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 학생운동 방식도 처음에는 기본적으로
비폭력 비무장시위의 형태로 이루어 집니다.
그런데 비폭력 시위는 전경, 백골단으로 부터의 폭력에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 크게 됩니다
- 사수대가 없는 시위는 경찰의 진압에 꼼짝 못합니다,
그래서 학생시위때 학생들을 보호하는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이 사수대입니다.
각 학교별로 사수대가 있는데
특히 서울쪽 고려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의 사수대가 유명했습니다.
경희대 사수대
동국대 사수대
전대협, 한총련은 각 지역별로 산하조직이 있었고
서울쪽은 서총련
부산 경남은 부울총련
전남쪽은 남대협, 남총련이 있었는데
전투력은 단연코 남총련 사수대가 타의 추종을 불허 했습니다.
그 남총련 사수대의 주 세력은
전남대의 오월대
조선대의 녹두대
충청총련 사수대가 전투를 벌이면 10분도 안되어서 깨지고 들어 옵니다.
부울충련 사수대가 전투를 벌이면 30분정도 버티고 깨지고 들어옵니다
서총련 사수대가 나가면 일진일퇴 밀리지는 않습니다,
남총련 사수대가 나가면 100m 밀고 올라갑니다.
이 친구들은 도망을 안갑니다.
보통 사수대와 전경들의 전투는
사수대가 화영병이나 짱돌을 던지고 공격합니다,
어느 정도 화염병 공격이 줄어 들면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앞세워 시위대를 공격합니다,
그 연기가 사라질때쯤 백골단을 선두로 치고 올라오는데
그런데 남총련 사수대는 다릅니다.
경찰이 최루탄과 지랄탄을 쏘아댄 후 연기가 사라질 무렵 아무도 없을 것이라 예상한 장소에
쇠파이프로 바닥을 치면서 그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남총련 사수대의 모습
다시 화염병 공격, 그러니 남총련 사수대는 안밀리고 오히려 100 미터 이상 진출하게 됩니다.
남총련 사수대가 전투를 하고 있으면 항상 든든합니다,
전대협 3기 한양대 집회에서
전설의 뚝섬대첩으로 한양대에 집결했고
-환상의 지하철 택. 뚝섬대첩-
한양대가 원천봉쇄되자 수천명의 학생들은 여러 지하철역에 나누어서 같은 지하철을 타고
한양대전 뚝섬역에서 동시에 내려 지하철을 가로막고 지하철로를 따라 한양대까지 뛰어 가고
이 시간에 맞추어 한양대에서 녹두대와 오월대가 전투를 벌여 경찰의 시선을 돌리는 사이
수천명의 학생들이 한양대 진입에 성공함.
당시 임종석 의장이 임수경의 평양방북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이에 정부는 전대협 간부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대규모 전투병력으로 한양대 학내진입을 했고
각 구역별로 사수대가 방어했지만
한양대병원쪽의 서총련, 경인총련쪽이 뚫리면서 학생들은
남대협도 할 수 없이 전대협 간부들을 호위하여 한양대 인문관으로 대피하게 됩니다.
다른 건물로 대피한 학생들은 차례로 연행되었고
몇날 몇일 인문관에 고립되어 있던 학생 수천명은 제2의 건대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지도부는 정면돌파를 결정하게 되고
처음에는 서총련이 선봉에 서기로 하였는데
남총련이 지원하고 남총련 사수대의 전투력을 믿고
오월대, 녹두대가 선두에 섭니다,
건물옥상에서는 위장을 위하여 수십명의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사이
오월대, 녹두대가 삼엄한 포위망의 전경중대로 돌진하면서 길을 터주고
이미 학내외 주변에 수만명의 경찰병력이 포진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인근 가옥의 돌담과 지붕을 넘어 퇴로를 확보합니다.
또 이들을 쫓기 위해 백골단과 체포조들이 따라다니르라 수많은 가정집들의 옥상과
기와가 거의 초토화될 지경이었다고 하지요.
결국 전대협간부들과
수천명의 학생들이 한양대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아마 학생운동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남총련과 남대협을 섞어서 썻네요, 알아서 이해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전대협 시기에는 남대협이었고
한총련 시기에는 남총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