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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제국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 (2)
게시물ID : history_130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4/9
조회수 : 7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17 23:37:13
정통 칼리프의 시대

3. 우스만 이븐 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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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부터 말해보자면 정통 칼리프의 시대는 사실상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쇠락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2대 칼리프 우마르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속화를 막지 못한 결과물이라 할수 있겠지만 본디부터 우스만은 가장 적절하지 못한 인선이라 할수가 있겠지요.

그는 메카를 사실상 다스리는 쿠바야시 부족에서도 가장 고귀하다는 우마미야 가문 출신입니다, 거기다 여자와 같이 아름답다 칭해지는 외모에 서른 살에는 이미 그와 부를 견줄 사람은 메카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특히나 그의 부족 그의 가문은 반 이슬람 세력의 수장격이었고 주력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데 반대가 되는 두 아내와 이혼까지 할 정도로 신실한 신도였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일단 기존에 하층민을 위주로 한 포교와 영향력 증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귀족들과도 교류하기를 원하였고 그러한 상황속에서 우스만의 개종은 큰 힘이 될수 있었기에 자신의 딸을 기꺼이 시집을 보냈습니다, 네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자금과 영향력을 아끼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미약했던 이슬람 교 세력에 있어 강대했던 메카의 다신교 세력을 이기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것이 칼리프의 자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기꺼이 선지자 무하메드를 버리고 도망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사후 사분오열되가는 이슬람 교를 수습하기 위해 온힘을 다했던 전 칼리프들과 다르게 그는 공포에 질려 울부짖기만했습니다, 

더욱이 칼리프의 자리에 올라 나름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 노력을 다했지만 모두가 경계하고 또 불편해하던 세속화에 가장 앞장서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물론 업적도 있습니다, 이제까지 대강대강 운영되던 제국의 재정을 정비하여 재정 정책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교통망을 정비하고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 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비록 세금이 대폭적으로 증가하고 착취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제국의 국고는 이전과 다르게 충만해질수 있었지요, 그외에도 지난 두 칼리프가 가장 신경쓰던 국책사업? 이던 꾸란의 정비 역시 완성을 시켰고 우리가 아는 꾸란이 이때 나오게 됩니다, 정복사업 역시 절정에 달하여 서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만들어내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업적이 긍정적인가 하면 역시나 아닙니다, 그렇게 재정 정책을 정비하고 또 교통망을 정비하고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 하는등 경제 정책을 개선했으나 그 결과물은 그의 가문인 우마미야 가문에게 돌아갔습니다, 특히나 과도하게 집중된 부는 우마미야 가문의 독립성을 강화시켜주었을뿐더러 계층간 위화감과 불만을 고조시켜나갔고, 심지어는 칼리프가 아닌 세속군주로서의 면모를 느끼기에 우스만에 대한 불만역시 매우 팽배해진 상황이었는데 급기야 이러한 경제 정책에 따라 부여되었던 과도한 착취는 폭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집트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혼란의 정국속에 이집트의 민중들은 총독의 교체를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내었는데, 문제는 우스만은 결코 이 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암살을 지시하는 전령을 보내는데 이게 들키는 바람에 폭도로 돌변한 사절단의 손에 의하여 죽습니다.

참 허망하기 그지 없는 상황입니다,


4. 알리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입니다, 그는 어찌보면 가장 정통성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딸들만 살아남고 아들들은 단명했던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있어 그의 숙부의 아들인 알리는 30이 넘는 나이차를 볼때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에 가까웠던것 같습니다, 당시 관습도 그러했고 말이지요.

물론 이러한 혈통만이 그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부 바크르와 누가 우선인지 모르나 가장 처음 무슬림으로 개종한 남자이기도 합니다, 622년 메디나로 떠나던 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침실에서 미끼로 자처한 이도 그 였으며 모두가 끝이라 생각할때에도 가장 앞에서 모두를 이끌었던 이였으며 선지자 무함마드가 죽었을때 그의 유해를 수습한 이도 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시집간 딸만이 두 아들을 얻는 바람에 정말로 선지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잇는 유일한 자이기도 하였지요, 그랬기에 그는 후계자에 가장 가까웠지만 현실은 그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아부 바크르와 경합을 벌일때는 사실상 날치기에 가까웠던 모임과 더불어 2배에 달하는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우마르의 시대에는 이른바 배교 전쟁, 반란을 진압한지가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동로마 제국은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움직임을 감추지 않았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혼란스럽다고는 하나 각지의 영주들은 발톱을 감춘 사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경합을 벌인다는 것은 곧 이슬람의 분열 아니 최후를 상정해야 하는 것이었고 알리는 그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스만의 시대에는 이슬람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며 변혁을 꽤하던 그를 모두가 원하지 않았습니다, 상류층들은 철저하게 안정을 취함과 동시에 세속화에 먹구름이 끼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의 입맛에 가장 맞던 우스만을 선출했고, 역시나 분열을 우려할수 밖에 없기에 알리는 속을 삭이며 물러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스만이 암살된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는 칼리프의 자리에 오릅니다.
칼리프의 자리에 처음 올라 벌인 것은 그가 원하지 않았던 분열입니다, 폭도들을 진정시켜 달라는 우스만의 부탁을 거절했던 일이 우스만을 암살하기 위한 방책으로 돌변해 그의 목을 졸랐습니다, 

무너져 가는 제국을 돌려 세우기 위한 개혁은 상류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해임당한 부패한 총독들은 쿠라이시 부족과 손을 잡고 아부 바크르의 딸이자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지하드를 선포하며 벌어진 지리한 내전은 알리의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것은 1라운드에 불과했습니다, 이번에는 시리아의 총독이자 쿠라이시 부족 및 우마이야 가문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의 수구인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과의 내전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칼리프로 선포한 무아위야와의 전쟁은 일단은 알리의 승리로 끝을 맺을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협상이라는 자체에 불만을 품은 그의 지지층에 의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노려 무아위야는 이집트와 예루살렘 일대를 장악하는데 그 사이 알리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에게 암살 당하고 만 것이지요, 그 다음을 잇는자가 있어야 하는데 알리의 아들이자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 하산을 꼽았습니다만 무아위야는 예루살렘에서 칼리프의 자리에 오르는 한편 거액의 돈을 지급하여 하산이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게끔 만듭니다,

네 이는 무아위야 왕조의 시작으로 사실상 세습 왕조가 아닌 종교 지도자로서의 칼리프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니 끝났습니다, 사실상 선지자 무함마드로 부터 내려온 정통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아위야 왕조의 이야기는 다음에 잇도록 하고, 시아파와 수니파의 이야기를 잠깐 하고 끝을 내고자 합니다,

말씀만 따르면 구원 받을수 있다는 수니파와 다르게 시아파는 알라 즉 신과 인간의 중재자인 이맘을 통해서만 인간이 구원받을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맘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가능한 '신성한' 칼리프 이며 이에 따라 정통 칼리프에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만을 인정할뿐 나머지 셋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알리만이 유일한 칼리프이며 나머지는 찬탈자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 들의 분열은 이미 아부 바크르의 시대에 예고된바 있습니다, 날치기에 가까운 계승으로 불거진 지지자 간의 다툼은 일설에 따르자면 알리의 아내 파티마가 유산을 할정도로 격렬한 충돌로 번졌으나 해결되지는 않고 사방에서 난립해 벌어지는 봉기를 더 나아가 이슬람 교의 위기로 인하여 임시로 덮어지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고름이 터진것이 무아위야 왕조를 비릇한 후대의 일인데, 여기서는 그러니까 정통 칼리프 시대에 시아파라는 종파가 성립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한 원리주의적인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왜 알리가 지지자이자 신하인 이들에게 버림받고 암살당했나 하면 우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어떠한 결점도 없는 완벽한 인간이었듯이 그 혈통도 그러해야 하는데 알리는 이슬람을 뒤흔들고 무너뜨리려 하는 무아위야와 타협을 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이는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되는 일이었지요, 그러하였기에 그는 자격을 잃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후대에 주장에 따라 알리도 완벽한 무오류의 인간이었다 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역사를 통해 볼때 이 들 시아파와 수니파라는 거대 종파의 대립은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결코 빼놓을수 없는 과제이고 앞으로 적어나갈 이야기의 주축이기도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글을 작성해 나가며 추가로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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