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끼이익 끼이익 발을 내딛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으스스한 소리가 흘러 나온다. 'R W B' 창고 가장 오른쪽 서랍에, 이 세가지 알파뱃이 쓰여 있는 수납함이 보였다. ...... 이건가. "찾았다.."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이 올라온다. 열어선 안될 것 같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호흡을 한번 고르고, 나무 선반의 문을 열어 재꼈다. 진득 진득한 시뻘건 액체가 담긴 유리 병이 보인다. ....정말로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 액체 속에 담긴 작지만 길다란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누르스름한 빛깔.. '손가락..' -------------------------------------------------------------------- "하~암." 모든게 따스롭게 느껴지는 봄날이다. 따뜻한 봄의 내음과 함께, 향기로운 과일 향이 내 코를 자극한다. 이곳은 도심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시골인지라, 봄의 달콤함이 더 욱 진하게 느껴진다. 나는 따사로운 햇빛 아래서 여느 때와 같이 딸기 재배를 하고 있었다. 봄은 딸기의 수 확 철. 잘 익은 빨간 알맹이들이 햇빛을 반사해대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 딸기 재배는 나의 직업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가생활이기도 하다. 부드 러운 햇살과 상큼한 과일 향기. 그 포근함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딸기 를 땄다. 꼬르륵.. '조금 쉬었다 해야겠군.' 쉬지 않고 계속 딸기를 재배하다 보니 허기가 졌다. 따놓은 딸기 몇 개를 그릇에 담 아 입에 집어 넣었다. 입안 가득 밀려오는 이 상큼함.. 그때였다. "저.. 저기요!" '...?' 여성의 목소리. 목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내 또래 정도의 여자아이가 큰 바구니 를 짊어 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 저 말입니까?" 당황해서 소리쳤다. "네.. 잠시만요.. 헉 헉." 뭐가 그리 바쁜지 내가 있는 언덕을 뛰어 올랐다. 큰 일이라도 있는걸까? 그녀가 언덕을 올라 내가 있는 곳 앞까지 도달했다. 힘이 드는지 가뿐 숨을 몰아 쉰 다. 바구니를 주섬 주섬 뒤지더니 무언가 꺼내며 비장하게 말을 한다. "그.. 그냥 딸기만 먹으면 맛이 없어요! 이걸 사서 뿌려 먹는게 어때요?" 무언가 하고 보았더니, 꿀이었다. 이상한 아이.. 그러나 아름다웠다. 도시에서 우리 마을에 새로 이사 왔다는 애가 이 아인가. 긴 생머리에 작고 왜소한 채구. 여리여리한 눈에 빠알간 입술. 분을 온통 칠한듯이 새 하얀 피부. 도시에서 온 아이라 그런지 생소했다. 음.. 그녀에 대한 첫 인상을 말하자 면.. 한 마리의 귀여운 '아기 새' 같았다고나 할까. 발품을 해서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보면 벌이가 시원찮은 모양이다. "흠.. 알았어요 사죠."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매우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웃는 모습 또한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 다. 이대로 그냥 보내긴.. 아깝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네..? 뭔데요? 정찰제라서 가격을 깎거나 할 수는 없어요.." "그런게 아니라, 저랑 딸기좀 같이 먹다 가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밝게 웃으며 대답 했다. "네!" 이렇게 쉽게 승낙 할 줄이야.. 붙임성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건지 모르겠 다. 그러나 그건 중요치 않았다. "앉으세요. 반가워요 제 이름은 신우에요. 류신우." 우리 둘은 함께 꿀에 딸기를 찍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입안을 감도는 그 달콤하 고 새콤한 향기가, 나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이소연. 우리 마을에 새로 이사와 양봉업(꿀을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 다고 한다. 시골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응이 힘들고, 꿀을 사는 사람이 없어 직접 돌아다니면서 파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 마을은 양봉업을 하는 사람이 없 어, 꿀 장사가 잘 될텐데.. 새로 온 사람이라 마을 사람들이 아직은 어려워 하는 모양 이다. 그렇게 잠시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린 서로 번호를 교환하고 헤 어졌다. 그 후로 난 그녀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취했고, 언제부턴가는 그녀와 만나 함께 보내 는 시간이 많아졌다. 난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커져감을 느꼈다. 작은 새와 같이 아름다운 자태에 고운 마음씨 까지. 아아, 달콤하다. 정말 '꿀'의 영 어 뜻과 같이, 나에게 있어서는 Honey(사랑스런 사람)로 다가왔다. 그녀도 나를 좋아 하는 것 같다. 망설일 것 없다.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식으로 고백을 해야 할까. '그녀와 만나서 직접 얘기를 할까? 아니야 너무 부끄러워.. 그렇다면 전화로? 아니.. 그 방법은 너무 성의 없어 보여..'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도 성의 있게, 그리고 달콤하게 고백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포츈 쿠키'처럼 음식을 만들어 그 속에 조그맣게 고백 편지를 넣 어 보내기로 했다. 음식 종류는 달콤한 딸기 케익으로 정했다. 딸기의 꽃말은 존중과 애정. 나의 애정을 듬뿍 담을 케익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빵을 쌓아 올리고, 고백 내용을 적은 양피 지 종이가 들어있는 쿠키를 넣었다. 생크림을 바르고, 손수 재배한 딸기로 예쁘게 장 식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산 꿀을 조금 뿌려 달콤한 향을 냈다. 화려하진 않지 만, 그녀처럼 순수하고 예뻐 보이는 케익이 완성됐다. 예쁘게 포장을 해 그녀에게 보 냈다. 이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며칠 뒤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나의 고백에 어떻게 대답해 줄 것인지 떨리 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공원 벤치에 단아하게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소연씨 안녕하세요."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도 웃으며 반갑게 인사한다. "저..저기. 케익 잘 드셨어요?" 긴장되는 마음에 목소리도 떨려 온다. "아..네. 우리 오늘 뒷산에 소풍이라도 갈까요? 도시락도 싸왔어요." "네? 아.. 그러죠."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다. 말을 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끄러운 걸까, 아니면 아직 사귀는 단계는 이르다고 생각한 걸까. 그러나 나를 위해 도시락도 싸오 고 소풍도 같이 가자고 하는걸 보니 나를 싫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산내음을 맡고, 그녀의 맛있는 도시락도 먹고. 마냥 즐거웠다. 그녀의 확실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뭐 어떠랴. 이렇게 행복한데. "이야~ 오랜만이다. 요새 뭐하고 지냈냐? 연락도 없고." 이 녀석은 내 오랜 친구 영호다. 같은 마을에 살아서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고,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런데 요새는 내가 소연이를 만나느라 이 녀석을 볼 시간이 없어 연 락을 안했더니, 다짜고짜 술을 마시자며 날짜와 장소를 통보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먹기 싫은 술을 억지로 들이키는 중이다. "그냥 좀 일이 있어서.. 너는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그냥 좀 일이 있긴 뭐가 있어 임마. 자식.. 너 혹시 연애라도 하는거 아니야? 큭큭." 순간 가슴이 뜨끔 하다. "사실.. 요새 좋아하는 애가 생겨서.. 잘 되고 있는 중이다." "에? 정말이었어? 니가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니.. 그것도 참 별일이다. 누군데?" 말할까 말까 살짝 고민했지만, 이 녀석은 결국에는 알아낼 놈이라는 생각에 말해버렸 다. "이번에 우리 마을에 새로 이사 온.. 소연이라는 애." "걔는 안돼!!" 영호가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래버렸다. 그러나 영수는 나보다도 놀란것 같 았다. "왜? 걔 예쁘고 성격도 좋고 딱 내 취향.."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 몰라? 걔가 여기로 이사 온 이유.." 영호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내 말을 잘라버렸다. 나도 조금 화가 나 빈정거리며 말했다. "몰라. 그럼 뭐가 문젠데." "걔 살인자였데.. 원래 살던 곳에서 사람 죽여서 여기로 도피한 거야.." .......이..이녀석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거지.. "무슨 싸이코 패스라고 하던데.. 재미로 사람 죽이는 그런거 있잖아. 더 중요한건.. 지금 이 마을에서도 살인을 계속 저지르고 있다는 거야." ..미친새끼. "닥쳐!!" 영호에게 소리질렀다. 그럴 리가 없다.. 소연이가.. 그럴 리가.. "잘 되고 있는 중인데 너무 직접적으로 말해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사실이야." "사실은 무슨 사실.. 너도 들은 거잖아.. 어디서 이상한 소문 듣고 와서 아무렇게나 씨부리지 마." "응, 물론 소문이야. 그치만.." "그치만 뭐?" "......나도 그건 봤어.. 밤에.. 피가 흠뻑 적셔진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고 있는걸.."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영호와 너무 과음을 한 탓도 있지만, 그가 말해준 소연이에 관한 일이 머리를 너무도 혼란스럽게 한다. 영호자식. 소문을 크게 퍼트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놈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녀석은 말은 과장 되게 하긴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 놈이다. 난 어떻 게 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이 진실일까. "......"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그녀의 가냘프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사람이 살인 같은 걸 할 리가 없 다는 생각이 든다. "아.. 소연씨 저에요. 오늘 만나서 할 얘기가 조금 있어서요." "네? 아 뭔데요? 그럼 있다가 요 옆 공터에서 만날까요? 도시락도 싸갈게요." "아.. 그런 일이 아니에요. 도시락은 됐고, 공터에서 3시쯤 만나서 얘기 좀 해요. 이따 봐요." "네~" 옷을 차려입고 공원으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이 공원 밴치에 그녀가 단아하게 앉아있 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조금 창백해 보였다. 무슨 피곤한 일이 있었는지 눈 밑도 거 므스름 하다. 잠을 잘 자지 못한걸까. 그녀가 날 발견하더니 환히 웃으면서 뛰어온다. "평소엔 그렇게나 도시락 좋아하더니, 오늘은 배가 안고프신가 봐요?" "아 그냥 오늘은 얘기좀 할게 있어서 부른거에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물론, 바보 같은 얘기라는건 알아요. 당연히 소연씨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아이, 괜찮으니까 빨리 말하세요." 언젠가는 물어봐야 할 일이다. "사람.. 죽여본적 있어요? 혹시 이 마을에서도.." "......네?" "아 물론 헛소문이겠지만.. 저기, 그게.."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말을 더 이상 잇을 수가 없다. 이 순간, 그녀의 이 표정이 말하 고 있는건 뭘까. 당혹감? 어이없음? 아니 이건.. 슬픔. 이렇게 까지 슬퍼할 줄이야..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나를 올려다 본다.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려 하는 순간, 벤치에서 일어나 뒤돌아 뛰어가 버린다. 내 말에 상처입은 것일까. 여린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그녀를 잡아야 한다. 사죄해야 한다. 일어나는 순간 앞에 뛰 어가던 그녀가 넘어졌다.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서럽게 울먹인다.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말을 해버렸네요. 그냥 지나가는 말이니 넘겨주세요." "소문.. 들으셨나봐요.. 신우씨 만은 안 듣기를 바랬는데 ....죽였었어요. 사람." "네?" "전에 사람.. 죽였었다고요." 심장이 쿵하고 가라 앉는다. "어쩔 수 없었어요. 길가에서 치한을 만나서.. 정당방위였어요. 너무 놀라서 밀쳤더 니, 쓰러지면서 머리를 박아 죽어버렸어요. 무죄 판결까지 받았고, 잘 정리된 사건이 에요." 절박하게 나를 보며 말한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기 바란다는 처절한 말투. 그녀 가 너무나 흐느끼면서 말했기 때문에 알아 듣기가 힘들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 듣기 를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머지 일들은 전부 과장되서 소문이 난 거에요! 지금도 제가 살인을 하고 있다니, 그건 아니에요!! 전에 있었던 일도 사고였거니와, 제가 살인을 하고 있다니 요. 절대로, 절대로...." 울먹이는 그녀의 눈은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느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진정하세요. 저는 소연씨 믿어요. 소연씨가 절대 그럴 리가 없죠." "그렇지만.. 그렇지만.. 사람을 죽였는데도.." "괜찮아요. 전 여전히 소연씨 사랑해요. 그때 제가 보내준 케익 속 고백처럼." "고마워요.." 눈물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에 이제야 작은 미소가 보인다. 공원에 앉아 밤이 깊도록 이런 저런 얘기들을 했다. 쏟아지는 별들이 아름답다. 시간 이 늦어서 그녀를 보냈다. 새하얀 원피스를 하늘하늘 펄럭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 인다. ......? 오늘은 완벽한 날이다. 그녀에 대한 오해도 풀었고, 얘기도 많이 할 수 있었다. 별들 도 쏟아질 것 같이 아름답고, 풀냄새도 향기롭다. 단지, 그녀의 하얀 원피스 뒤에 작 게 방울져 묻어있는 빨간 자국들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집에 와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렇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녀가 발품을 하면 서 까지 꿀을 팔아야 될 정도로 물건이 팔리지 않았던 건, 살인자라는 소문 때문이었 던 건가. 그리고 내가 꿀을 사며 잠시 얘기 좀 하자 했을 때 그렇게 기뻐하던 것 도... 외로웠겠지. 살인자라는 누명. 그리고 사람들에게서의 고립. 그런 그녀와 처음으로 마 음을 트고 대화 해 준 내가 고마웠을 것이다. 내가 소문을 들은 걸 알았을 때 그렇게 나 떨면서 울먹였던 것도, 자신과 가까운 유일한 사람인 나마저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 는 불안감 때문이었나.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주 고 싶었다. 그렇지만 조금 불안해 지는 건, 그녀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단지 '고 마움'일 수도 있다는 것. 자기를 받아 줄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와 만나는 것 이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피스 뒤 에 묻어있던 빨간 자국. 그것은 뭘까.. '혹시..' 아니, 그 생각은 하지 말자. 그녀를 의심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녀와 그렇게 계속해서 만나갔다. 만나가면서 나는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됐지만 더 욱 불안해 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나에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 히려 최근에는 왠지 뭔가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연락도 적어지고, '바쁘다'는 말로 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없으면서 뭐가 그리 바쁜 걸까. 또다시 안 좋은 의심이 들기 시 작했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얼굴에 피곤이 쌓여 보이는 것이, 무언가 밤마다 일을 하 고 있음에 틀림 없다. 오늘도 밤이 되도록 그녀에게서 연락이 없다. 내일은 꼭 만나고 싶었다.. 그녀에게 전 화를 했다. "여보세요?" "헉..헉.. 여보세요?" 뭘 하고 있는걸까. 가뿐 숨을 내뱉으며 전화를 받는다. "응 나야. 지금 뭐하고 있어?" "아.. 그냥 조금.. 일좀 하고 있어." "...무슨 일인지는 말해줄 수 없고?" "..미안.. 나중에 꼭 가르쳐 줄게." 그녀를 믿고 싶지만.. 믿고 싶지만..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주위의 소리가 더욱 날 무 섭게 만든다.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온다. 콰직 철퍽 콰직 철퍽 무슨 소릴까. 그녀가 사람을 찌르고 있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상상해버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신우씨?" "아아 미안.. 잠시 생각 좀 하느라고. 혹시 내일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음.. 잠시라면 괜찮아." "그럼 내가 내일 오후 6시쯤에 너희 집으로 갈게. 밥이나 한끼 같이 하자." "집은 안돼.." ......그녀가 이상해진것 같다. 아니, 이상해졌다. 갑자기 왜 이리 나를 멀리하는 것 일까. 이렇게 숨기는 것이 많으면 나도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한다. "대체 왜. 너 요새 왜 그래. 너가 이러면 나도 너를 못믿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치만 내일은 그냥 공원에서 보자.. 미안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또 울먹이고 있는 모양이다. 미안할 짓을 왜 하는지.. 그렇지 만 가슴이 아파 일단 공원에서 보자고 했다. 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나 행복했던 우리의 만남의 공간이지만, 오늘마저 도 그녀가 나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면 공원에 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야 류신우!" 누군가 하고 돌아봤더니 영호였다. "너 어디가냐? 그건 그렇고 걔는 정리 된거야?" "아니 아직.. 지금 걔 만나러 가는 중이야." "너 위해서 하는 말이다.. 만나지 마. 너가 화낼까봐 이 일은 말 안하려고 했는데.." "괜찮아 말해봐. 솔직히 나도 걔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 조금 망설이더니 영호가 말을 이어간다. "우리 어머니가 그 걔네 집에 꿀을 사러 갔데. 원체 안가려고는 했는데 중요한 손님 이 오신다 해서 꿀이 꼭 필요했나봐. 그래서 꿀을 사는데, 그 애의 손이 온통 시뻘겋 게 물들어 있는거야.. 소문도 있고 하니까 너무 무셔우셨겠지.." "사실이라면 무서우실 만도 해. 그렇지만, 착각일 수도 있는 거야." "거기서 끝났으면 나도 말을 안해.. 꿀을 계산 하면서 창고쪽을 봤는데.. 창고에 있 는 서랍마다 무슨 암호같은 영어가 쓰여져 있고.. 싸이코임에 틀림 없어. 가장 중요한 건.." "가장 중요한건?" "창고 옆에, 시뻘건 핏물이 담겨진 병에 손가락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셨데.. 결국 꿀 도 못사고 도망쳐 나오셨다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섰다. 우연이 겹치고 겹치면 그건 필연일 수 밖 에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내 마음은 그녀를 믿고 싶다고 소리친다. "그래 알았다. 내가 알아서 정리 할게. 다음에 술 한잔 사마." 영호와 헤어진 뒤,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전화해 그냥 내일 보자고 했다. 지금 만나봐야 그녀는 또다시 거짓말만 잔뜩 늘어놓을 것이다. 영호도, 그녀도 이젠 누구도 믿기가 힘들다. 모든건 내가 확인 할 수 밖에 없다. 오늘 밤에 그녀의 집으로 예고 없이 찾아가 직접 내 두 눈으로 모든 걸 확인 할 것이다. 11한시쯤 됐나, 집을 나섰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산 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평소에는 소박하고 예쁘게 생긴 집이라 생각했었 지만, 오늘은 무언가 음산하게 느껴진다. 지금 이 나무 문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 돈되고 깨끗한 평소 그녀의 집이었으면 좋겠다. 덜컥. 문이 열려있다. 당연히 잠겨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열리니 당황해버렸다. 다 행히 방은 깨끗하다. 예전의 포근한 나무집의 모습 그대로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 다. 불을 켜고 창고쪽으로 갔다. 꿀을 담아놓는 공간이라서 그런지 수많은 수납장들 이 있었다. 게다가 모두 잠겨 있어 여는건 불가능 했다. 영호가 말했던 시뻘건 병은 보이지 않았다. 치워버린 걸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수납장들을 살펴보니 그의 말처럼 모두 조그맣게 영어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M D G.. , T R S.. , S O H........" 각 수납장마다 다른 3개의 알파벳이 적혀있었 다. 이건 뭘까.. 암호?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이니셜일수도.. 그때였다. 끼이이익 문을 여는 소리. 그녀가 돌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평범하 게 인사를 하기로 했다. 들어온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꺄아아아악!!" 갑자기 들어와 있는 나 때문에 깜짝 놀래서 소리를 지른다. 그럴만도 하다. 이 밤에 누군가 말도 없이 집에 들어와 있으니. 그렇지만.. 지금 정말로 놀랜건 나다. 그녀의 옷과 바지가, 그리고 손이 온통 시뻘겋게 젖어있다. 손에는 몽둥이 같은게 들 려 있다. 무섭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처음으로 몰려온다. "너.. 너 그 꼴이 뭐야.. 너 어떻게 된거야." 더 이상 그녀는 내 애인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반말을 쓰고 있었다. "아?.. 어.. 죄송해요.. 이건.." 그녀가 다가온다. "다가오지마.. 다가오지마 !! 무.. 무슨일이야.. 뭘 한거야.." 조금 충격을 받은듯이 그녀가 멈춰선다. "죄송해요.. 한번만 봐주세요. 3일 뒤.. 정확히 3일 뒤에 말해줄게.. 지금은 안돼 요.." 또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한계다. 이 상황 앞 에서도 계속해서 모든걸 숨기려는 그녀가 더욱 무섭다. "오지 마.. 이 악마야..!! 빨랑 꺼져..!" 그녀가 거의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떨면서 눈물을 흘린다. "죄..죄송해요.. 죄송해요..그치만.. " "다.. 다가오지마. 빨리 말해. 어떻게 된건지.." "아.. 그.. 그게..어쩔..수..어..없네요.. 저기 퀴.. 퀴즈 좋아하세요...?" 갑자기 이순간에 무슨 소릴까. 이 싸이코같은.. "뭐하려는 수작이야.. 빨리 그 몽둥이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 "저.. 그게.. 맞..아요!! 그.. 그래. 시.. 신우씨.. 저기..신우씨가 제일 좋아하는 음 식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밤하늘을 뺀거.. 거기서 자음만을 ... 그게 뭘까 요? 맞춰.. 맞춰보세요." 거의 애원하는 눈초리로 나에게 다가온다. 분위기를 반전시켜보려 하는 건지 눈물 범 벅이 된 얼굴을 억지로 웃어보인다. 그러나 그 표정마저 너무나 무섭다. "닥쳐 다가오지마!! 다가오지 말라고!!" 그녀가 자꾸만 한걸음씩 내가 다가온다.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내 앞의 악마에게서 도망가고 싶을 뿐. "제발.. 마.. 맞춰주세요. 제발..저.. 그게.. 그걸 맞추시면.." "오지 마!!!!" 두려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쳐버렸다. 쿵. 얇은 다리로 중심을 잡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더니, 그대로 나무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버렸다. ....움직이지 않는다. 즉사했다.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 어라.. 내가 방금.. 사람을 죽인건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죽인건가? 아니, 그녀는 살인자다.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연이가 정말 살인자일까?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피와 손가락이 담겨있다는 그 병을 찾 아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눈앞 있는 그녀의 시체가 너무나 무섭다. 서둘러 창고쪽 으로 들어갔다. 이 수많은 수납장을 일일이 열어보는건 무리이다. 어디에 있는걸까. 저 수납장에 쓰여 있는 알파벳이 힌트라도 되는 걸까. 대체 어떻게 해야.. ......소연이가 아까 했었던 말. 방금 전 소연이가 퀴즈라고 냈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밤하늘을 빼라고 했었나. 소연이가 알고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단연 딸기다. 소연이가 가장 좋 아하는 밤하늘은.. 그때 그녀가 말했었지. 그녀가 나에게 살인을 했었다는 사실을 털 어놓고, 내가 그것을 이해해 주던 날 함께 올려다 본 밤하늘. 그렇게 아름다운 밤하늘 은 처음이라고. 별이 쏟아질것 같이 빛나던 밤하늘이였다. 수납장에 써있는 것은 영 어 알파벳이다. 단어를 영어로 변환해 보았다. 딸기는 Strawberry. 별이 많은 밤하늘은 Starry. 중복되는 철자들을 제거하면.. R, W, B, E가 된다. 여기서 자음만을 뽑으라 했었나. 모음인E를 제거하니 R, W, B만이 남는다. 'R, W, B' 이 알파벳으로 구성된 서랍을 서둘러 찾아 보았다. 그녀는 왜 이런 짓을 했던걸까. 갑 자기 그 힌트를 나에게 가르쳐준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 상황에서 퀴즈만을 그렇 게.. 불안한 예감이 점점 커져만 간다. "R, B, W... R, B, W..." 끼이익 끼이익 발을 내딛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으스스한 소리가 흘러 나온다. 창고 가장 오른쪽 서랍에 다다랐을 때였다. 작은 글씨로 두려운 알파뱃이 써있었다. 'R W B' ...... 이건가.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이 올라온다. 열어선 안될 것 같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호흡을 한번 고르고, 나무 선반의 문을 열어 재꼈다. 진득 진득한 시뻘건 액체가 담 긴 유리 병이 보인다. 정말로 있었던 건가. 그리고 그 액체 속에 담긴 작지만 길다란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누르스름한 빛깔.. 그녀는 대체 왜.. 사이코 패스란 이런걸까. 병을 열어보았다. 진득 진득한 그 병을 열 어보았다. ...... ...... .... 뭐지, 이 달콤한 향기는.. 피의 비릿한 향 대신에,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달콤한 냄새가 난다. 이건 진한 딸 기향.. 그리고 약간의 꿀냄새.. 병 앞에 조그마한 라벨이 붙어있다. 「Rose Wine Blended」 (프랑스식 딸기 와인) 'R W B'는 이것의 약자였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는다. 나를 위해 그녀가 만든 건가. 그동안 바쁘다고 한건, 이걸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수척해질 정도로 만들고 있었던 건가.. 그녀의 옷에 빨간 자국이 묻어 있었던 것. 전화 상에서 들려오는 '콰직' 거리던 소리. 그녀가 들고 있던 몽둥이 모양의 물체. 나를 위해 직접 딸기를 찍어 와인을 만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과장된 소문과, 나의 의심이 오히려 그녀를 죽였을 뿐.. 그런데 대체 왜. 나에겐 그렇게나 비밀로.. 무언가에 홀린것처럼 와인을 입에 한모금 갔다 대보았다. 아아.. 그 달콤함에 온몸이 마비가 되어버릴 것 같다. '탁' 입에 무언가가 걸린다. 와인병에 들어 있었던 그것이다. 조심히 빼보았다. '이건..' 감정이 이성의 선을 돌파하기 시작한다. 모여있던 눈물이 조금씩 새어나온다. 유리 관 속에 들어있는 누런 양피지 종이. 그것이 손가락의 정체였다.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고백 편지.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가. 유리 관 코르 크를 빼내어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담은 나의 고백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소연씨께- 제가 만든 딸기 케익, 잘 드셨나요? 어린 새와 같은 그대에게, 이제야 고백을 하네요. 그대를 영원히 지켜줄 수 있는, 그럼 사람이 될께요. 사랑해요. I am only a STRAW. But I want be your BERRY. (저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대를 위한 과실이 되어주고 싶어요.)』 나의 맹세는 어디로 간 걸까. 그대를 지켜주겠다던 나의 맹세는.. 누구보다도 그대를 믿어줬어야 하는 나인데.. 양피지 뒤편에는 또 다른 글이 쓰여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쓴 답장이었다. 『-신우씨께- 제가 만든 퀴즈, 잘 푸셨나요? 번거롭게 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나름 이벤트라고 열심히 준비한 거에요! 항상 고마워요. 언제나 저를 믿어주신 당신. 정말 고마워요. 그대에게 드리는 첫 '사랑한다.'는 말은, 이 이벤트를 통해서 해드리고 싶었어요. 오늘이 아마 그대와 제가 100일째 되는 날이겠죠. 신우씨가 만들어준 케익, 맛있게 먹었어요. 저도 그래서 준비한게 이 와인이에요. 역시나 딸기와 꿀이 섞여있는.. 맛이 어떨 줄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함께 지금 함께 이 와인을 마시고 있겠죠? 이 꿀과 딸기의 만남이 달콤한 와인과 케익이 됐듯이, 우리도 영원히 그렇게 되길 바래요. 요새 제가 이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바뻐, 자주 만나주지 못한점 죄송해요. 그러나 무엇을 걱정하나요. 걱정하지 마요. 당신은 저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인걸요. 사랑해요. You're the only man who can be my HONEY AS real HON. -EYAS (당신은 진정한 연인으로써 저의 honey가 될 유일한 사람이에요. -작은 새가)』 이 달콤한 와인에 홀려서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독한 와인에 취해서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딸기가 피로 착각 할 만큼 새빨갛다는게 미웠다. 꿀은 그 색을 변화시키지 못할 정도로 투명하다는 것이 미웠다. 결국 딸기와 꿀이 섞인 와인은 죽음을 가져왔다. 너무나 새빨갛던, 그녀를 믿지 못한 내 마음이 미웠다. 너무나 투명해 이를 막아 줄 수 없던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미웠다. 결국 우리 둘의 마음은 슬픈 마지막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입을 감도는 와인의 맛이 이렇게 달콤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우리들의 사랑이 너무나 달콤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미울 수가 없었다. 출처 웃대 - c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