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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을 넘어섰지만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 <황금의 제국>
게시물ID : drama_12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3
조회수 : 8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8/27 19:08:18

누구는 아버지를 보고, 누구는 신자유주의를 보고, 누구는 여성 캐릭터를 보고, 누구는 미드를 본다.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은 그렇게 다양한 층위를 가졌다. 여기엔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선인도 악인도 없다. 선악이 뒤섞인 인물들.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래서 도대체 누가 이길까? 게임과 게임과 게임의 끝에서, 승자는 서윤일까? 민재일까? 태주일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태초의 아비, 그리고 배신하는 아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장태주(고수)가 그렇다. 바야흐로 1990년대, 재벌 구도는 굳어졌고 계급의 사다리는 무너졌다고 모두들 생각한 때 태주는 높이 오르는 꿈을 꾼다. 서울 신림동 판자촌에서 황금의 제국까지. 쇼핑몰 부지에 알박기로 2평 땅을 사서 10억원에 팔아치운다. 땅을 사고 사기를 치고 재개발 농간을 부려서 돈을 불린다. 여기서 누구는 ‘다원’(적준)을 볼 것이다.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가난을 대물려받은 태주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가장 담대한 베팅을 하고 승자가 된다. 사다리의 끝에는 ‘성진그룹’이라 불리는 황금의 제국이 있다. 태주는 피칠갑을 하며 거기까지 간다. 그의 좌우엔 성진그룹 후계자 최서윤(이요원), 성진그룹을 집어삼키려는 최서윤의 사촌오빠 최민재(손현주)가 있다. 서윤도, 민재도 태주를 처음 만나고 묻는다. “당신 누구죠?”

≫ 태주의 비밀을 품은 여인 윤설희(장신영)는 끝까지 태주의 곁에 설까. 이들은 약속대로 필리핀 바닷가의 이층집에서 평온한 일상을 누리게 될까.SBS 제공

태초에 ‘아비’가 있었다. 평생을 피땀 흘려 마련한 밀면집을 재개발로 한번에 잃고, 철거민으로 저항하다 목숨까지 잃은 태주의 아비가 있다. 아비의 목숨값은 500만원. 명문대 법대생으로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한 태주는 아비의 죽음을 겪으며 사는 법을 바꾼다.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다른 사람도 있다. 성진그룹 최동성(박근형) 회장의 조카 민재다. 그의 아버지 최동진(정한용)은 형님 최동성 회장의 “마차를 끄는 마부”로 살아왔다. 민재도 태주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최동성 회장이 밀어넣은 감옥에서 민재의 동생 용재가 죽었다. 그러나 서윤의 아비, 최동성 회장도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만든 황금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그도 “피할 수만 있다면 제발 이 잔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하며 살았다. 동생과 조카들을 버린 순간도 그랬을 것이다. 무능한 오빠를 둔 서윤은 내키지 않지만, 아비의 제국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서윤의 잔이다. 초상화 속 추상 같은 얼굴로 가족의 암투를 지켜보는 최동성 회장의 자리를 지키고 빼앗기 위해 태주와 민재와 서윤이 달린다. 누가 아비의 자리에 오를 것인가?

무릇 상처를 가진 부모와 함께 싸우는 것은 동방예의지국 드라마의 불문율이었다. <황금의 제국>은 이것을 위반한다. 민재의 아버지 최동진은 좀체 아들의 곁에 서지 않는다. 서윤을 제거하고 형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민재의 발목을 번번이 잡는다. 아들인데도 말이다. 전쟁고아로 형의 학비를 벌기 위해 구두닦이를 하고 군인으로 형의 안전판이 되고 형과 함께 성진건설을 일군 최동진은 아우의 자리에 멈춰서 있다. 재벌 1세대인 그에게, 간척지를 메우고 용광로를 세웠던 개발의 추억은 피보다 진하다. 부자는 반목하고 모자는 갈등한다. 한정희(김미숙)는 최동성의 아내로 27년을 살았지만, 실은 첫 남편의 아내로 살았다. 독재의 시대, 최동성 형제의 고발로 남산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은 남편의 복수를 위해 그는 살았다. 죽은 남편이 남긴 차명 주식을 빼돌린 그는 ‘황금의 제국’을 판돈으로 건 포커판에 큰손으로 변신한다. 그러나 아들은 스톡홀름 신드롬에 시달린다. 전남편의 아들인 성재(이현진)는 핏줄인 엄마의 편에 서지 않고 끝없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누나 서윤을 연민한다. 알다시피, 동방예의지국 드라마에서 콩가루 형제는 있었으나 콩가루 부자와 모자는 드물었다.


후계를 다투는 여성, 팜파탈 대신 옴파탈

원래 거기엔 남자만 있었다. 드디어 대기업 후계자 자리에 여성이 있다. 서윤은 무능한 오빠 탓에 원하지 않는 잔을 들지만,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도전에 응한다. 대기업 드라마에서 후계를 다투는 중심에 여성이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누구는 후계구도를 다투는 재벌가 딸들을 읽을 것이다. 여전히 백화점 타령을 반복하는 여성 캐릭터인 언니와 시누이가 지겹긴 하지만, <황금의 제국> 서윤은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에 나온 여성과 다르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윤은 적과의 동침, 태주와의 결혼도 서슴지 않는다. 이토록 차갑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는 지금껏 보기 힘들었다. 여기에 극 중반을 넘기며 새로운 ‘대마’로 부상한 한정희가 있다. 성진그룹이 원래 남편이 세운 청마건설의 반석 위에 세워졌다고 믿는 한정희는 자신이 확보한 주식을 통해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어제의 원한을 오늘에 되살린 그는, 뒷방 늙은이가 아니다. 이렇게 유산에 능력을 겸비한 여성들이 중심으로 들어가자 <황금의 제국>은 새로운 구도의 드라마가 되었다.

≫ 서윤(이요원)과 태주(고수), 태생으로는 양극화를 상징하는 두 인물의 전략적 동거는 어떻게 끝나게 될까. 마주 앉아 서로를 성진그룹에서 밀어내려는 독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기이한 식탁 풍경을 연출한다.SBS 제공

팜파탈 대신 옴파탈이 있다. 조인성에게 <발리에서 생긴 일>이 있었다면, 고수에게 <황금의 제국>이 있다. 남녀상열지사에 기대지 않는 차가운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유일한 로맨스는 태주와 윤설희(장신영) 사이에 있다. 그러나 세상은 가난한 자들에게 돈에 대한 욕망과 사랑의 기쁨을 동시에 용납하지 않는다. 욕망을 향해 치닫던 태주는 정치인 김 의원을 죽이게 되고, 그 죄를 윤설희에게 뒤집어씌운다. 태주가 피칠갑을 한 손으로 윤설희에게 조작된 자수를 강권하며 키스를 하는 장면은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정재민(조인성)이 쏜 총알을 맞고 이수정(하지원)이 죽어가며 “사랑해요” 외친 장면과 겹친다. 지금껏 여성이 저지른 우발적 살인을 그 여성을 보호하려는 남성이 뒤집어쓴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황금의 제국>에서 남녀의 역할은 바뀐다. 여성은 비밀을 품은 보호자가 된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훈장도 아니다. 가난한 자의 정당성에 ‘웃돈’을 주는 <황금의 제국>이 아니란 것이다. 드라마 초반, 태주는 아버지가 화상으로 죽을 판인데 부상자 보상 문제를 뒷전에 두는 철거민들에게 “전 국민이 책임자야, 돈 생기면 땅 사고…”라고 퍼붓는다. 그렇게 <황금의 제국>은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돌아보게 한다. 재벌도 그냥 탐욕스럽기만 하면 재미없다. 아니 현실성이 떨어진다. 재벌 후계자가 자랑은 아니지만, 죄도 아니다. 서윤은 누구보다 정확한 판단을 하는 능력자다. 오히려 서윤에겐 ‘헝그리 파이터’ 태주와 민재에게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마저 엿보인다. 태주가 한성제철을 인수한 다음 제철소를 갈가리 분할해 외국자본에 넘기겠다고 하자, 서윤과 민재는 멈칫한다. 오히려 서윤은 기업을 넘길 위기에 처하자 고용승계를 부탁한다. 지금은 기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먹는 시대다. 국가와 공동체 따위는 모르는 태주와 민재가 오히려 더욱 극악한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다. 누구는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재벌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경제 학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재벌의 구실에 대한 논쟁이 떠오를 만큼 <황금의 제국> 텍스트는 다층적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절묘한 딜레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합종연횡 드라마가 숨가쁘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처럼, 최선의 축복은 누리지 못한다. 최지은 <아이즈> 기자는 “인물들이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할 상황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과 손잡을 것인가,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사람과 손잡을 것인가 고민한다”며 “불가피한 선택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그 결과가 다음 딜레마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절묘한 딜레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는 “이렇게 딜레마를 힘있게 그리는 작가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언젠가 태주는 말했다. “살고 싶은 인생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야만 하는 인생,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거지.” 그렇게 욕망의 전차는 굴러간다. 에피소드 단위로 이어지는 미국 드라마처럼 <황금의 제국>은 매회, 매주 단위로 반전이 일어난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다. 그래서 24부작 드라마의 중반이 지났지만, 결말을 가늠하기 어렵다. 인물만 선악의 양면을 가진 것이 아니라, 드라마가 향하는 가치도 무어라 단정하기 어려운 탓이다. 누가 승자가 될까? 태주, 민재, 서윤? 아니면 모두가 패자? 결말에 앞서 당장 드는 궁금증. 윤설희는 어떤 패를 쥐고 게임에 복귀하고, 성재는 선한 얼굴 아래 어떤 욕망을 숨기고 있을까?

추신처럼 덧붙이면, <황금의 제국>에서 정치인은 하찮고 언론은 우습다. 모든 권력이 경제로 넘어간 시대의 반영이다. ‘IMF 시대’ 이후를 그린 <황금의 제국>은 아직도 정치 언저리를 헤매는 드라마의 문화 지체를 넘어 냉정한 사회생태학 보고서다. 어쩌면 이것은 경제판 ‘응답하라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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