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군인
미국 보다 한국에서 더욱 사랑받는 아니 신격화 된 군인 맥아더
미국민들 조차 왜 한국이 그렇게 신격화 하는지 이해 못하는 인물 맥아더
이 글은 맥아더에게 잔뜩 끼여있는 거품을 걷어보자는 취지의 글입니다.
1. 6.25 개전과 맥아더의 첫번째 실책
6.25 전 당시 막 생겨난 CIA와 미정보사에서 교육시킨 한국군 최초의 특수부대라는 켈로부대는
38선과 만주를 넘나들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온갖 정보를 수집합니다.
징후는 명백했습니다. 소련으로 부터 전차와 야포등 대규모 장비가 들어와 배치되고 있다는 것
인민군이 대규모 도하훈련을 개시했다는 것
철로의 대대적인 정비와 보수......이건 무언가 대규모의 물자 수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38선 근방으로 병력이 대규모로 이동하고 배치되고 있다는 것
비단 CIA나 켈로부대만이 아니었습니다.
38선을 넘어 남으로 온 수많은 피난민들 역시 공통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사실이었죠.
뭐 쉬쉬하고 은밀히 진행되는 일이 아니라 아예 노골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요.
허나 당시 일본을 비롯 남한과 필리핀등 극동지역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하던 맥아더와 그 사령부는
이 정보를 깡그리 무시해 버립니다.
이 지역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맥아더가 이 정보를 무시해 버리니 워싱턴 정부역시 마찬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전쟁 징후는 없다.........이게 결론이었죠.
이 정도로 노골적인 전쟁 징후를 맥아더가 개무시해버린 덕에 훗날 맥아더가 정말 모르고 그런거냐 아니면 알고도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냐는 논란에 대한 첫번째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죠.
그시각 남한 정부는...............말을 맙시다.
이 글에서 승만이까지 거론하면 늘어날건 욕밖에 없으니
2. 김일성 위에 맥아더 맥아더 위에 모택동
이렇게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개시된 전쟁은 이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인민군의 파죽지세로 이어집니다.
허나 한국 전쟁의 판도를 가른 첫번째 장소 바로 운명의 낙동강 방어선이 기다리고 있었죠.
당초 늦어도 8월초면 전쟁이 끝날거란 원조 북돼지 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유엔군의 참전 미군의 대대적인 화력투사로
전선은 낙동강에서 고착화 되어 버립니다.
인민군은 어떻게든 8월안에 낙동강을 넘어 부산을 함락시키려 했지만 이미 공세종말점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병력과 물자가 소진되어 가는 인민군과 달리 연합군은 미군의 물자와 항공지원 화력투사등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죠. 공세는 인민군이 계속 취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 시점에서 전력 차이는 명백하게 차이나게 시작한겁니다.
문제는 연합군이 어느시점에 전황을 반전시킬 공세를 취하냐는 것이었죠.
8월이 다 지날무렵 김일성은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진격이 멈춰버린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할 방법을 모택동에게 구하기 위함이었죠.
모택동은 사절단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합니다.
첫째
전선이 고착화 되고 있다는 것 부터가 이미 연합군과 인민군의 전력 균형이 연합군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뜻이며 이는 머지않아
연합군이 상황을 반전시킬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연합군의 대공세는 필시 상륙작전의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후보지는 인천 혹은 원산이다.
즉 이 시점에 이미 모택동은 상륙작전이 일어날것 그리고 그 최중요 후보지중 하나가 인천이 될 것이다라는 것까지 파악을 해둔 것이었습니다.
셋째
지금은 공세를 취할것이 아니라 예비대를 이용해 방어전선을 구축해야 될 시점이다.
한편 모택동은 북한의 사절단이 다녀간뒤 한국전쟁에 참전할 것이냐를 두고 논의에 들어갑니다.
당시 공산화에 성공한 중국은 그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고 동맹국인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였습니다.
허나 상대가 누굽니까? 바로 미국입니다. 애초에 계산기 두들겨 전력차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나라입니다.
대신 모택동은 중국과 미국의 전력차를 논하지 않고 그 머리 즉 맥아더란 인물에 집중합니다.
다각도에서 들어온 정보를 취합한 결과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게 내려집니다
맥아더는 오만하다 독불장군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국도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맥아더가 오만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적이 오만하면 오만할수록 패퇴시키기 쉬울 것이다."
중국의 참전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3. 인민군의 9월 공세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모택동의 충고는 하나하나가 전쟁 상황 전체를 관통하고 동시에 인민군에게 가장 필요한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였습니다.
허나 이빨까기는 9단이어도 전쟁에는 문외한인 우리 1대 김돼지는 게릴라 전술의 달인인 모택동의 충고를 전혀 듣지 않았죠.
대신 후방의 예비대까지 전부 끌어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 점령지에서 강제징집한 사람들까지 동원해 낙동강 전선 전역에
9월 공세를 개시합니다.
그러나 이미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인민군은 낙동강전선을 뚫을 화력이 없었습니다.
또한 훗날 종전후 북한 내부에서도 전쟁 실패의 원인중 하나로 지목된것이 바로 현지에서 무리한 강제징집으로 인해 전력이
강화되기는 커녕 오히려 약화되었다는 점이었죠.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못받고 물자도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전쟁에 참여할 동기부여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국군이 자원 혹은 강제징집한 학도병들이야 그래도 내 나라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라도 있었지 인민군에게 강제징집된
사람들은 그럴 이유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오합지졸들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전력은 오히려 약화되어 버린것이죠.
그리고 운명의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납니다.
5천대1 맥아더 조차 성공을 의심하던 인천상륙작전은 너무나 쉽게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 작전의 대성공으로 인해 맥아더는 한-미 양국에서 전쟁영웅으로 그의 일생 무엇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맥아더는 그가 애초에 구상했던 계획인 인천에 상륙한 병력과 때를 맞춰 낙동강방어선에서 반전 공세를 취한 연합군을
이용해 인민군을 샌드위치 압살시키는 전술을 구사 대대적인 성공을 하게 됩니다.
만역 김일성이 모택동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공새를 중지하고 방어전선을 형성하고 무엇보다 인천에 상륙을 막을 방어선을 굳건히 했다면 전황은 어찌될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썰물이 되면 애초에 상륙 자체가 불가능한 인천의 특성상 반나절만 상륙을 저지할 힘이 있었어도 역사는 어찌 돌아갔을지 장담할수가
없었죠. 전쟁이 몇년을 더 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히도 김일성은 전황을 꿰뚫어보고 전략을 구사할 위인이 못됐습니다. 그게 우리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었죠.
하여간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은 맥아더에게 인생 최대의 영광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성공은 맥아더의 군인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4. 연합군의 쾌속진격 그리고 참패
38선을 돌파한 연합군은 뒤는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듯 쾌속 진격을 하고 있었습니다.
맥아더에게 이 전쟁은 더이상 끌 가치도 없는 다 이긴 전쟁이었고 진격의 속도를 조절할 이유같은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대 여기에 발밑에 감춰진 함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보급과 겨울이었죠. 도처에 산이 있고 도로망도 부실한 한국은 보급선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대대적인 항공화력으로 사방이 초토화 된 상황에서 보급은 진격의 속도를 따라갈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가온 즉 동장군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죠.
연합군 대다수는 한국에서 이런 추위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50년 그해는 한반도의 혹독한 운명만큼이나
차가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0월을 넘어서자 이미 영하의 날씨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11월에 이르러서는 연합군이 전선을 형성한 지역은 영하 20~30도를 넘나드는
혹한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추위에 시달리고 동상에 걸리고 폐병 같은 질병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허나 맥아더는 속도를 조절하고 보급을 정비하고 할 생각이 전혀 없었죠.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다 이긴 전쟁인데
거기에 원래부터 오만한 그에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로 이런 문제를 제기할 사람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10월이 되자 연합군은 각 교전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중공군 포로들을 잡기 시작합니다.
중공군은 이미 8월말에 북-중 국경지역에 30만의 병력을 전개시켰고 연합군의 반전공세가 시작되자 북한 각 지역으로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병력을 침투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공군이 10월이 되자 연합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고 포로로 잡히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거죠.
그러나 맥아더는 예상대로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일체 부인해버립니다. 만약 맥아더가 여기서 마음을 조금만 달리해서 중국의 참전을
가능성 있는 일로 판단하고 병력과 보급을 정비하고 전선을 단단히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했다면 이후 전황은 또 달라졌을겁니다.
전선의 장교들 역시 일제히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 가능성을 주장하며 맥아더에게 진격 속도를 늦출것을 요구했지만 맥아더는 그런 그들의
요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잡혀온 중공군은 자신들이 의용군이라고 답했습니다. 의용군은 의용군이 맞죠. 실제로 이들 다수는 자신들이 성공한 공산혁명의 열기에
취해 같은 동맹국을 돕고자 중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이들이 공산당 수뇌부로 부터 지휘를 받고 숫자가 30만에 달한다는게 문제였지...................
모택동이 중공군에게 내린 지시는 간단했습니다.
교전을 피하고 연합군을 최대한 끌어들여라............이렇게 30만의 중공군이 연합군의 배후로 옆으로 자리잡는동안 맥아더는 줄기차게
중국놈들 참전못함이란 자신감에 넘쳐 홈 바이 크리스마스 즉 크리스마스는 집에서라는 진격작전을 지속합니다.
이때 맥아더는 배후로 중국군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으면 역사상 최악의 학살극을 경험할거라는
아주 자신만만한 그러나 현실 파악도 못한 발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꿰뚫어본 모습 그대로였죠.
그리고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 속에서 미군 병사들이 조금만 참으면 집에 간다는 희망에 부풀어 본국에서 공수된 얼어붙은 칠면조고기를
씹으며 맞이한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11월 24일, 중공군 따위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보고를 맥이더가 워싱턴으로 보낸 불과 3일뒤
전 전선에 걸쳐 30만의 중공군이 대대적인 파상공세를 취합니다.
집에 갈 생각만 하고 있던 연합군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가뜩이나 보급부족과 강추위에 시달리며 골골대던 그들은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한채
혼비백산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인해전술 이라는 단순무식함의 대명사로 보이는 중공군의 이 전술은 사실 대단히 효과적인 심리전술이었습니다.
이들은 교전보다 전선을 관통 연합군을 사방으로 찢어놓는데 주력했고 그 결과 미군은 창설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길고 혹독한 퇴각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수많은 병사가 추위와 질병으로 쓰러졌고 중공군의 숙소로 제공될수 있는 곳을 없애기 위해 퇴각지에 있는
모든 민가를 불태워야만 했습니다.
승리의 상징이었던 맥아더는 이제 자신의 교만함으로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불러온 장본인이 되었고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대통령으로 가는 일방통로가 될 줄 알았던 한국전선은 군인 맥아더의 모든것에 종지부를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5. 마지막 발악, 그리고 역사속으로 사라진 장군
맥아더는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1월24일 대공세로 참패를 당하며 후퇴하고 있는 와중에도 맥아더는 연설문을 통해 승리가 목전에 있었는데 중국때문에 후퇴한다는 요지의
말을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그런대 그 수많은 가능성을 다 무시하고 어떠한 대비도 하지 않은채 영광에만 도취되어 패배를 불러온 장본인은 바로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습니다.
종전보고만 기다리던 워싱턴도 패닉에 빠지긴 매 한가지였습니다.
불과 얼마전 항상 으르렁 거린던 견원지간이었던 맥아더와 트루먼에 오랜만에 전에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종전이후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는데
느닷없는 중국의 참전과 최악의 철수작전은 이들을 멘붕상태에 몰아넣었죠.
그리고 맥아더는 이점을 이용해 다시 한번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바꿀 최후의 찬스를 노립니다.
바로 만주폭격, 핵무기 사용이었죠. 최악의 패배속에서 맥아더가 선택한건 확전이었습니다.
멘붕에 빠진 트루먼은 맥아더의 이 말에 넘어갔고 기자회견을 통해 무기고의 모든 무기를 사용한다 즉 핵무기 사용을 시사하는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전세계 언론은 미국이 핵무기를 한국전에 사용할것이다라는 대서특필을 하게 됩니다.
또 한번 핵무기가 사용될 아니 그것을 넘어 5년만에 세계대전이 벌어질 직전의 상황에 다다른 것이었죠.
그때 영국의 수상 애틀리가 워싱턴으로 급히 날아옵니다.
트루먼을 만난 애틀리는 맥아더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 즉시 3차 셰계대전이 일어날거라 충고합니다.
한국전에는 소련이 무기를 대고 중국이 참전했으며 중국과 소련은 동맹관계 였으니 미국이 중국에 핵무기를 사용하면 소련도 참전하고
이는 또 다른 핵보복 공격과 유럽까지 전쟁에 휘말릴거란 말이었죠.
물론 애틀리의 이 발언은 유럽이 전쟁에 휘말릴것을 가장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핵전쟁에 대한 공포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제서야 트루먼도 정신을 차리고 핵무기 사용은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나 맥아더는...........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개전때 부터 줄기차게 우리도 참전시켜줘 타령을 하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동원해 그들의 노새를 이용해 보급을 하자는
웃기지도 않는 주장을 하고 있었죠. 물론 장개석의 속셈은 미국을 이용해 본토를 회복하자는것 뿐이었습니다만 워싱턴은 노새따위 한테
힘을 빌리고 패하느니 차라리 그냥 패하겠다는 말로 이를 씹어버렸고 이때부터 맥아더와 워싱턴 행정부 사이의 관계는 최악에 다다릅니다.
이미 전선의 지휘는 맥아더가 아닌 신임 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에게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행정부 뿐 아니라 미군 전체에서도 강력한 신임을 받는 야전군 사령관이었고 리지웨이는 부임 즉시
도쿄에 있던 맥아더를 만나 자신이 전선을 지휘하는 것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아달라는 사실상의 통보를 하고
맥아더가 망쳐버린 전선을 빠르게 수습하고 반격을 시도합니다.
이때 왜 맥아더가 도쿄에 있었을까요? 애초에 맥아더는 한국전 내내 거의 도쿄에 머물고 있었으니까요.
맥아더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본래부터 별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아버지의 뿌리인 필리핀(맥아더의 아버지는 필리핀 총독이었고 맥아더는 필리핀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맥아더가 늘 쓰고다니던 원수모는
바로 필리핀군 원수모였죠), 자신이 신처럼 군림했던 일본, 그리고 중국 공산당을 몰아내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믿었던 맥아더에게 애초에 한국은
관심밖이었습니다. 맥아더가 왜 한국전 개전징후와 중공군 참여징후를 모조리 무시했냐 도대체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징후를 왜 다 무시할수 있었느냐? 라는 질문에 일부 학자들이 처음부터 중국을 노렸기 때문이라고 가설을 세운것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뭐 진실은 누구도 모르지만요.
이미 전선에도 손을 뗀 맥아더는 줄기차게 확전을 주장합니다.
아무리 원수고 군의 영웅이라고 해도 결국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 군인신분인데 맥아더는 줄기차게 워싱턴의 자중하라는 요구를 씹어버립니다.
워싱턴이 대전략을 수립하고 맥아더는 그것을 따르라는 요구에 대전략은 내가 수립한다고 받아치고, 언론에 대고 트루먼을 씹고, 자신의 동료나
친구들에게 편지로 트루먼을 욕하고 하여간 이 시기에 맥아더가 워싱턴 행정부의 명령을 씹어버린 것만 6차례 였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맥아더는 장개석과 만나 미 해군으로 중국 해안을 봉쇄 포격하고 본토에 핵공격을 하고 국민당 군대를 상륙시켜 중국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헛소리를 한 끝에 파면되고 맙니다.
귀국한 맥아더는 수많은 인파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의회에서 연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정말 그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죠.
그가 꿈꾸던 대통령은 끝끝내 될수 없었고(이미 44년과 48년 공화당 경선에 나가 참패한바 있고 이후에도 대통령이 되고 싶은 야심을 끝없이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뭐 한국전이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면 모를 일이었죠.)트루먼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건 아이러니 하게도 한때 그의 부관을 지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였습니다.
훗날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에 충격적인 내용이 실렸는데 그건 바로 아이젠하워가 당선된 뒤 맥아더와 만난 자리에서 맥아더가 38선에 원폭과 방사성 코발트물질을 이용해 방사능필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고 아이젠하워는 잠시나마 정말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었다는 이야기였죠. 뭐 이전에도 중공군 참전 이후에 핵공격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맥아더였으니 충분히 그럴만도 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