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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느 날, 오후 1
게시물ID : love_190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남
추천 : 0
조회수 : 24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2/26 23: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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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있는 순간부터 난 늘 학생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군대 다녀오자마자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붙었다. 야망이 없다며, 학교가 아깝지 않느냐는 주위 사람들의 타박이 있었지만 합격하니까 그 말들이 쏙 들어갔다. 처음으로 방학이 없는 한 해를 보내는 중이다. 비록 주5일제가 보장되는 신의 직장이라 칭송 받는 곳이지만 매일 출근 시간을 맞춰 준비하는 건 역시나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늘 주말을 기다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토요일이었다. 원래는 가족끼리 가까운 곳에 드라이브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약속 잡을 생각을 안했는데, 누나가 뜻하지 않게 배탈 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늘 이런 식이다. 처음부터 별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 누나가 아프지 않았다면 또 다른 이유로 약속이 없어졌겠지.

 내가 약속 잡아 놀러 가면 가족끼리 있는 시간이 적어짐에 아쉬움을 토로하시던 어머니지만, 그래서 가족끼리 약속잡고 어디라도 나가자고 하면 그건 또 여러 핑계를 만들어 미루곤 하셨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는데 일을 시작하고 나니 이제 알겠다.

 결국 원하지는 않았던 과도한 여유로움으로 가득한 주말이다. 원래는 이렇게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싫어졌다. 결혼적령기가 되고부터 조급증이 도져 걸핏하면 식구들에게 시비를 거는 누나를 피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게 머가 중요하랴. 난 뜻하지 않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과도한 여유로움이 생겼고, 그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누워서 하릴없이 졸다 깨다하니 잉여인간이 따로 없다.

 ‘나가야겠다. 일단 나가자.’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5시.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덥수룩한 수염이 눈에 띈다. 수염이 어찌나 빠르게 자라는지 하루라도 면도를 하지 않으면 산적이 따로 없게 된다. 깔끔하게 면도하고 샤워를 하니 내 의식을 짓누르고 있었던 ‘잉여로웠다는 죄책감’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얼마 전부터 가끔 끼기 시작한 렌즈도 한참 씨름한 끝에 겨우 착용을 마친다.

 곱게 다린 셔츠, 그 위에 니트를 덧입는다. 정장바지가 좋을까 면바지가 좋을까 하다 브라운 니트에 어울리는 면바지를 고르고 얼마 전에 한 댄디펌이 풀릴세라 조심스레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거울을 보며 생전 바르지 않던 스킨, 로션, 수딩젤을 순서대로 바르고 BB크림으로 마무리.

 ‘이 정도 얼굴이면 중간은 가겠다. 못 생긴 얼굴은 아니야’
 20대 남성이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본다는 자뻑도 잠시 해본다. 야상보다는 재킷이 어울리는 날씨다. 회색이 적당한 듯하다. 어제는 캐주얼화를 신었으니 오늘은 구두가 나을 법하다. 페라리 블랙으로 살짝 샤워하고 집 밖으로 나선다.

 “진우야 , 어디 가니?”

 뒤늦은 어머니의 물음이 들리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왜? 나도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작년 이맘때의 내 모습이 슬며시 떠오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하지 않은 곳이 없다. 외출할 때 항상 머리를 감았지만 수건으로 물기를 몇 번 털어내고는 그냥 나왔고 얼굴에는 그 흔한 스킨하나 바른 적이 없다. 렌즈 대신 안경을 대충 걸치고, 두터운 후드 티와 사철 내내 입고 다닌 청바지에 패딩 하나 걸치고 집 밖을 나섰을 것이다. 신발은 단연 운동화. 지난 세월 너무 무심하게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해야 했으니까.’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부모님과 함께 차를 골랐다. 지방에 근무지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중고차였지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차나 다를 바가 없는 차. 그 차에 몸을 실었다. 누구를 만날까? 이제부터 찾아야 한다. 카카오톡 대화목록을 살펴본다.

 방금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던 혜성이. 1학년 때 과외 했던 학생이다. 가끔 섹드립을 날려놓고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당돌한 제자였다. 나이 차이가 2살 밖에 나지 않아 그 말의 의도를 종종 헷갈려하곤 했더랬다. 매번 밥 사달라고 조르지만, 방금 전까지도 졸랐지만 지금은 서울에 있다. 대구에 있었으면 불러내서 밥 한 끼 사주었을 텐데 아쉽다.

 요즘 부쩍 친해진 은지. 원래 전해주어야 할 물건이 있어 만나기로 했지만 서로 시간이 잘 안 맞아 약속을 계속 미뤘다. 오늘은 친한 사람들이랑 생일파티 한다고 했었다. 점심 때 모임이 시작한다고 했지만 일찍 끝날 리가 없다. 지금쯤이면 파티의 클라이막스일 것이다.
 우찬이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종합병원 인턴이라 바빠서 나올 수도 없을 테고, 형식이는 중국 갔다가 오늘 밤에야 귀국한다. 한빛이는 나를 어장 관리하는 듯해서 연락하기가 싫다. 수의사 국가고시를 치고 한가로울 동진이에게 전화를 했다.

 “머하노?”
 “집에서 밥 먹는다.”
 “나온나, 탁구든 볼링이든 치자. 아니면 술 먹든지.”
 “싫다. 내 국시 떨어진 것 같다. 이번에 합격률 50%도 안 나올 것 같다. 합격발표 날 때까지는 집 밖에 안 나갈 끼다. 여친도 안 만나고 있구만.”
 “누구 만나든 안 만나든 니 합격이랑 먼 상관이냐. 그리고 여친은 여친이고 난 나지. 그냥 좀 나와. 야박하네.”
 “누가 더 야박하냐. 니는 그냥 내가 합격하기나 빌어도. 오늘은 못 나간다.”
 “니 떨어지라고 고사지낼 꺼다. 알았다 끊어라.”

 초중고를 같이 등하교 했었던 정재한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둔다. 얼마 전에 토익 준비 때문에 서울에 간다고 했었던 게 기억이 난 탓이다. 친한 선배에게 갑자기 전화하려니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고, 친한 후배는 저번 주에 만났었다. 또 부르면 잉여처럼 보일 것 같다. 스터디하면서 같이 취업에 성공한 멤버들에게 전화를 할까 했지만 포기한다. 갑자기 불러내기에는 다들 일정이 바쁘리라.
 ‘이렇게 만날 사람이 없나?’

 카카오톡에 가득 찬 친구목록과 당장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현실이 대비되어 더욱 처량하다. 이렇게 차려입고 집 밖에 나왔는데 도로 집에 기어들어가기에는 쪽팔린다.
 ‘일단 나서자.’

(계속)
출처 https://brunch.co.kr/@u149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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