓은 긴바지는 아니었다.
낡고 더러운 운동화가 아니라 또각또각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구두를 신었다.
구부정하게 휜 등과 어깨보다는 또렷하게 마주보는 시선을 갖추었다.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여유있는 사람이 되었다.
타인의 시선이나 열등감이 나를 좀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비난하기도 하고, 뚱뚱하다고 욕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나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떤 체형이든, 어떤 외모를 가졌든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본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밤은, 이제는 없다.
나에게 솔직해졌다.
나는 지금으로도 좋다.




무척 두서없이 글을 썼는데,
며칠 전에 남자친구가 자기 조교가 저에 대해 언급하며
아, 그 뚱뚱한 애? 왜 사귀는거야, 못생겼어!
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사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그다지 화나거나 슬프지 않았는데, 남자친구는 그게 무척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에요.
여담이지만 연인은 사치품이 아닙니다. 본인을 돋보이기 위해서나, 
이 정도는 되야 수준에 걸맞는 사람이다, 누가 누가 아깝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남자친구도 나를 사랑해줍니다. 나는 그거면 충분한데.

그 말이 신경이 아주 안쓰인 것은 아닌지라, 그리고 나도 건강을 위해서 먹는 것 좀 줄이고
규칙적으로 살며 열심히 운동해보려합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려고 글을 쓴거였는데,
당장 내일 시험 때문에 마음이 급해 이 말했다 저 말했다 우왕좌왕한 글이 됐네요.
어쨌든,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밤입니다.
모두들 즐거운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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