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핑크빛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거란다. 어릴적 그녀의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자주 그녀에게 말하곤 했다. 그녀의 아직은 조그맣던 손을 당신의 손에 쥐고서는.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어머니를 올려다 보았다.엄마는 남자를 잘 만난 것인지, 엄마의 인생도 핑크빛 인생인지 궁금해서. 어머니의 한쪽 눈이나 볼에는 멍자국이 늘상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남자인 아버지는 툭하면 그녀의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
따라서 아버지는 엄마에게 핑크빛 인생을 살게 해줄 만한 남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인생에서 처음 만난 남자이다. 아버지는 커 갈수록 그녀의 얼굴에도 손을 올려붙이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늘상 열등감에 차 있고, 자신이 강자라는 것을 확인해야만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녀에게 아버지란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가 얼굴이고 허벅지고 때릴 곳을 가리지 않는 바람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등하굣길을 다녔다. 그래도 그녀의 학교에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그녀의 인생을 핑크빛으로 물들여줄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는 분명히 아니었다.
몇년이 지난 즈음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에 내려친 유리 재떨이로 어머니는 뇌출혈을 일으켰다. 그녀는 차갑게 굳은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졌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어머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한심한 아버지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마지막마저 비참한 그녀의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에, 그리 자주 입버릇처럼 말하던 핑크빛 인생은 커녕 멍든 인생만을 살다 간 어머니. 그녀는 그저 소리 없이 울었다. 어머니,저는 꼭 핑크빛 인생을 살게요. 그녀는 영원히 잠든 어머니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남들보다는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선을 보고 만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와는 다르게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고 눈이 마주칠새라 싶으면 부끄러워 하다가 이내 옅은 웃음을 짓는 남자. 어쩌면 이 남자는 그녀에게 핑크빛 인생을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고, 그녀의 마음은 기대감에 일렁였다.
결혼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가 임신했을 때, 남편도 시부모도 기뻐했다. 첫 아이가 딸이었을 때는 시부모님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어서 동생을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기뻐해 주었다. 둘째도 딸이었을 때, 시부모는 대놓고 그녀를 냉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괜찮았다. 시부모에게 모진 말을 듣고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을 때면 남편이 그녀를 안고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괜찮았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 때면 그녀의 남편은 목을 가다듬고 서툰 실력으로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럴때면 비로소 그녀는 웃을수 있었다. 그는 좋은 남자였다. 좋은 남편이었다. 이런 것이 핑크빛 인생 아닐까? 나름대로 핑크빛 인생을 얻은 것이 아닐까? 언제나 당신과 같은 남편을 만날까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안심하고 계실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슬픈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세번째로 낳은 아이마저 딸이었다. 아이를 품에 안아든 채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결코 좋은 부모가 아니었던 아버지, 선하지만 불행에서 도망칠 수 없어 자신마저 불행하게 만든 언제나 음울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 그녀는 그래서 시부모에게 부모에게처럼 예쁨 받 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편도 내심 아들을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부모님과의 갈등은 악화되고, 눈물을 흘리던 어느날 그녀의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당신을 예뻐하지 않는 게 꼭 아들을 못 낳아서만은 아니야. 네가 좀 부모님께 잘 할수 없겠어?나도 중간에서 입장이 곤란하단 말이야."
언제나 그녀의 편일줄 믿었던 남편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마음 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은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얼핏 깼다. 노랫소리가 들려서였다. 남편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문이 조금 열린 베란다에서 남편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 그녀는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후론 언제나 수면제를 먹고 깊이 잠이 들었다. 노랫 소리에 깨지 않도록.
시간이 많이 흘렀다. 기구하게도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인생을 답습했다. 그녀의 남편이 언제부턴가 술을 마시고 와서는 내뱉던 욕설.그 욕설이 뺨을 때리는 것이 되고, 뺨을 때리던 것이 주먹으로 때리는 일이 되었다. 처음엔 무릎 꿇고 빌던 사과가 나중엔 형식적인 사과로, 이제는 그 형식적인 사과마저 없었다. 이젠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처럼 남편에게 맞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장을 보러 나갈 때에, 수군거리는 소리도 그저 못 들은 척 하면 그만이었다. 그나마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다행이라고 그녀는 그저 되뇌었다. 거울 속을 바라보면서 그 옛날 어머니의 얼굴을 참 많이 닮아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멍 자욱도, 그리고 도망치지도 죽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표정도. 남자를 잘 못 만나 결국에는 핑크빛 인생을 이루지 못한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인생.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를 또 임신했다. 이번에는 아들이었다. 늦게야 본 아들이지만 비로소 시부모님에게 제대로 된 며느리로 인정을 받았다. 툭하면 주먹질을 해대고 밖으로 나도는 남편. 이제는 이 세상에 없어 의지할 수도 없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죽이고 감옥에 있는 아버지. 잿빛 투성이 같던 그녀의 인생에 한 줄기 햇빛처럼 희망이 번졌다. 잿빛 인생에 싹이 움텄다.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고 있을때면 그녀는 정말로 행복했다. 그녀의 가슴에 당장이라도 꽃봉오리가 움틀 것만 같았다. 아아, 내 마지막 남자.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의 남편도 안겨주지 못했던 핑크빛 인생을 이 아이가 내게 가져다 주겠구나. 그녀는 행복했다. 남편에게 흠씬 맞은 날에도, 아들을 보고 있으면 씻은 듯 아픔이 낫는 것 같았다. 이제 이 아이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만난 제대로 된 남자였다. 그렇게 아들은 남편을 바라보며, 맞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자랐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만큼 늙은 것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의 마지막 남자조차도 그녀에게 핑크빛 인생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키가 남편을 거의 따라잡을 무렵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에게 상소리를 시작했다.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어머니보다도 훨씬 더 불행했던 것이다. 이제 그녀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더이상 그녀에게 찾아올 남자는 없었으므로.그녀는 핑크빛 인생을 살지 못했다. 더이상 핑크빛 인생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변변치 못한 삶에 그녀의 아들은 툭하면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먹고 죽어도 없다고 하면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 날은 유달리 심했다. 아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그래도 그냥 버티면 될 일이었다.
조금 더 심하면 조금더 오래 버티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그녀의 어머니의 멍한 눈빛에 돌연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집중해,집중하라고!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있냐고!" 손에 잡히는 대로 그는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그 중엔 유리 재떨이도 있었다. 그놈의 유리 재떨이. 어머니를 저 세상에 가게 만든 유리 재떨이. 그 유리 재떨이가 그녀의 이마로 날아오는 순간 그녀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녀의 생각은 맞았다. 그 재떨이는 그녀에게 죽음을 불러올 만한 뇌출혈을 일으켰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 그녀의 몸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핑크빛 인생을 살게 되는 거란다.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저도 핑크빛 인생을 살지 못했어요. 눈물이 괴어 흘렀다. 눈 앞에 시뻘개진 피가 눈물에 번져 선홍색이 되었다. 핑크빛이 되었다.온 세상이 핑크빛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어머니가 왜 마지막에 미소를 지었는지 알았다. 그녀의 마지막 남자는 그녀에게 비로소 핑크빛 인생을 선물해 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