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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8
게시물ID : history_128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9
조회수 : 181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2/08 17:25:51
 
 
- 번왕들의 난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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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하는 당시 팔왕의 위치도
 
 
 여기서 잠시 팔왕의 가계도를 짚고 넘어가자.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 사마염의 5남.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사마의의 4남.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사마의의 9남.
제왕(齊王) 사마경(司馬?) -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의 아들.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 사마염의 12남.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사마염의 14남.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 - 사마의의 두번째 동생, 사마부의 손자. 아버지는 불명.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 사마의의 네번째 동생, 사마규의 손자. 사마태의 아들.
 
 
각기 인물마다 짝지어 보면 가깝게는 형제(물론 이복형제지만), 멀게는 몇촌씩 가는 관계에다 항렬상으로는 심지어 작은 할아버지와 손주관계도 있다.관계가 멀고 가깝고 간에 어쨌든 피를 나눈 친척사이요, 모두가 고조(高祖)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를 조상으로 둔 가문의 일족이다.
 
웬만한 아침 드라마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왕자의 난은 비교도 안되는 막장 가족사를 보여준다 하겠다.
 
조왕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을 폐위하고 참람되이 스스로 황제가 되자 이에 제왕 사마경이 반란의 물꼬를 터, 각지의 번왕들이 들고 일어난다.
팔왕의 난에 앞서 삼국통일 이후, 사마염이 종친 번왕들에게 군권을 쥐어줌으로서 힘을 실어주었다는 얘기는 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일이 나중에는
참사를 불러온다고 했는데, 이제 그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마염의 의도는 본래 각기 병력을 거느린 종친왕들이 전국 각지에 위치하며 만약에 있을 황실에서의 변란이나 위기에 대응시키고자 울타리 역할을 기대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울타리들이 난립하여 도리어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죄다 중앙으로 몰려들고 있는 형국이었다. 
 
- 사마륜을 죽이고 사마경을 세우다 -
 
물론 명분은 좋았다.

'감히 제멋대로 지금의 황제를 몰아내고 무엄하게도 황제의 자리를 꿰찬 도적놈을 정벌하러 간다' 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이 있었으니까.

마치 천하의 인심을 등에 업기라도 했는 듯, 반기를 든 번왕 연합군은 수도 낙양으로 몰려가 조왕 사마륜의 병력과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전투에서 승리하여 삽시간에 궁성으로 짓쳐들어가 조왕 사마륜을 잡아 감금시켜 버린다. 이때가 서기 301년, 3월 17일. 황제가 된 지 불과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반란군(성공했으니 혁명군이라 해야할지도?)은 태상황으로 물러나 거의 유폐되다시피 쳐박혀 있는 혜제 사마충을 다시 황제로 옹립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마륜의 존재가 꺼림직 했던지 이놈을 어찌할까 하다, 양왕(梁王) 사마융(司馬肜 : 사마의의 8남)이란 황족의 건의로 사마륜을 주살해버리고 그 아들들과 그 일가를 모두 처형한다.

따로 쓰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피튀는 싸움만이 다가 아니라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결탁이 난무하는 물밑작업도 있었다.

하간왕 사마옹 같은 경우는, 본래 사마륜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제위를 찬탈한 사마륜 역시 가뜩이나 한사람 한사람의 황족들의 지지가 아쉬운 마당에 그와 같은 사마옹의 지지도 번왕 연합군에 맞설 힘에 보탬이 되었기에 철떡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마옹이 성도왕 사마영의 병력규모가 크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등을 돌려버려 연합군에 가 붙어버렸으니, 병력균형에서 뒤쳐지는 수밖에..

그리고 바로 위에서 등장한 양왕 사마융 역시 원래는 사마륜 파로서,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주살하는 일에도 동참하기도 했고 사마옹 정권 하에서는 무려 승상(丞相 : 오늘날의 재상)직까지 지냈지만, 그 역시 사마륜의 하는 짓거리가 영 마음에 안들었는지 연합군으로 넘어가 도리어 사마륜을 죽일 것을 건의하는 입장이 되버린다.

이 두 황족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황족들이 사마륜이냐 연합군이냐 사이에서 지지하는 주장이 갈려 편이 갈렸다. 어느쪽에 붙느냐에 따라 승자냐 역적이냐가 갈려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마당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렇게 보면 비단 팔왕에만 국한된 난이 아니라 '황족들의 난' 으로 풀이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죽은 사마륜의 뒤를 이어 대권을 쥐게 된 사람은 제왕 사마경이었다.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몰아내고 나중에는 사마륜을 토벌하려 했던 그 사마경이다. 아마 황족들이 저들끼리 논의하여 황족 중 하나를 대표로 세워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기로 결정한 듯 하다. 황족들이 지지하고 추켜세워 줬으니 합법적인 실권자라 하겠다.

사마경이 대표로 선출된 이유는 합리적이었다. 현명하고 명망이 깊던 아버지 사마유의 피를 이어받아 그런지, 당시 사마경의 평은 꽤 좋았다. 현명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며 일찍이 여러 공로가 있다하여 인망이 높았다고 하니, 충분히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었을 터.
 
하.지.만(이 글을 쓰다보니 하지만 이란 말을 자주 쓰게 된다. 그만큼 번잡한 역사라서 그런가)
 
이 사마경도 결국엔 똑같은 놈이었다.
 
권력의 맛이 정말 그런지는 모를 일이나, 사마경도 권력을 잡게 되자 순식간에 타락해버린다. 토목공사를 일삼고 사치에 빠져 흥청망청 노는데다
정치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이었으니 오죽했으면 그의 숙부, 평원왕(平原王) 사마간(司馬幹 : 사마의의 막내아들로서 사마사, 사마소, 사마주와는 동복형제)이 경고까지 한다.
 

"그대가 천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공적이오. 하지만 아직 내란이 끝난 것이 아니니 조심하기 바라오."
 
 
하지만(또 하지만) 쇠 귀에 경 읽기였고 사마경은 혼정으로 많은 이들의 반발을 사기에 이른다.
 
결국은 서기 304년,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애의 혼정을 이유들어 군사를 일으켜 장사왕 사마애를 쳐 주살한다.
 
말이 좋아 혼정을 빌미로 든거지 다들 저마다 하나씩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것일게다. 나중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몇 년에 걸쳐 사마경과 번왕의 연합군은 격전을 벌였고 낙양 근교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사마애는 사마월의 기습으로 불에 타 죽였다는데..
 
나중에도 그렇지만 이렇게 무한루프다. 한놈이 권력을 쥐고 맛이 가버리면 다른 놈들이 와 족치고 흩어지고, 그 다음 사람이 똑같이 난리피우면 또 다시 족치고 흩어지는..
 
 
- 마지막 싸움과 종결 -
 
 
사마경의 후임이 된 번왕은 성도왕 사마영이었다. 
 
사마영은 혜제 사마충으로부터 황태제로 책봉되어 후계자로서 내정받고 승상이 되어 군림하게 된다.
 
근데 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같은 쿠데타의 주인공, 동해왕 사마월이었다.
내심 사마경의 후임자리를 기대하고 있던 차에 순 엉터리(사마월 기준) 논공행상에다 웬 뚱딴지 같은 사마영이 일등공신으로 책봉되어
온갖 후한 대우는 다 받게 되니 속이 뒤틀리고 만 것이다.
 
불만이 가득했던 사마월은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 : 사마염의 막내아들)이란 황족과 더불어 혜제 사마충의 밀명을 핑계삼아 사마영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마영 역시 만만찮은 대응을 보여주어 쌍방의 군대는 수차례 격전을 벌였고 한때는 사마월이 패해 봉국인 동해(東海)국까지 쫓겨가기도 하지만, 여러 군벌(여기서 여러군벌들은 나중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재기하여 사마영을 재공격하여 궁지로까지 몰아넣는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각숨죽이고 번왕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군벌들과 번왕들의 부하들은 제각기 섬기는 주군을 위하여 각지에서 똑같이 편을 갈라 싸우니 전국이 시끄러웠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사마영은 낙양을 심복장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혜제를 끼고 장안(長安)으로 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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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과 장안은 가깝다.
 
헌데 장안과 그 일대의 지방인 관중(關中) 일대는 하간왕 사마옹의 영역이었다라는 것이 함정이었다. 원래 사마옹은 사마월과 사마영의 싸움에서 사마영의 편을 들고 있었으나 사마영이 패해 속절없이 쫓겨오자 슬몃 다른 생각을 품은 것.
 
사마옹의 배반으로 사마영은 꼼짝없이 붙잡혀 감금되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남은 일은 사마월과 사마옹, 마지막 두 세력 간의 싸움 뿐이었다.
 
사마월과 사마옹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기록의 구절을 통해 요약하겠다.
 
사마옹은 질보를 안정태수로 삼고 장방의 머리를 사마월에게 보내 화의할 것을 청했지만, 사마월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장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곡관으로 들어오자 사마옹은 후회하면서 질보의 목을 베었다. - 진서
 
누가 누구고 왜 누구의 목을 베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다만 보시는 바와 같이 사마옹이 사마월에게 자신의 부하를 죽여 그 머리를 바쳐가면서 까지 화의를 구걸해도 사마월이 쌩깠다는 것만 보시면 된다. 즉, 싸움은 사마월의 승리로 끝났다는 얘기다. 이때가 어언 서기 306년 되겠다.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관중지방도 손에 넣은 사마월은 의기양양하게 처음부터 사마옹의 포로신세였던 사마영과 사마옹, 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사마영과 사마옹은 쓱싹....해치워 버리고는 혜제를 다시 옹립했다. 물론 사마영과 사마옹의 일족도 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참고로 사마옹의 최후는 이렇다.
 
광희(光熙 : 306년 경의 연호) 원년, 12월에 사마월이 천거하자 사도가 되었고 남양왕 사마모가 그의 장수인 양신을 파견해 신안에서 맞이하게 해 죽이도록 했는데, 사마옹은 수레에서 내렸다가 양신이 손으로 목을 조르자 죽었다.
 
그러던 중 306년, 혜제 사마충이 급사한다.
 
'급사' 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갑작스레 죽은 것인데, 기록에는 사마충이 사마월이 올린 떡을 먹고 앓다가 죽었다고 되어있다.
정황상 당연히 사마월의 독살이라는 얘기가 퍼졌고 오늘날에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 죽였는지는 안봐도 훤하다.
 
그렇게 백치황제였던 사마충은 4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언급은 안하고 있었지만 이 팔왕의 난 동안 사마충은 수모란 수모는 다 겪었다.
예전 편에서도 얘기한 혜소라는 신하와 함께 도망가다 면전에서 자신을 지키려던 신하가 죽는 꼴도 봤고 유폐되고 감금되는 것은 다반사요, 풀숲에 숨어 있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얼굴에 화살도 몇 대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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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제 사마충.
한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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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안습하다 할 수 있겠는데..
 
아무튼 이 혜제 사마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예장왕 사마치였다.
 
사마월과 함께 사마영에게 덤볐던 그 인물이다. 사마월은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은 거부하고 이 사마치를 적극 밀어주며 추천했다. 
 
그리고 황족들의 지지를 얻어 즉위하니 이가 곧 진(晉)의 제3대 황제, 회제(懷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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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제 사마치 초상화.
즉위했을때는 24살의 젋디 젊은 나이였다.
(서기 284년 생. 즉위시기는 307년)
 
 
서기 307년의 일이다. 그리고 연호를 '영가(永嘉)'로 개원하니...
 
훗날의 헬게이트를 예고하게 된다.
 
 
- 팔왕의 난 종결 -
 
 
결론부터 말해 사마염의 25명의 아들들 중, 막내아들인 사마치(司馬熾)만이 살아남아 황제가 되었다.
사마염만의 아들들이다.  다른 황족들의 후손들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으며 확인할 필요조차 없이 거의 대부분이 해를 봤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마염은 통일 이후, 더이상의 전쟁은 없다 여겼는지 제국의 병력을 대폭 감소시켰고 가뜩이나 부족한 차에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은 이 내전을 통해 거의 갈려나나갔고 진(晉)의 국방력은 크게 감소한다.
 
시기상으로는 초왕 사마위와 여남왕 사마량이 정변으로 죽은 291년 경을 팔왕의 난이 시작된 때라 본다. 그리고 회제 사마치가 등극한 때인 307년을 그 종결점으로 보는데, 시기상으로 보면 무려 15여년에 걸쳐 내전을 벌였다는 얘기가 된다. 15년간의 내전이니 그 피해가 오죽할까.
 
그렇다고 전쟁의 주축이 된 각 번왕들이 거느린 병력의 규모가 적어 내전의 스케일이 작았냐, 그것도 아니다. 예전 글에서 써놓았듯, 적게는 1천명, 많게는 5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수천, 수만여명의 병력이 죄다 이 난으로 소모된 것이다.
 
이 난으로 죽어나간 인재들도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의 쟁쟁한 신하며 학자, 사상가, 나아가서는 예술가들까지 어떻게 되서든 난에 연루되어 해를 당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남았더라면(물론 역사엔 IF가 없는 법이지만) 정치, 문화, 예술 면에서 어떤 발전을 이루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오(吳)의 명장이었던 육손(陸孫)의 손자요, 역시 말기 오나라의 명장이었던 육항(陸抗)의 아들들인 육기(陸機), 육운(陸雲) 형제가 그러하다. 이 두 형제 모두 고명한 학자들이었는데 제왕 사마경을 섬겼다가 사마경이이 죽으면서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한마디로 국력을 내전으로 크게 소모한 케이스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팔왕의 난이 낳은 최대의 결과는 영가의 난이 되겠다.
 
단순 국방력이 약화되었다는 이유만이 영가의 난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번왕들이 전란의 과정 중에서 부족한 병사 수를 채우고자
이민족 용병들을 마구 기용했다는 점도 한 몫했다.
 
이건 나중에 다루도록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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