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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고난, 용서, 화해… ‘남아공의 성자’ 만델라의 삶
게시물ID : history_128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lidarite
추천 : 5
조회수 : 41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06 14:00: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060806041&code=970209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의 상징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향년 95세.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인 만델라는 백인정권의 폭압적인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 정책에 맞서 현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이끌며 27년 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투쟁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백인을 포용해 무지개처럼 다른 인종이 조화를 이루어 사는 오늘날의 남아공을 건설했다. 탄압받던 피지배계층이 권력을 장악한 뒤 압제자들을 숙청하지 않고 공존의 길을 선택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권력욕을 버리고 인류 평화를 위한 외길에 매진해 세계인의 존경을 받으며 ‘성자’로 불려왔다.

만델라는 1918년 7월18일 남아공 동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템부족 추장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말썽꾸러기’라는 의미를 담은 ‘롤리훌라훌라 만델라’였다. 이후 기독교 계통 학교에 입학하면서 ‘넬슨’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얻게 됐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추장이던 아버지가 어린 시절 사망한 뒤 템부족 왕을 후견인으로 해 교육을 받았다. 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던 만델라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학교와 부딪히고, 결국 정학 처분을 당하며 인생이 바뀌었다. 만델라는 이후 요하네스버그로 상경해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법률가의 꿈을 꾸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방송통신대 과정을 이수했다. 이 과정에서 흑인 지식층과 교분을 갖게 되면서 백인정권의 흑인 차별정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25세때인 1943년 당시 민주화 투쟁의 중심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했고 이듬해인 1944년에는 ANC 청년조직인 ‘ANC청년동맹’(ANCYL)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34세때인 1952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획득해 또다른 민주화 운동 지도자 고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공 최초의 흑인 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탄압은 곧 찾아왔다. 1952년의 전국적 흑인 저항운동에서 그는 불복종 운동의 동조자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아 수 개월에 걸친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 때 처음으로 체포됐다. 이 저항운동으로 조직은 10만명 규모로 성장했으나, 탄압은 강경해져 1960년 흑인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69명이 사망하는 ‘샤퍼빌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백인정권은 같은 해 4월엔 반공산당법을 발표, ANC를 불법조직으로 규정했다. 만델라는 비폭력 저항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주장,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의 초대 사령관이 됐다.

삼엄한 감시를 받았던 만델라는 1962년 해외로 피신했다 비밀리에 귀국했으나 결국 그 해에 경찰에 체포돼 1964년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누리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을 품고 있다”며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으며 이를 성취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있다“고 최후 진술했다. 이 최후진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운동의 상징적 연설이 됐다. 이후 그는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 섬의 악명높은 교도소와 케이프타운의 폴스무어 교도소, 웨스턴케이프주 팔의 빅터 퍼스터 교도소 등을 옮겨다니며 27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 1990년 2월 출감했다. 국내의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력 등에 더 이상 아파르트헤이트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백인정권이 만델라를 석방하고 ANC를 합법조직으로 인정한 것이다.

백인정권과 ANC등은 협상에 나서, 1994년 민주적 선거를 신시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만델라는 1993년 이 공로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F.W.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만델라는 1991년 ANC 총재로 취임했다. 1994년 4월 27일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민주적 선거에서 ANC가 다수당으로 승리했다. 이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헌법의 간선제 규정에 따라 국회는 다음달인 5월에 만델라를 이 나라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만델라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단합된 국민으로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화해와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다시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 압제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말했다. 압제자였던 백인들을 숙청하지 않고 화합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2001년 방한한 만델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진실화해위원회(TRC)’를 출범시켜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를 정리했다. 백인정권 당시 경찰, 군 등 안보 기관에 근무하면서 흑인에 대한 테러와 인권탄압을 자행한 가해자가 TRC에 출두해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할 경우 사면하는 대화합조치를 취했다. 이를 통해 남아공은 극심한 흑백 갈등을 겪지 않고 안정과 평화공존의 걸을 걸었다.

만델라는 1999년 5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헌법 규정상 재임이 가능했지만 단임으로 끝냈다. 그는 퇴임 이후 어린이재단, 만델라재단 등을 통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퇴치 활동과 어린이 교육을 위해 기금마련과 자선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등 사회에 대한 공헌활동을 지속했다. 고령으로 점차 쇠약해지면서 2004년 모든 공식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지만, 그는 이후에도 남아공의 정신적 대통령이자 ’살아있는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그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등장했다. 폐막식에 만델라가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와 함께 등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수만명의 사람들은 그에 대한 존칭인 ‘마디바’를 연호하고 부부젤라를 불어 애정을 표했다. 남아공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선거 전 만델라를 찾는 등 아직도 만델라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만델라는 2011년 1월 호흡기질환 증세를 보여 입원했다가 이틀만에 퇴원했다. 만델라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남아공 국민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후 정부는 군의관이 이끄는 팀을 보내 그를 24시간 돌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령인데다 옥살이 기간 동안의 고된 노역으로 몸이 쇠약해졌던 그는 2012년 12월 폐 감염증 치료를 받느라 성탄절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이듬해인 2013년 3월과 6월에도 폐렴이 재발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유엔은 지난 2009년 11월 만델라가 태어난 7월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지정했다. 만델라가 67년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정신을 기려 이날 만큼은 세계 만인이 하루 중 67분을 할애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는 취지다.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5일 성명을 내고 “만델라는 평화 속에 잠들었다. 남아공의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고 만델라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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