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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부채는 어떻게 절멸했고 어떻게 부활하였는가
게시물ID : humorbest_12917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주전자님
추천 : 210
조회수 : 6002회
댓글수 : 12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8/09 23:01:59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8/09 16: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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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하면 흔히,

"그거 바람만 잘 나오면 됐지"
"부서지면 버리는거 아냐?"
"합죽선? 뭐시 이케 비싸당가?"

라고 생각하시는데 요즘에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에어컨이나 선풍기 등이 들어오기 전 옛날에는 부채가 일상이었습니다.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늘로 숨거나 시원한 물에 들어가거나 아무것도 안하거나(?) 바람 쐬거나 하는 정도죠.
하지만 그늘이나 시원한 물이 어디든지 있는 게 아니니, 손에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부채가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대신해 줄 수 있습니다.

부채를 만드는 좋은 재료는 대나무인데, 가벼운데다가 가늘게 뽑아도 부러지지 않는 꼿꼿함을 자랑합니다.
대신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모 드라마에서는 대나무가 곧긴 한데 기둥으론 못쓴다며, 대나무처럼 지조있다는 선비들을 디스 하기도 하죠.

부채는 여름의 귀중한 파트너여서, 양반 서민 할것 없이 모두가 애용하는 기물이었습니다.
애초에 대나무라는 녀석 자체가 음기를 뿜어대서 그 자체로 시원한데다가 그걸로 부채를 만들었으니 더욱 시원할 수밖에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바닥에 깔면 시원해지는 대발, 죽부인 등이 이 대나무의 강려크한 시원함을 말해 줍니다.
여기에 또 음기가 있는 한지까지 합해지니 그 시원함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고려 유물을 보면 무려 금속으로 된 접부채 유물이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비록 겉대 뿐이지만 그 모양은 접부채의 그것이죠.
제가 가지고 있는 도록에는 은덩어리라고 하는데, 진짜 은덩어리인지는 둘째치고 어떻게 그걸로 부채 만들 생각을 했는지는 넘어가고...


저는 접부채, 특히 합죽선(合竹扇)과 칠접선(漆摺扇)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태극선 같은 단선(團扇, 접히지 않는 둥근 모양의 부채. 방구부채라고도 합니다)은 이 이야기에서 빠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나무와 한지를 결합한 접선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즉, 대나무로 살을 만들고 한지로 선면(부채의 종이 쪽)을 만들면 아주 좋겠다 생각한 모양인데 이게 기발한 것이, 한지는 닥나무의 섬유질이 그대로 있어서 많이 접어도 찢어지거나 갈라짐이 늦습니다. 바람을 일으키는 재료로서는 안성맞춤이죠. 여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부수적인 문제가 뒤따릅니다. 대나무를 부채 형태로 가공하는 것도 어렵지만 보통의 대나무를 쓰면 물러져서 얼마 못갑니다. 그래서 질 좋은 대나무를 구해야 되는 것도 일이고, 좋은 한지를 구하는 것도 일입니다. 한지를 구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접었다 폈다 하는 접선의 특성 상 한지는 반드시 헤지게 되어 있고, 한지를 주기적으로 갈아 줘야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 즉 유지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 접선은 서민들이 마구 쓰지는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접선이 최종 형태로 진화된 게 바로 합죽선과 칠접선입니다.

* 일본이나 중국 부채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부채는 종이만 교환해서 평생 쓸 수 있게 만들어진 견고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장인들은 항상 예술적 미학과 실용적 가치 둘 다를 놓고 기술적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 나오는 합죽선들은 대량생산품이라 2-3년만 지나면 모양이 다 틀어지지만 하나하나 손으로 다 작업했던 옛날 부채들은 그러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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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기동 선자장 작품


접선에 무슨 짓을 했느냐면,

1. 기존 접선은 부채 속살을 대나무 속살을 켜서 사용했는데, 합죽선이란 놈은 대나무 껍질만을 얇게 켜서 그 껍질 두 쪽을 민어부레풀로 맞붙여 버립니다. 우리나라 대나무 껍질은 탄력있고 육질이 치밀한데, 그걸 두 쪽을 붙였으니 속살을 한 쪽 쓴 것보다 강도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합죽선 속살을 대충 보면 이게 대나무 껍질이 붙어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해집니다.


2. 겉대에 분죽이라는 대나무를 합죽하고 여기에 낙죽(烙竹)을 하였습니다. 낙죽이라는 것은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를 지져 그림을 그리는 기법인데, 낙죽 또한 전통공예 기법 중 하나입니다. 이 예술성을 부채의 겉면에 치장하여 아름다움을 배가시켰습니다. 분죽이라는 대나무 또한 무르지 않아 부채의 모양이 쉽게 변형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모르겠는데 속살에 여러 가지 낙죽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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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죽의 궁극에 다다르면 이런 걸 하기도 합니다 ㅎㄷㄷ....


3. 부채를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접었을 때 부채 끝부분은 가느다랗다가 밑으로 내려갈수록 부풀어지고, 또 고리로 갈수록 홀쭉해집니다. 이걸 대나무로 한다는 겁니다... 대나무는 그 꼿꼿한 성질 덕에 곡선이 잘 안 잡히는데 이걸 하고야 맙니다...무서운 사람들. 그래서 속살도 그에 맞춰 고리 부분은 얇게 깎습니다. 다른 부채도 아니고, 대껍질 두 쪽을 맞붙인 속살로 만든 합죽선에 이런 걸 했다는 겁니다. 당연히 엄청나게 정밀한 기술을 요하는데 이 때엔 이걸 전부 수공으로 작업했습니다.



칠접선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1. 속살에 옻칠을 합니다. 칠접선은 합죽선처럼 대나무의 껍질로 부채살을 만드는게 아니기 때문에 강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를 옻칠을 함으로써 해결합니다. 옻칠 특유의 항균성, 내수성은 덤으로 얻었죠. 당시엔 옻칠 자체가 귀한 재료라서 나라에서 부채에 옻칠 바르지 말라고 몇 번 이야기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근래에 보이는 유물들을 보면 옻칠한 부채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쪽으로 말 안듣는 건 양반님네들이 한 몫 하는 것 같네요.

2. 재료 사치의 궁극 - 대모(매부리거북)의 등딱지, 우각(물소뿔), 반죽 등을 부채에 치장했습니다. 갓끈이나 관 등에 이런 재료를 잘라서 쓰기는 합니다마는 부채에 사용한다고 하면 그 기법이 달라집니다. 해당 재료를 얇게 종잇장처럼 켭니다. 그리고 부채의 겉면에 말아서 붙입니다.
대모는 그 자체로 엄청나게 귀한 재료고 우각은 보통 물소뿔을 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물소를 기를 수 없는 환경이라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물소뿔은 흑각궁의 주요 재료로도 쓰이죠? 흑각궁은 아주 귀한 무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재료들을 종잇장처럼 켜려면 갈려 나가는 재료 때문에 낭비가 심해집니다. 영조실록에는 누군가 대모로 부채를 만들었다가 왕에게 혼날 뻔한 이야기도 전해질 만큼 귀했습니다. 반죽은 전주 지방에서 나는 얼룩무늬 대나무인데 그 수가 귀해서 왕실에 진상했다 합니다. 그 외에 기상천외한 기법을 겉대에 부려 여러 치장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에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 후기 부채는
화각공예 (우각, 대모 등) + 목공예 (대나무) + 칠공예 (옻칠) + 금속공예(고리) + 한지공예 (선면) 에 서예 or 산수화 (글, 그림) 가 접목된 수공예의 최종테크
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때문에 부채 제작만 6개월 이상이 걸리는 흉악한 난이도를 자랑하여, 육방(六房)이라는 공정을 두어 각 공정 별로 부채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살 깎고 다듬는 사람 따로, 고리 만드는 사람 따로, 종이 붙이는 사람 따로 등등...이 각 공정마다 제 역할을 했죠.

부채의 이런 발전은 주로 돈 있는 사람들이나 재력가가 주도했습니다. 그들은 몰래몰래 장인에게 웃돈을 주고 좋은 부채를 만들어 달라고 했으니까요. 보통은 선자청이라 해서 부채를 납품하는 시설이 있긴 합니다만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런 부채로는 만족하지 못하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초중기부터 이 접부채들은 특히 중국 사신들이 좋아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몇 배를 남겨 먹을 수 있는데다가 무게까지 가벼워서 보따리에 둘둘 메고 돌아가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니, 한몫 챙기길 원하는 사신들에겐 이 부채들이 자기들의 비자금으로는 안성맞춤이죠. 이런 합죽선의 가격은 현재 가격으로 정확히 계산하긴 힘들지만, 한 가족이 겨울을 날 수 있는 가치라고 하며 대략 1천~2천만원 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양반들은 그 비싼 부채를 가지고 다니다가 술처먹고 잃어버리는 일도 있다죠... 요즘에야 합죽선 하나가 5만원 하는데, 이 합죽선 가격이 그 때보다 왜 이리 '똥값'이 됐는지는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요새 나오는 영화들을 보면 기생이 합죽선 잘만 들고 다닙니다만 이런 쪽의 고증오류는 한두건이 아니라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대모, 우각, 반죽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칠접선이 시대의 부요함을 증명하였다면, 합죽선은 고고한 선비의 자태였습니다. 끝이 다물어 있는 모양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며, 여성처럼 굴곡 있는 부채의 몸은 자신의 첩이라고 생각하여, 부채의 소유자가 죽으면 부장품으로 같이 묻곤 했습니다. 선비들은 이 부채의 종이 부분(선면)에 유명한 이들의 그림과 글을 받아 서로 자랑하곤 했지요. 임제라는 사랑꾼이 있었는데, 어떤 기생을 보고 반해 자기 부채에 이런 글을 써서 보냅니다. '한겨울에 부채를 보낸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넌 어려서 잘 모르지만 타오르는 가슴의 불길은 6월 무더위보다 더하지' 기생은 답을 합니다. '눈물도 불 못 끄는데 부채라니 어련하시겠수' 네. 퇴짜맞았네요.

그런데 글을 잘 보면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녔다는 걸 알 수 있다죠? 선비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녔습니다. 부채는 선비 의관의 마지막이었거든요. 특히 신분에 따라 그 형태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는데, 속살 38개 이상은 사대부가 쓸 수 있었고 속살 50개(종이가 백 번 접힌다 하여 백접선이라고 합니다)는 왕의 직계, 당상관 이상은 고리에 선추를 달 수 있었습니다. 헌데 제가 작년에 개인전시회에 가서 보니 속살50개 옻칠한 백접선 유물이 있더라구요? 어찌된 일인가 싶어 물어 보니 왕이 자신의 신뢰하는 신하에게 하사한 거라고 말해주시더랍니다. 그런 이야기도 있고, 돈 많고 양반의 신분을 산 상인들이 자기 과시를 위해 백접선을 주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조선시대 후기~말기로 갈수록 이런 구분이 무의미해지기 시작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영정조 시대를 지나 중인층이 부해지고 자신을 과시할 부채를 많이 찾게 되자, 공납할 대나무의 씨가 마르고 밭이 황폐화되고 더 못해먹겠다며 농민들이 아예 불을 지르고는 했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부채의 크기 및 기법 등을 엄격히 제한했지만 뒷구멍으로는 다 지들 멋대로 만들곤 그랬다죠...

그리고 일제가 이걸 두고보지 않았습니다. 수고스럽게 산의 정기를 찾아 쇠말뚝 박는 미1친놈들인데 부채인들 오죽할까요? 일제는 합죽선을 말살했습니다. 값싼 일본 부채를 대량으로 공급하여 기본 수요층을 줄이고, 양반 계급을 없애니 동시에 수요층이 적어져버린 합죽선은 저절로 그 화려한 기술의 대가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합죽선, 대모선, 우각선, 반죽선, 대륜선 등의 부채들과 그 전통 기법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잊혀진 부채의 기법은 다시 되찾아올 수 없을 걸로만 생각했습니다. 장인들은 책자로 기술을 전수하기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전수했었거든요. 그래서 사람이 사라지니 자연스레 기법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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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채. 후기~말기로 추정. 겉대를 얇은 대나무 껍질로 말아쌌고 속살엔 흑칠(옻칠), 선면엔 유칠을 한 귀한 유물.
선자장 엄재수 부채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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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대모선? 내각선? 외각선? 반죽선? 장인들은 이런 이름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안다고 해도 복원할 줄 몰랐죠.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부채는 그 화려한 기법을 다 잃어버리고 겉대에 마디를 올려 합죽한 합죽선만 그 명맥을 이어 나갔습니다. 1950년대 이후 부채 수요가 늘자 합죽선 또한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장인 김씨와 문씨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두 가문의 맥은 현재까지 이어져, 김씨의 맥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김동식 선자장으로 계승되구요, 문씨의 맥은 전북무형문화재 엄재수 선자장으로 계승됩니다.

그리고 기계의 도입과 더불어 합죽선의 모양 자체에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시대가 풍요로우면 부채도 커지고, 시대가 암울하면 부채도 작아지더군요. 그 일례로 영정조 시대 이후 부채가 엄청나게 커졌다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까지는 그 크기가 많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1950~1970년대 사이의 부채가 좀 작은 편입니다. 여튼 장인들은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부근에서 분업화하여 작업을 이어가게 되는데, 기계의 혜택을 많이 본 덕분에 합죽선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속살에 낙죽하는 방법이 편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인두를 숯불에 달궈서 하나하나 직접 그렸다면, 근래에는 쇠도장에 열선을 감아 찍어내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실제로 오래된 유물을 보시면 속살에 그려진 낙죽 모양이 조금씩 다른 반면, 최근의 합죽선들은 그 모양이 완전히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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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조선시대 말기 유물입니다. 흐릿하지만 딱 봐도 낙죽 문양이 조금씩 다르죠? 손으로 작업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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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최근 합죽선입니다. 속살의 문양이 완전히 똑같죠? 이게 쇠도장을 달궈 찍은 겁니다. 요즘 전부 이렇게들 합니다.
속살의 낙죽 변천사는 이렇습니다만 겉대에는 저렇게 할 수 없어 여전히 손으로 직접 그립니다.

합죽선을 고정하는 머리 부분의 구멍을 뚫는 방법도 예전에는 비비활대와 송곳을 이용하여 수작업으로 진행하던 것이 전기드릴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전기드릴은 아주 편한 도구여서 구멍을 순식간에 낼 수 있지만 회전수가 맞지 않으면 속살이 쪼개져 버리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회전수 조정으로 얼추 속살이 깨지지 않게 했습니다마는 이 드릴 도입의 과도기적 시기의 부채엔 머리 부분이 깨진 채 완성된 부채도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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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비비활대와 송곳인데, 비비활대라는 물건은 다시 봐도 생소하네요.

제일 중요한 몸통 마감 작업인데,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낫칼이라는 칼을 사용하여 몸통 부분을 부드럽고 수려한 곡선으로 다듬었습니다. 유물 합죽선들이 밋밋해 보여도 아주 미묘한 곡선처리기법이 들어가 있죠. 다 낫칼이라는 도구 덕분인데요, 이 작업은 부채 작업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합죽선은 쥘부채라고 부르는 접선의 일종이며 손 안에서 가지고 노는 기물입니다. 손노리개의 특성 상 그 기물이 손에 부드럽게 쥐여지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면 손이 심심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미묘한 곡선 처리를 모두 낫칼로 처리하는데, 근대에 와서는 사포와 모터를 이용한 연마기가 만들어져 머리에서 목살까지 일직선으로 쫙 밀어 버립니다. 따라서 곡선미는 사라지고 나무토막같은 재미없는 부채가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죠. 하지만 이 방법은 장점도 있습니다. 바로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죠. 작업시간이 1/3으로 줄어들고 훨씬 많은 양의 부채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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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곡선 부채, 아래가 직선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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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용 칼들. 손잡이 두 개가 달린 칼이 낫칼입니다.

근대에 와서는 부채 머리의 재료에도 변화를 주게 되는데, 베이클라이트라는 합성수지를 합죽선의 선두 부분에 사용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먹감나무, 소뼈, 소뿔 등 다양한 천연재료를 썼는데 이는 대구 도축장에서 구매한 소의 다리뼈가 곰탕 등의 식재료로 공급되면서 부족해져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최근에야 여러 선자장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옛날처럼 다양한 재료를 쓰지만 아직도 일반 합죽선에는 이 베이클라이트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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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부터 소뼈, 물소뿔, 먹감나무. 아래는 베이클라이트)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백동, 황동, 은합금 등 다양한 재료로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는 백동이 주류를 이루고 그 이후 70년대 말까지는 백동과 양은이 주류를 이루다가 현재는 황동만을 씁니다. 비싼 작품들은 은도 쓰기는 합니다마는 일반 합죽선에 들어가는 고리는 거의 전부 황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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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백동, 양은, 황동 사북(부채를 묶는 고리)


제일 큰 문제는 합죽선의 겉대 치장을 분죽이 아닌 맹종죽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맹종죽은 성질이 물러서 모양이 잘 틀어집니다마는 마디가 잘고 많아서 아름답게 보인다며, 합죽선의 가격은 마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라는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실제 유물을 살펴 보면 거의 대부분 마디가 몇 개 없는 분죽대에 치장하고 과하지 않게 깔끔한 낙죽 처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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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처럼 마디가 많을수록 가격이 높다는 이야기는, 엄밀히 말하면 전통 기법이 아닙니다. 이런 맹종죽이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양이 오래 못 갑니다. 심대가 더 강해서 부채의 겉대가 일직선으로 빨리 되돌아갑니다. 1-2년만 지나면 보통의 합죽선들은 앞이 벌어진 채 흉해집니다. 실제로 맹종죽으로 만든 합죽선 중 몇 년이 지나도 별 손을 보지 않았음에도 제대로 모양을 다물고 있던 부채는 제 기억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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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물에서 볼 수 있는 합죽선들은 이와 같이 마디 대가 얼마 없습니다. 낙죽도 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래 지났음에도 그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저 유물은 100년도 넘었는데 세월과 무관한 고고함을 자랑하더군요.



이렇게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 젊은 선자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으며, 당장 복원 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이제 곧 진짜 합죽선과 칠접선은 영영 문헌에서밖에 볼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쉽나요... 대모선, 내각선, 외각선, 반죽선...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자료도 없고, 재료도 없고, 기법도 몰라서 수없이 실패했습니다. 그에게는 좌절 뿐이었죠.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려 해도 이에 대해 아는 이도 없고, 그림 없는 글자로만 남겨진 합죽선의 명칭들이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유품을 뒤적이다가 기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부채의 도록을 찾아낸 것이죠. 그 곳에는 옛스러운 부채들의 모든 모양새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대모의 등껍질을 올리는 방법, 옛 부채의 곡선 등을 이 도록에서 찾아내게 됩니다. 여기서 희망을 발견한 그는 바로 작업에 돌입하려 했으나... 재료가 없었습니다. 대모는 최근 국제협약 때문에 거래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구할 수도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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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가 이렇게 생긴 녀석입니다. 매부리거북이라고도 부르데 이 녀석은 아직 덜 자란 새끼입니다만... 새끼임에도 등딱지가 굉장히 아름답죠? 이래서 예로부터 대모로 만든 물건은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만 요즘에 만든 대모 가공품을 본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죠)

그리고 그 선자장은 두 번째 기적을 맞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아주 오래 전에 준비하신 대모 등딱지 수십 장, 물소뿔 한 가마니, 소의 다리뼈 두 가마니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장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이 복원 작업을 준비하려고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선자장의 원대한 꿈은 대를 지난 후 그 빛을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무형문화재가 되었는데요, 부채 쪽에서는 최연소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 뭘 배웠겠어, 하고 코웃음치던 학자들도 그가 내놓은 부채들을 보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선자장들이 이 젊은 선자장의 작품에 자극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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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글쓴이의 견해입니다.

유물을 살펴 보면 유물 부채들은 몇 가지 기본이 있습니다.
- 합죽선은 겉대에 분죽대를 올린 유물밖에 없다
- 칠접선(접선)은 겉대에 화려한 치장(대모, 우각, 반죽 등) 을 했지만 합죽선처럼 분죽대를 올리기도 하였다.
- 겉대에 화려한 치장을 했을 시 대개는 겉대 전체를 덮는 말아싸기 기법을 사용하였다.
- 종이의 내구성을 올리려고 유칠(기름칠의 일종)을 하기도 하였다.
- 부채를 쥐는 이의 편의성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요즘 선자장들이 만든다는 부채를 보면 이 기본을 흐트러뜨리기도 합니다. 마디가 많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맹종죽을 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술이 모자란 탓인지 겉대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말아싸고서는 재현품이라는 말도 합니다. 외적인 미에 치우치다 보니 부채를 쥐었을 때 너무 투박합니다. 무형문화재들도 실수를 합니다. 무려 고려시대 재현품이라며 원본 유물이 없는 부채를 창조해 냅니다. 이것은 단지 부채를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그런 것뿐만이 아닙니다. 원본이 없으면 재현이라는 말조차 쓰지 말아야 합니다.

솔직히, 요즘 몇몇 무형문화재의 '공들인 작품'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이전 전통부채의 미학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됩니다. 지금 흔히 볼 수 있는 양산형 합죽선들은 마감을 제대로 하지 않아 손에 가시가 찔리고, 나무토막처럼 쥐기 불편합니다. 맹종죽을 써서 부채는 물러졌고 민어부레풀을 제대로 쓰지 않아 겉대가 들뜨기도 하지요.

사실 꼭 전통방식 그대로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드릴로 구멍을 뚫는 방법이 비비활대로 비비는 것보다 빠르고 부작용이 없다면 쓰는 게 훨씬 좋죠. 하지만 전통 부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전통이 아니게 되겠죠.

최근 무형문화재들이 제작하는, 합죽선에 대모나 우각 등을 치장하는 기법은 엄밀히 말하자면 창작품에 가깝습니다만 말아싸기, 곡선처리, 쥐는맛 등의 핵심 기법을 그대로 계승했다면 이는 창작품이라 할지라도 전통 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 글이 반응이 좋다면 외전편으로 좋은 부채 고르는 법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글 하나 쓰는데 어따 힘드네요. 그런데 이런 글은 베스트에도 못 갈듯 ^,.^;;;
출처 본인 + 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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