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나를 재밌게 보신 분들은 이 평을 안보길 권하고 싶네요. 겨울왕국을 재밌게 봤던 사람으로서 이번 작품은 실망이 컸거든요. 영화를 안보신 분들에게는, 상영관을 가득 채운 아이들이 영화 관람 중 두 번 정도 산만해질 때가 있었다는 점이 이 영화가 아이들에게 보여줄 영화인지에 대한 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라이프 오브 파이>, <쿠보와 전설의 악기>, <모노노케 히메>, <겨울왕국>을 주 비교대상으로 하여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 영화를 비평해보고자 합니다. 영화의 큰 문제는 크게 시나리오의 실패와 미약한 주제에 있고 덧붙여 더빙의 아쉬움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1. 바다라는 매력적이고 단조로운 공간
이 영화가 태평양 제도(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의 신화를 소재로 선택한 이상 섬과 바다는 영화의 주 무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바다는 사방이 똑같은 단조로운, 그래서 다루기 어려운 공간인데,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한 예시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과 밤낮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바다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모아나'와 '마우이'는 귀여운 코코넛 해적들에게서 빠져나온 이후로 항해를 하는 내내 안타까울 정도로 똑같은 대사("나는 모누투이의 족장 모아나다... 테 피티의 심장을 원래대로... 세상을 구하자")와 유머(움직이는 문신, 물에 빠뜨리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반복의 오류 때문에 모자란 닭 '헤이헤이'까지 요소요소 동원해도 피식 웃음만 나올 뿐 그 이상의 즐거움이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본 영화는 예시로 든 영화처럼 바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뿐더러 인물간의 갈등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갈등의 경우, 영화의 절정 구간에 이를 때까지 바다라는 주 무대공간이 두 인물을 한 차원 더 높은 갈등과 교감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이 영화의 바다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인물의 갈등은 용암 악마 '테카'를 만날 때 민망할 정도로 뜬금없이, 즉 작위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다보니 결말에서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 장면이 그렇게 어색해보일 수가 없었다.
2. 이상한 캐릭터, 상황 설정
시나리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최악의 장면을 하나 꼽으면 모아나와 마우이가 갈고리를 찾기 위해 괴물들의 영토에 들어가 거대 게 '타마토아'와 싸우는(?) 장면이다. 아무리 재치와 유머로 장전한 어린이 영화여도 진지할 땐 진지해야 한다. 영화 스토리상 분기점이 되는 이 중요한 장면에서 이 게는 뜬금없이 밝은 장조의 노래('Shiny')를 부르고 춤을 춘다. 여기서 떠오른 장면이 <쿠보와 전설의 악기>에서 거대 해골과의 전투 장면이었다. 이 장면도 <모아나>와 비슷하게 주인공 '쿠보'와 동료들이 해골 머리에 꽂힌 검을 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황이었는데, 훌륭한 장면이었음에도 변칙적이지 않고 비슷한 액션이 반복되어 조금 아쉬워했었다. <모아나>의 두 주인공도 꽃게 등딱지에 박힌 갈고리를 빼기 위해 액션을 펼치는데, 그 놈의 노래 때문에 긴장감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 무려 클라이맥스에서 또 반복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중에 괜찮게 본 점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반전 설정이다. 테카가 결국 여신이었다는 게 밝혀지며 모아나는 심장을 돌려주기 위해 테카를 부른다. 배경음악을 완전히 침묵 시키거나 단선율로 얕게 깔아 강조해도 모자랄 이 중요한 순간에, 모아나는 또 몰입을 해치는 노래를 부른다. 차라리 테카가 여신의 모습을 회복하고나서 부르지...
3. 모험과 사명, 자연과의 교감 모두 성취하지 못한 영화
초반에 모아나의 불필요하게 착해서 아쉬웠던 목소리, 부모와 할머니의 나이에 맞지 않는 앳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여준 장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괜찮은 장면 중 나머지 하나, 어린 모아나가 움직이는 바다와 처음 조우하는 장면이다. 마치 모아나를 위해 존재할 것 같은 바다, 어른이 봐도 놀랍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관계는 그러나 뒤로 갈 수록 점점 생명력을 잃어간다. 바다와 모아나의 관계에서 바다는 소극적이고 모아나는 수동적인 교감만 한다. 마지막에 테카를 부르기 위해 바다에게 굳이 육성으로 "이리로 데려와줘" 한 것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바다와 모아나의 관계가 이루어낸 것이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지점이었다. <벼랑 위의 포뇨>를 통해 각인된 나름의 상상력으로 바다와 바다의 딸이 물아일체의 경지를 펼칠 것까지 기대한 관객들에겐 그만큼의 실망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 정도로 태평양 제도 신화(마더 아일랜드, 바다의 딸)라는 소재는 흥미진진한 소재였던 것이다.
그럼 이 영화가 자연과의 교감이 아닌 다른 주제에 무게를 두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부족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는 영화로 <모아나>가 처음은 아니다.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는 주인공 '아시타카'가 재앙신의 마을 습격을 물리친 후 장로들의 신탁을 받아 긴 여정을 떠난다. 장로들과 아시타카의 의식장면은 사안의 중대성을 가중함으로써 기나긴 여정의 맨 처음 동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모아나>의 출발지인 '모투누이'에서는 사명을 불어넣는 장면이 없는데다가 항해 중 모아나는 그저 말그대로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대사만 할 뿐이라, 주인공이 정말 사명을 중대하게 관철하려는 지 그 진심이 다가오지 않는다. 할머니를 따라 숨겨진 동굴을 탐험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는데, 이 장면에서는 모아나의 의식에 넓은 바다를 거침없이 항해하는 선조들의 영상이 흐름으로써 사명감보다는 모험심이 고취되었다. 결국 남은 장면은 썩어버린 코코넛과 (정말 그전까지 멀쩡하다가) 뜬금없이 쇠약해지신 할머니 뿐이다. 그렇다면 5분 가량의 뮤지컬로 표현할 정도로 평소 모험을 꿈꾸던 모아나는 긴 여정에 걸쳐 모험심을 맘껏 뽐내느냐하면 전혀 아니다. 마우이한테는 스스로 고취되었는 지도 불분명한 사명 연설만 반복할 뿐이고 여정 내내 바다와는 소극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으로, 모아나는 후반부 '테카'를 피해 '테 피티' 섬으로 진입할 때를 빼고는 모험심 가득한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나마 이 장면도 바로 직전 뜬금없는 모아나-마우이 갈등으로 맥이 빠진 상황이었다. 모아나가 모험적인 면에서 얼마나 소극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마우이의 문신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다. 모험심은 호기심의 발로일 터, 모아나는 마우이가 문신에 대해 질문하길 원치 않자 더 묻지 않고 그대로 존중을 해버린다. 문신에서 신화적인 상상력을 가동한 사람들이라면 소극적인 모아나의 태도에 김이 샜을 것이다. 모아나가 집요하게 묻다가 둘이 우당탕쿵탕 다투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또 그래서 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어땠을까. 물론 문신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정말 사무적으로 언급되긴 한다.
주제면을 종합적으로 보면 <모아나>는 <겨울왕국>이 그린 주체적인 공주상(여기서는 부족장)을 잇기에는 오히려 퇴행적인 측면이 있다.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는 기존의 디즈니 공주들과 눈에 띄게 비교될 정도로 주체적(왕국을 떠나 독립한 엘사)이고 적극적(언니를 찾는 안나)이고 당당한 모습(남자 주인공이나 남자 악당에게 휘둘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겨울왕국>만큼 긴 상영시간 동안 이러한 상을 설명하고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순전히 시나리오와 캐릭터 연구가 부족한 탓에 있을 것이다. 정말 심하게 갈무리 하면 지금 <모아나>를 보는 것보다 <겨울왕국>을 한 번 더 보는 걸 권유하고 싶을 정도이다. 심지어 계절도 맞지 않다.
4. 아름다운 폴리네시아 신화
그럼에도 평소에 우쿨렐레 음악으로만 접하던 폴리네시아(남태평양 제도)의 아름다운 신화를 이 영화를 통해 발끝만이라도 느꼈다면 위안이 될까. 시나리오와 관계없이 영화의 뮤지컬적인 요소는 디즈니식 폴리네시아 팝을 잘 구현했다는 인상이 든다(꽃게 괴물의 댄스곡은 이 범주에 들지도 않는다). 인디언 리듬에 악기 연주 없이 보이스 화음만 쌓은 노래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다음엔, 이왕이면 여름에 폴리네시아 신화가 잘 구현된 영화가 나오길 바랄 뿐이다.
시나리오 ★☆
연출, 그래픽, 음악 ★★★
성우연기(한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