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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땅 투기 원조는 박정희였다
게시물ID : sisa_8319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바람처럼9
추천 : 4
조회수 : 8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1/09 12:19:07
박정희 정권은 허허벌판 강남을 국내 최초의 신도시로 개발했다. 개발은 성공적이었다. 1963~77년 사이에 서울시 전역의 지가는 87배 수준으로 크게 상승했고, 강남지역의 지가는 176배가량 폭등했다. 정권은 앞장서 개발을 밀어붙였다.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새마을운동 “잘 살아보세”라는 표어처럼, 아파트를 사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신화가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부동산 투기 대열에 올라탄 사람들은 중산층이 됐지만, 그러지 못한 다수에게는 ‘헬조선’이 열렸다.
 
강남발 투기 열풍이 번지면서 전 국토가 투기장이 됐다. 헌법에도 명시된 ‘쾌적한 주거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정부가 이를 돈벌이용 투기 수단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강남 개발은 부동산 버전의 재벌 육성이었다.
#아파트 새마을운동
박정희 정권이 강남 개발을 밀어붙임과 동시에 1970~71년 땅 투기로 수백억원의 매매차익을 남겨 대선자금으로 썼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청와대 대선자금 마련을 위한 땅 투기 정황의 중심에 1970~72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윤아무개(88)씨가 있다. 윤씨 뒤를 이어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일했던 고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가 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보면, 윤씨는 당시 청와대 지시로 강남구 토지의 2%인 24만여평을 매매해 18억원(현재가치 약 324억원)의 차익을 남긴 뒤 청와대에 바친 것으로 나온다. <한겨레>는 윤씨를 만나 책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폐쇄등기부등본 등을 통해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추적했다.
윤씨는 1968년 서울 풍납동, 방이동을 올림픽 후보지로 미리 선정한 인물이며, 지금의 강남에 해당하는 영동지구개발계획을 1970년에 세우고 집행한 주인공이다. 서울시 도시계획상에는 1960년대부터 올림픽대회 후보지가 논의돼 왔다.
윤씨는 영동개발계획이 발표되기 11개월 전인 1969년 12월, 김현옥 서울시장의 안내로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들른다.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집이었다. 정권 실세였던 박 실장은 윤씨에게 강남 땅을 사들여 차익을 본 뒤 바치라고 지시한다. 2주일 뒤 김 시장이 알려준 대로 고태진 제일은행 전무실을 찾아간다.
 
“윤씨는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신분이던 1970년 1월께 시장실에서 연락이 와서 찾아갔더니 (…) 당시 제일은행 본점은 신세계 백화점 서편 지금의 제일지점 건물이었다. 고태진 전무실은 서울시장실보다 더 으리으리한 방이었다. 조심조심 찾아온 용건을 말하는 윤 과장에게 고 전무가 책상서랍에서 꺼내준 것은 적금 통장 한 개였다. 원금 3억원짜리였는데 예금한 지 햇수가 많이 지나서 이자가 누더기로 붙어 있었다. 윤씨는 이 자금을 통장 또는 A통장이라 적고 3억4138만6983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첫번째 자금공급은 이렇게 시작됐다.”(<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10쪽, 손정목) 이때 윤씨가 고씨로부터 받은 돈의 현재가치는 약 70억원에 해당한다.
자금이 부족할 때는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자 쌍용그룹 창업자를 찾아가 자금을 받았다고 훗날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에게 밝힌다.
 
박종규 지시로 강남땅 되팔아 대선자금 수백억 바쳐
 
#국고 관리자 고태진
“울산 상업은행 출신 인물 중 금융인으로 가장 출세한 사람이 고태진씨다. 고씨는 울산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해방 후 1953년 대전지점장, 1957년 진주지점장, 1961년에는 심사과장을 거쳐 부산 중앙동지점장이 되었는데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었던 이후락씨가 울산 출신의 금융인 중 국고를 맡길 인물을 찾게 되는데 이때 고씨가 발탁되었다. 이후락 실장의 지원 속에 제일은행 전무가 되었다.”(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손정목씨는 지난해 5월 88살을 일기로 숨졌고, 고태진씨는 2003년 별세했다. 고씨에 대한 기록을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지역 역사학자인 장 이사는 울산에 거주하는 고씨의 차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2015년 지역 일간지에 이 내용을 실었다. 윤씨가 청와대 경호실장 지시로 고씨를 찾아가 자금을 받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윤씨는 이 돈을 어떻게 굴렸을까. 윤씨가 강남구 토지의 2%인 24만여평을 매매해 당시 18억대의 차익을 남겼다고 손씨는 <서울…>에 적었다. 이 책은 2003년 발간돼, 올해까지 7쇄를 찍었다. 윤씨가 손씨에게 털어놓은 땅 투기 비화를 언론에 직접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윤씨는 1966년 도시계획과장, 1970년 5월 도시계획국장에 오른다. 1974년 서울시를 퇴직하고 쌍용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에는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경주·월성·청도 지역의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그는 “영동(강남) 지역 개발 경험을 살려 경주를 발전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다시 역사 밖으로 종적을 감췄다.
윤씨가 국장이 된 1970년 11월 영동지구 개발 계획 전모가 발표됐다. 당시 강남은 나날이 과밀화하는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고 서울의 균형발전을 위해 중앙정부가 적극 나선다는 취지로 개발됐다. 영동 제1지구(472만평)에다 제2지구(365만평)를 합해 서울시가 1972년까지 837만평을 개발하는 데 총 167억원 투입 계획을 세웠다. 60만 인구가 거주하기 위한 새 시가지였다.
강남이 서울에 편입된 시점은 1963년 1월. 서울 편입 목적이 신시가지 구상만은 아니었다. 서울시가 1966년 1월 초순 ‘강남 개발 구상’을 발표했지만 이는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65년 서울시 인구는 150만명이었는데 다리가 2개뿐이었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나라로서, 전시 상황에 국민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의식이 팽배했다. 1966년 1월19일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되면서 땅값이 꿈틀댔다. 제3한강교 착공 당시 신사동 일대 땅값은 한 평에 200원. 1년이 지나자 1평에 3000원으로 뛰어올랐다. 본격적인 개발은 경부고속도로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 건설 중인 제3한강교 남단을 경부고속도로 기점으로 한다는 결정이 1967년 11월 떨어진 것. 3년 뒤인 1970년 11월이 돼서야 영동지구 개발 계획이 발표됐다.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으로
70년 강남개발 지휘한 윤씨
개발계획 발표 11개월 앞두고
김현옥 서울시장과 경호실장 집서 만나
강남땅 사들이라는 지시 받아
‘국고관리’ 고태진 제일은행 전무가
윤씨에 땅 살 종잣돈 든 통장 건네
이후 김성곤 쌍용회장도 자금 대
박정희 정부가 부동산 투기 억제로 정책을 바꾼 시점은 1973년 말부터다. 이미 투기 광풍이 한 차례 지나간 뒤였다. 그조차도 주거용 토지에 대해서는 세율이 낮았고 조세 중과 대상이었던 토지의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재무부는 투기 억제세에 의한 과세 대상 지역을 확대하고 공제율을 5% 인하함으로 투기를 억제하기로 했다.”(<매일경제> 1973년 12월5일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7892.html?_fr=mt2#csidx03055bfcb153aee9ee2c22a0c0a1b56
 
71년 대선때 김대중을 꺽기위해 쓴 선거자금이 700억 정도 였고(동아일보 김충식 기자의 저서인 남산의부장들), 71년도 국가 예산이 6200억 정도 였으니 국가 예산의 10% 이상을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것인데 이런 부정선거를 하기 위해서 부동산 투기를 조장 하였다니 한심할 따름이고, 그런자를 반인반수로 떠 받들고 있는자들도 한심하다.
 
이정우교수 의견에 따르면 1963~1979년 까지 전국 토지가 는 3.4조 에서 329조원으로 100배 정도 상승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투기의 신 박정희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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