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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살펴보는 옷치긴 왕가에 대한 이야기 16번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8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7/7
조회수 : 64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2/05 18: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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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의 관계 기록을 보면 1246년 몽골 제국의 황금 씨족간의 분열을 극심하게 드러냈던 구육 칸의 즉위식에 옷치긴이 아들들을 이끌고 몸소 참가했음을 알수가 있는데, 물론 아들이 80명이라는 것은 잘못된 기술입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겨우? 8명뿐이었기때문입니다. 이게 중요한게 아니고 음 옷치긴은 구육 칸의 즉위식에서 동방 왕가의 수장으로 구육 칸의 즉위식에 동참해 톨루이의 도전으로 불안해 하던 구육을 몽골 제국의 대칸의 자리에 올리는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바투의 결석으로 황금씨족의 불안과 균열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황에서 한때 군사행동으로 대 칸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옷치긴이 구육 칸의 즉위식에 참석한 것은 옷치긴이 공식적으로 구육 칸을 몽골 제국의 대 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일종의 상징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황금 씨족 최고 연장자인 옷치긴의 쿠릴타이의 참가와 구육 칸에 대한 지지는 바투의 불참으로 인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던 투레게네 카툰에게 힘을 실어 줬음은 분명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일전에 대 칸의 자리에 무력으로 도전했던 옷치긴의 전력은 예전에 우구데이를 대 칸의 자리에 올렸던 동방 왕가의 수장으로서 옷치긴이 가졌던 그러한 상징성을 상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구육 칸의 즉위식에서는 주치 가의 오르다와 차카타이 가의 예수 몽케가 일전에 옷치긴이 우구데이를 이끌고 그러했듯 구육을 인도하여 대 칸의 자리에 앉게 만듬으로서 옷치긴의 역할을 대신 했던 것에서 이러한 그의 명분적 상징적 약화는 여실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1246년 3차 쿠릴타이 이후 진행된 옷치긴의 군사행동에 대한 심문은 대체적으로 바투와의 대립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 옷치긴 가문을 직접적으로 징계한다기 보다는 그 들과의 불화를 다스리는 수준에서 진행되었으리라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이후 진행된 옷치긴에 대한 심문과 그의 죽음을 다룬 가장 신빙성 있는 사료를 고르라면 집사와 세계정복자사를 들수가 있겠는데, 집사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파티마 카툰의 야르구를 열어서 심문했고, 두 번째로 옷치긴의 심문에 착수하여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 사건은 매우 민감한 것이어서 아무에게나 그 사건을 맡길수 없었다, 그래서 뭉케 칸과 오르다가 심문관이 됐는데, 다른 사람은 간섭할수 없도록 하였다, 야르구를 모두 마친뒤 한 무리의 아미르 들이 그를 야사에 처했다.


옷치긴은 1246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옷치긴이 심문의 결과 처형돼었든, 70대 후반의 고령으로 자연사를 했든, 옷치긴에 대한 심문과 그의 죽음은 옷치긴 가문이 우구데이 가문과의 인연을 끊고 그 적대적 세력인 톨루이 가문과 손을 잡아 뭉케 칸의 즉위에 힘을 쏟게 돼는 결정적인 분깃점이 된 것은 부인할수 없는 일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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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옷치긴은 몽골 제국의 대권을 노리고 벌인 군사행동 이후, 몽골 제국 중앙 정부와의 미묘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1246년을 전후하여 사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유산 상속을 둘러싼 분쟁 여기서는 황태제 皇太弟의 계승권을 두고 벌어지는 내부 분쟁입니다.  원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옷치긴의 사망 이후 그의 영지와 올루스를 상속해야 하는 장자 지부겐이 옷치긴 보다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옷치긴의 적손 타가차르가 계승해야 했지만 아직 어렸기에 서형 투데가 제멋대로 적손을 폐하고 자립하려 했다, 이에 사르기스와 코로코순이 투레게네 카툰에게 알려 타카차르가 황태제 위를 받고 왕위를 계승했다.


위의 기사에서 옷치긴의 내부 분쟁을 조정하여 타카차르의 계승권을 정당화 해준 투레게네 카툰은 구육 칸의 생모인 그 투레게네 카툰입니다, 이 옷치긴 가문의 왕위 계승 분쟁은 구육 칸이 1246년 가을 수메투르의 쿠릴타이에서 즉위한 이후 그 해 겨울 투레게네 카툰이 사망하였으므로 이 1246년 가을 부터 겨울 사이에 벌어진 사건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몽골 제국 중앙 정부로 부터 파견되었던 탓에 파이프 라인을 유지하고 있던 옷치긴 왕가의 왕부 그러니까 비치게치인 사르기스와 코르코순이 투레게네 카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투데의 도전을 꺽어버려 타카차르가 무사히 옷치긴 왕가의 황태제 자리를 계승해 올루스를 통치할수 있게 된 것인데, 타가차르를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댓가로 코르코순은 黑山을 분배 받았으며, 특히나 위구르인 사르기스는 몽골 정부와 옷치긴 가문간의 지리한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타카차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려운 순간마다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옷치긴 가의 2대 계승자인 타가차르에 대하여 집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식들이 많았지만 계승자는 타카차르 노얀이었고 그가 올루스의 많은 군대를 관할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5천명의 군대는 더 많은 수의 군대가 됐다, ------ 그는 쿠빌라이 칸의 휘하에서 쿠릴타이에 참가해 중요한 국사를 논의해 매우 존경받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칸이 대립할때, 쿠빌라이 칸은 항상 그를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전투에 보냈고, 그는 아릭부케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 뒤 그는 항상 쿠빌라이 칸의 칙령에 따라 원정에 나섰고, 훌륭한 삶을 살다 천수를 다했다. 그가 사망했을때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지부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에게도 자식들이 많았고, 타가차르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에게도 자식들이 많았고 수많은 군대가 그와 함께 있었으며 쿠빌라이 칸을 위해 열심을 다해 봉사했다, 수많은 아들들중 아줄이라는 자가 후계자가 되었다.


위의 집사의 기록에 따르자면 옷치긴 왕가의 왕위 계승은 옷치긴 -> 타가자르 ->지부 -> 타가자르 -> 아줄의 순서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타가차르는 지부의 아버지가 되고, 지부는 다시 다음에 나오는 타가자르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지부 또는 지부겐이라는 인물은 옷치긴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 보다 일찍 사망했고, 옷치긴의 사후 타가차르와 투데의 왕위 계승 다툼에서 투레게네의 도움으로 타가차르가 왕위를 계승할수 있었지요, 따라서 위의 집사의 기술은 잘못된 것으로 바로 잡자면 옷치긴 -> 지부 -> 타가차르 -> 아줄의 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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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에 따르자면 타가차르는 몽골 제국의 중대한 국사마다 참여하였으며, '동방 왕가의 수장'으로서 옷치긴이 좌익의 군대를 지휘했던 것 처럼 군대를 이끌고 남송 정벌을 지휘했습니다, 또한 그는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의 칸위 쟁탈전에서 쿠빌라이를 옹립함으로서 원 제국 성립의 일등 공신이 됐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타가차르가 왕이 됐던 시기는 구육 칸이 즉위해 통치의 기반을 닦아 나가던 시기로, 이제 당시 몽골 제국의 정치 상황을 통해 뭉케 칸 즉위 전 후의 타가차르의 역할을 알아볼텐데...그 건 다음에 잇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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