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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과 비슷한 사람 : 원숭환에 대해
게시물ID : drama_528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엇이문제
추천 : 2
조회수 : 143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1/27 16:20:43
먼저 글을 읽기 전에, 제가 디씨 도깨비갤에 방금 올렸던 글을 올리려니 말투 수정하기가 힘들어서(키보드가 잘 안들어요..ㅠㅠ) 디씨 특유의 말투 그대로 쓰는 것을 용서해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혼신의 힘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고 국왕에 의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꼽으라면

한국사에서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

중국사에서는 송의 악비와 명의 원숭환

서양사에서는 서로마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 동로마의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를 꼽을 수 있는데


이순신 장군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가 많으니 그냥 넘어가고 싶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어.

최근의 연구를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간에 백의종군을 하게 된 원인인 :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라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 실제로 당시 이순신장군은 적이 대대적으로 방비를 하고 있던 부산포로 출동했어. 그런데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겠다 결정한 것은 2월 6일.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에서 무력시위를 한 것이 2월 10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물러나야 한 것이 2월 25일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선조는 자기가 일단 결정을 해놓고 이유를 붙였던 것 같아.

사실 김신의 모티프로 가장 강하게 작용했을 인물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이런 배경을 가진 이순신 장군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길 만약 중국에서 도깨비를 리메이크를 하게 되면 어떤 인물을 모티프로 만들 것 같은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위에서 말한 두 인물이라 할 수 있어.

먼저 가장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명의 원숭환이야. 주변 인물을 보면 아주 비슷한 면이 있지.

황제인 천계제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졌는지 목공에서는 매우 빼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

그리고 그 황제를 대신해서 간신인 위충현이 국사를 돌보고 있었어. 그리고 이 위충현은 웅정필 등의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숙청한 놈이고.

그리고 원숭환은 웅정필 이후에 만주족과의 경계선을 방어하고 있었지. 처음에는 원숭환이 요동을 상실한 명나라의 방어선을 요서에 차리는 것에 성공했는데 위충현이 자기 입맛에 맞는 고제라는 자를 원숭환의 뒤를 받쳐서 방어하는 직위에 두었어. 그리고 원숭환은 자신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상황에서 영원성 하나에 의지해서 누르하치의 침공을 막아야 했고. 이 때 누르하치는 16만, 원숭환은 2만의 병력을 두고 있었어. 병가에서 말하는, 성을 공략할 때의 적정한 병력 비율을 생각해볼 때 누르하치 입장에서는 해볼만한 병력 차였어.

그런데 누르하치는 이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지. 이건 당시 상승이라는 이름을 붙일 법하던 누르하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심대한 정신적 타격이었을 거야. 누르하치 개인이 만주족을 통합할 때는 이 무패의 이름이 도움이 되었는데 여전히 부족연합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후금의 입장에서는 이 패배로 휘하의 흔들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지. 실제로 이후 누르하치는 몽골로 쳐들어가서(분열과 흔들림을 막으려고) 몽골을 박살내다가 8개월후 병사해.

명나라 입장에서는 누르하치에게 계속 밀리다가 조정의 지원도 제대로 못 받았던 원숭환이 이겨버리니 축제분위기였지. 실제로 위충현도 이 때만큼은 원숭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고제를 해임하고 원숭환이 바라는대로 지원을 해줘. 이것이 불행의 단초가 되었지만.

이 때 원숭환은 적의 내부를 염탐하기 위해 누르하치의 장례에 조문단을 보내. 시간이 더 필요했던 원숭환과 홍타이치는 이 때 서로간에 교류를 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지.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필요한 방법이었지만 이건 원숭환의 개인입장에서는 불행의 두번째 단초였어. 훗날 원숭환이 이 때의 일로 적과 내통하기 시작했다는 죄목을 쓰게 되거든.

이후 홍타이치가 1627년 조선을 치고 다시 명으로 창끝을 겨누지. 이 때 위충현의 지원을 받아 원숭환이 구축한 요서 방어선은 거의 완성 상태였어. 실제로 홍타이치는 이 전역에서 원숭환의 영원성과 명나라가 새로 구축한 금주성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거든.

하지만 천계제가 죽고 위충현은 새로 즉위한 숭정제에게 축출되었어. 숭정제는 천계제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 하지만 초임자의 실수를 숭정제가 저질렀지. 원숭환을 위충현과 같은 도당으로 분류해 버렸거든. 그리고 북경으로 소환되었지. 물론 신하들이 바보가 아니니 원숭환만큼 홍타이치를 막을 자가 없는 것을 알고는 황제에게 계속해서 원숭환을 재기용하라는 상소를 써. 실제로 1628년 원숭환은 재기용되었어. 이 때 원숭환은 후금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황제인 숭정제에게 몇 년 안에 요동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 그 밑작업을 하기 위해 원숭환은 압록강변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을 참살하고 그 휘하 병력을 재배치했지. 모문룡은 언제 후금에 붙을지 알 수 없는 쓰레기였거든. 실제 조선쪽의 기록에도 모문룡이 후금에서 벼슬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떠들었다는 기록도 있어. 조선을 엄청 괴롭히기도 했고. 하지만 이 일이 원숭환의 불행에 세 번째 단초가 되어버려.


하지만 홍타이치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지. 원숭환이 지키고 있는 요서로 가면 당연히 막힐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지. 그렇다면? 돌아서 간다.

바다로 가기는 힘들어. 그렇다면 다른 방법인 해안가쪽은 원숭환의 명군이 꽉 잡고 있었지. 그럼 다른 방법은?

내륙으로 가는 거였어. 하지만 그 내륙에는 만주족과는 다른 민족이 있었지. 몽골계 코르친이었어. 그리고 홍타이치 입장에서는 운이 좋게도 이 코르친은 혼인과 전쟁으로 사실상 후금에 복속된 상태였지. 그래서 홍타이치는 병력을 돌려서 산해관쪽이 아니라 내륙쪽의 만리장성을 넘어서 명을 위협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1629년 10월 26일. 북경을 포위해. 그리고 전쟁이 천리 밖의 일이었던 북경 사람들과 대신들은 그 이유를 찾기 시작하지. 그들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어.

"이게 다 원숭환 때문이다."

실제로 이 때 원숭환은 홍타이치가 보낸 병력을 방어하느라 발이 묶인 상황이었어. 그리고 명은 적에 무지했지. 원숭환은 자신이 지키는 요서를 우회해서 후금이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조정에서는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 그리고 원숭환은 모문룡을 참살해서 대신들에게 들어가던 뇌물을 막아버린 거야. 게다가 위충현이 지원을 해주긴 했지만 위충현의 휘하에 있던 대신들이 뭉친 당파인 엄당은 원숭환과 대립하는 상황이었지. 그리고 황제는 당시 나이로 19세였어. 아직 어렸지.

원숭환이 북경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서 북경으로 향했어. 약 1만 3천의 병력이었어. 당시 후금군은 10만. 하지만 그 병력마저도 도중에 준화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4천을 떼서 지원해야 했어. 하지만 준화성은 지원군이 가기 전에 함락되었고 지원군은 몰살당했어. 당시 성에 피난해 있던 명나라 백성들도 몰살당했지. 이 소식을 들은 북경 사람들은 원숭환을 원망했다고 해. 그 기적같은 승리로 그들을 구해준 원숭환을. 마치 기적을 맡겨둔 것처럼.

원숭환이 남은 9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경에 도착한 건 11월 17일이었어. 이 때 후금군 10만에게 덤비는 건 병력차로 보았을 때도 미친 짓이었고 강행군으로 지친 병력이라 더 그랬지. 하지만 원숭환은 병력을 북경성에 진입시켜 휴식을 취하게 하지 않았어. 북경성 밖 광거문 일대에서 11월 20일부터 후금군에게 덤벼든 거야. 이 싸움은 11월 23일까지 지속되었어. 후금군과 10여차례 부딪혔고 모두 승리했어. 적이 10만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대부분은 주변에 약탈하러 나간 병력이 많아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싸운 거지. 그리고 원숭환은 이제야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자 숭정제에게 병력을 북경성으로 들여서 휴식을 하게 해달라고 청해.

숭정제의 답변은 "안된다."였어. 아마 이 때부터 숭정제는 원숭환을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11월의 추운 날씨에 병력에게 성안의 따뜻한 휴식을 주지 못한 원숭환은 11월 27일에 다시 후금군과 격돌해. 북경 좌안문 일대에서의 격돌로 홍타이치는 병력을 물려. 하지만 바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하북, 산서, 산동 등지에서 약탈전을 감행해. 이 때 명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후금의 입장에서는 피폐한 경제상황을 호전시킬 일대의 기회였어. 참전한 병력에게 우마 최소 한 마리씩을 돌아갔고 수만의 포로를 잡아 노예로 부릴 수 있게 된 거지. 이 포로들은 후금의 경제에 지대한 노동력이 되었어.

힘들었던 1629년이 지나고 일어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 조정은 대책을 세워. 결론은 산서성 일대에도 요서에 버금가는 방어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지. 그리고 그 방어선 구축에 적합한 사람은 원숭환이었고

하지만 원숭환에게 벌어진 반간계는 이걸 불가능하게 만들었지. 홍타이치는 명의 수호신인 원숭환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이 포로로 잡았던 명나라 환관을 이용했어. 이 환관들이 잡혀있던 숙소 옆에서 홍타이치의 부하들이 밀담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거짓정보를 흘린 거지. 원숭환과 홍타이치의 협의대로 북경을 넘겨받는다는. 이 환관들은 전후 협상을 통해 명나라로 돌아와서는 황제인 숭정제에게 이 사실을 고했지. 이미 원숭환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던 숭정제는 이 떡밥을 물었어. 이 떡밥을 물지 않았더라도 당시 후금은 전방면으로 반간계를 사용한 모양이야. 조선의 기록(후금에 사신으로 갔던 박난영의 장계:1930년)에도 만주인들이 원숭환을 제거하고자 같은 뜻을 품고 있다고 반간계를 쓰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떡밥을 문 숭정제는 북경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원숭환을 1629년 12월 1일에 소환해. 숭정제는 분명 명의 최후의 황제로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평생 남을 믿지 못했다는 최악의 실수를 하는데 이것도 그 중 하나야. 후금군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으니 성문을 열 수는 없고 바구니를 타고 오라고 해서 드리워진 바구니를 타고 가서 황제를 알현해. 하지만 여기에서 숭정제는 원숭환에게 치하를 하지 않고 힐난을 했어. 그리고 원숭환은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하지 못했지. 이걸 죄의 증거로 본 숭정제는 원숭환을 감옥에 가둬버려. 그리고 명의 조정대신들, 동림당은 원숭환을 구명하기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숭정제와 엄당은 원숭환을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 했어. 그 결과 1630년. 8월. 원숭환은 결국 능지형을 당하고 죽게 돼. 그리고 명나라는 자신들을 보호하던 수호신을, 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 되었지. 그 이후 10여년 후 어떤 노력에도 명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걸어. 아이러니하게도 원숭환이 구축했던 요서의 방어선이 무너졌어도 산해성은 그대로 남아 홍타이치는 장성을 넘지 못했지만 내부에서 틈왕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하고 숭정제는 자결하는 결론을 맞이했지만.


출처 디씨에서 썼던 것을 말투만 수정...하기는 힘들어서 그대로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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