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에 앞서서, 저는 이글을 전에도 몇번이나 쓰려다 말았습니다.
너무 막연하고 방대한 주제이다 보니, 두서 없이 긴 이야기가 되버렸기 때문에
끝까지 이어가질 못했고, 망설이다 지워버리곤 했습니다.
너무 많은 주장과 이야기를 인용해야 했고, 하나하나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래서 엄밀하고 정확한 논증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쓰려고 했고, 앞으로 쓸지도 모르는 글들의 서론 입니다.
철학에 들어서는 언저리에서, 우리는 항상 묻습니다.
'인간은 왜 존엄한가?'
여기에 대해선 수많은 이론이 존재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에게 신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믿었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성과 자유의지의 존재, 자아와 감정의 존재가 인간이 존엄한 근거라고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존엄한가?'라는 질문엔 너무 뻔한 전제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전제는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논증의 결론입니다.
마치 '해는 왜 동쪽에서 뜨는가?'하는 질문처럼 이미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의 원리를 탐구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은 왜 존엄한가?'를 묻기 전에,
'인간은 존엄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 질문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각 질문이 요구하는 답변을 생각해봅시다.
전자의 질문에는 '인간은 존엄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질문에는 '~한 것은 존엄하다. 그런데 인간은 ~하다. 따라서 인간은 존엄하다.'
라는 답변이 요구됩니다.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대략적인 논증 구조는 얼핏 비슷해 보입니다.
질문들을 논증하는 핵심은 결국 '존엄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질문은 결론을 미리 상정함으로써 인식의 프레임에 거대한 왜곡을 가져옵니다.
인간이 존엄함을 먼저 선언하고, 존엄의 근거를 인간에서 찾고있기 때문입니다.
그점은 우리가 '인간은 왜 존엄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함께 던지는 아래의 질문들에서 좀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무엇이 인간을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만드는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이것은 논증의 단계들을 뒤섞어 아래와 같은 순환논증을 낳습니다.
인간은 존엄하다. 왜냐하면 ~한 것은 존엄하기 때문이다.
~한 것은 존엄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 논증을 방지하기 위해,
논증의 단계들을 구분한 질문은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존엄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존엄한가?'
그러나 인간에 선행하는 존엄의 조건을 찾으려는 시도는 인간과 존엄에 대한 선험적 인식과 충돌합니다.
이를테면 '생명이 있는 것은 존엄하다'는 가정은 인간이 짚신벌레에 비해 가치 있는 (더 존엄한)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한편 '이성과 자유의지가 있는 것은 존엄하다'는 가정은 왜 시체조차 존엄하게 여기며 존중받기 바라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존엄'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하고 결론을 도출할 때, 우리가 선험적으로 내리는 결론과 모순이 생깁니다.
결국 인간을 떠나서 존엄을 이해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왜?'를 설명할 수 없어도'인간은 존엄하다'는 결론에는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징한 사실이 아니지만, '우리는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명징한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인간은 왜 존엄한가?'도 아니고, '인간은 과연 존엄한가?'도 아니고,
'왜 인간인가?' , '왜 인간만이 특별하게 여겨지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더 이상 인간, 그리고 존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