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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完
게시물ID : history_131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7
조회수 : 1743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3/12/20 17:39:25
 
 
 
 
- 동진(東晉) 건국 -
 

 
 
 
서기 318년, 양주(楊州)의 건업(建業)으로 장안(長安)이 함락되고 황제는 피살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이 소식을 접한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의 안동사마(安東司馬)이자 강남(江南 : 양자강 이남)의 명문가 호족, 왕도(王導)는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왕도(王導)는 그 길로 왕부(王府 : 사마예(司馬睿)는 엄연한 왕(王)이므로 조정을 열 수있다. 왕부는 그 조정을 의미한다)의 신하들을 소집하여 그동안 구상해오던 일을 논의하여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구상해오던 일이란, 그들의 주군이자 사마씨(司馬氏) 진(晉) 왕조의 마지막 황족, 낭야왕(琅王) 사마예(司馬睿)를 황제로 옹립하여 멸망한 진(晉)의 대통을 잇게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사마예(司馬睿)는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으로부터 '진왕(晉王)' 의 작위를 하사받은 상태였다. 제국의 국호가 진(晉)인데 하사하는 왕(王)자리의 작호가 어떻게 진(晉)이 될 수있었는지에 대한 답은 당시 민제(愍帝) 사마업(司馬業)의 조치에서 찾을 수있다.
 

서기 316년, 장안(長安)이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민제(愍帝)는 일이 이미 틀렸음 예감하고 제국의 모든 권한을 강남의 사마예(司馬睿)에게 위임했다. 더불어 진왕(晉王)의 작위를 하사하여 그 작호가 보여주듯 사실상 제위를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암묵적으로 사마예(司馬睿)를 후계자로 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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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 중종(中宗)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
 
 

선제(先帝) 민제(愍帝)로부터도 인정받은 후계자였던만큼, 멸망한 제국을 계승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 계승자의 정통성 여부나 계승 명분도 어느 누구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서기 318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사마예(司馬睿)는 제위에 올라 진(晉)의 계승을 선포하니, 이가 곧 동진(東晉)이다. 따로 '동(東)' 자를 붙여 구별하는 이유는 당시 수도가 동쪽으로 치우친 강남의 건업(建業)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낙양(洛陽)이 수도였던 진(晉) 왕조는 서쪽의 진(晉)이라 하여 서진(西晉)이라 불렀음은 이미 몇번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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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王導).
 
동진(東晉)의 건국공신이자 이후로 삼대(三代)의 황제를 모신 명신(名臣)이기도 했던 왕도(王導)는 명문가 호족인 낭야(琅?) 왕씨(王氏)출신으로, 팔왕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와있던 사마예(司馬睿)를 보좌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건국 이후에는 아직 동진(東晉)을 지지하지 않던 강남의 여러 사족들을 규합함으로서 건국 후에도 강남에서 불안정했던 동진(東晉)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흔히 사마예가 유비(劉備)에 비유되면 왕도는 제갈량(諸葛亮)으로 비견될 만큼 동진(東晉)을 개국함에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서진(西晉)을 멸한 한(漢)의 유총(劉聰)과 당시 독자세력을 구축하던 석륵(石勒)을 역적으로 규명하고 서신을 보내 정벌할 뜻을 보여 다시한번 동진(東晉)이 서진(西晉)의 계승국가임을 천명한다.
 

이후로 동진(東晉)은 서기 318년, 건국을 시작으로 서기 420년에 멸망하기까지 약 100여년간 존속했으며, 그 다음으로 들어선 송(宋) 왕조를 시작으로 강남에서는 남조(南朝)가, 화북(華北)에서는 북위(北魏)를 시초로 보는 북조(北朝)가 들어서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라 부른다.
 
 
 
 
 
- 5호 16국 시대(五胡十六國 時代)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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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晉) 멸망 후에 화북(華北)지방에 도래한 5호 16국 시대(五胡十六國 時代)를 다 다루려면 한개의 연재 시리즈를 써도 모자랄 만큼
다사다난했던 시대였다. 시대명칭 그대로 5호(五胡), 다섯 오랑캐 이민족이 십육국(十六國), 무려 16개의 나라를 세웠던 시대다.

물론 동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약 130여년 간에 걸쳐 여러 나라가 흥하고 멸망했던 것이다.

윗 지도들이 보여주듯 각종 이민족들에 의해 나라가 우후죽순 세워지던 때였던지라 이들 모두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이 연재글들 중에 한번씩은 언급했던 나라들 위주로만 서술할까 한다. 한(漢)이나 전량(前凉), 성(成) 이 정도..
 
 
 

강남에서는 동진(東晉)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 이북의 화북(華北)지방에서는 정세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먼저 한(漢)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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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18년 무렵, 진(晉)이 멸망한 직후의 형국.
 
지도에서 보이듯 화북(華北)에는 진(晉)을 멸하고 들어선 한(漢 : 지도에서는 전조(前趙)로 나와있다)이 지배하고 있었다.
 
 

서기 318년, 한(漢)의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말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중에는 망국의 황제, 민제(愍帝)를 죽이는 등 황음무도한 행각들을 벌이다 사망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는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의 차남, 은황제(隱皇帝) 유찬(劉粲)이었다.
 
 
그러나 은제(隱帝) 유찬(劉粲)도 황제가 될 그릇은 못되었는지 '주색에 빠져 정사는 멀리하는' 전형적인 혼군의 면모를 보여 곧 외척세력의 반정으로 폐살되고 만다.
 
 
다음으로 황제가 된 사람은 유총(劉聰)의 사촌동생이자 진(晉)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던 유요(劉曜)였다.
 
 
이 유요(劉曜)의 대에 이르러 한(漢)은 국호를 '조(趙 : 본래 국명은 '조(趙)' 지만 나중에 세워지는 석륵의 '조(趙)' 와의 구별을 위해 전조(前趙)로 불렀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로 바꾸었는데, 중국의 한족(漢族)을 상기하게 하는 '한(漢)' 이라는 국호보다는 본래의 흉노(匈奴) 정체성을 되찾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황제가 된 유요(劉曜)의 당면과제는 당시 무섭게 팽창하던 석륵(石勒)과의 전쟁이었다.
 
 
일찍이 유연(劉淵)에게 귀순하여 그 휘하에서 진(晉)과의 전쟁에서 활약하던 석륵(石勒)은 차츰 독자세력을 모으며 성장해나갔고 진(晉)이 멸망한 이후에는 전조(前趙)로부터 독립하여 '조왕(趙王)' 을 칭하고는 '후조(後趙)' 를 건국하고 전조(前趙)와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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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後趙)를 건국한 석륵(石勒).
 
어쩌면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전조(前趙)에 귀순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될 만큼 그가 보여준 이후의 행보는 지극히 독립적이었다.
전조(前趙)에는 그런대로 복속의사를 표하면서도 남몰래 자신만의 세력을 꾸려나가는 희대의 야심가의 모습을 보여준 석륵은 길러놓은 그 힘으로 종주국이 되는 전조(前趙)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중에는 황제가 된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황제(明皇帝)다.
 
 
전조(前趙)와 후조(後趙)의 싸움은 서기 324년 무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석륵(石勒)의 탁월한 재능 덕택에 전세는 후조(後趙)쪽으로 기울어갔고 전조(前趙)는 여러 주(州)를 상실한 채, 수도는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고 영역은 관중(關中)일대로 좁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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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28년 무렵에 벌어진 전조(前趙)와 후조(後趙)의 전투.
 
파란 화살표 후조(後趙)군의 공격로이고 빨간 화살표 전조(前趙)의 요격로다.
전투가 벌어진 무대는 사주(司州) 일대로, 전조(前趙)의 유요(劉曜)는 낙양(洛陽)의 석륵(石勒)을 공략해 포위하고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승리에 도취해 방심한 나머지 석륵(石勒)의 반격으로 크게 패하고 본인은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한다. 이 전투에서 패한 전조(前趙)는 사주(司州)에서의 주권을 잃고 장안(長安)으로 후퇴했으며 석륵(石勒)은 사주(司州) 일대를 석권하고 전조(前趙)를 관중(關中)일대로 몰아넣게 된다.
 
 
마치 불과 수년 전에 전조(前趙)가 진(晉)을 압박하여 장안(長安)과 관중(關中)으로 몰아넣었듯이 말이다. 마치 전조(前趙)에 맞서 처절한 항전을 벌이던 민제(愍帝)의 망령이라도 되살아나 똑같이 앙갚음이라도 해주려는 듯이 이제는 전조(前趙)가 그 꼴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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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28년 무렵의 정세.
 
서기 318년 경의 지도와 비교했을때 전조(前趙)의 영역이 한눈에 봐도 줄어들었다.
그에 비해 후조(後趙)의 세력권은 넓혀져 있다.
 
 
 
유요(劉曜)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전조(前趙)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한 유희(劉熙)는 장안(長安)에서 항거하지만 이내 옹주(雍州)의 천수군(天水郡)이란 곳으로 도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안(長安)을 탈환할 기회를 엿보지만 곧 후조(後趙)의 토벌군에 의해 무너지고 유희(劉熙)와 전조(前趙)의 신하들은 사로잡혀 머지않아 처형당하니 서기 329년, 전조(前趙)는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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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後趙)의 화북(華北) 지배.
 
 
이리하여 후조(後趙)는 화북(華北)의 주인이 되었고 서기 333년, 석륵(石勒)은 제위에 올라 후조(後趙)의 개국을 정식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혼란했던 시기 중 하나로 여겨지는 5호 16국 시대였던만큼, 이 후조(後趙)도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한(漢)족의 염민(閔)이란 이에게 멸망당하고 염민(冉閔)이 일시적으로 세운 위(魏)도 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는 모용외(慕容廆)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세운 전연(前燕)에게 멸망당해 화북(華北)은 다시 혼란기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 혼란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훗날 탁발부(拓跋部)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에 의해 화북(華北)이 재통일 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전량(前凉)과 성한(成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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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량(前凉)의 최대 강역.
 
지금까지 계속 전량(前凉)이라 써오고 앞에 '전(前)' 자가 붙은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밝혀보자면 위에서 말한 후조(後趙)와 전조(前趙)의 경우와 같은 경우다. 전량(前凉)이 멸망하고 난 이후, 양주(凉州)에는 훗날 16국 중 하나인 후량(後凉)이라하는 나라가 들어서는데 역시 구분을 위해 전후를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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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의 감숙성(甘肅省). 전량(前凉)의 영역은 현재의 감숙성(甘肅省)과 거의 일치했다.
 
 
 
전량(前凉)의 시조가 진(晉)의 양주자사(凉州刺史) 출신인 장궤(張軌)라는 것은 앞에서 밝혔다.
 
 
한족(漢族)인데다 출신이 본래 진(晉)의 신하여서인지는 모를 일이나 장궤(張軌)의 사후, 그 아들인 장식(張寔)도 친진(親晉)노선을 이어갔다.
 

진주(秦州)의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를 기억하실 것이다. 진(晉)이 멸망한 이후에도 사마보(司馬保)는 진주(秦州)에서 계속 할거하며 전조(前趙)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순망치한이라고, 장안(長安)의 민제(愍帝)정권이 무너지면 그 다음 타겟은 진(晉)의 잔여세력인 자신이 될 것이란 걸 몰랐는지 결국엔 전조(前趙)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이때 장식(張寔)은 화북(華北)을 점거하고 기세등등했던 전조(前趙)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마치 진(晉)의 신하임을 표방하기라도 하려는 듯 진(晉)의 황족 사마보(司馬保)를 적극 지원하며 전조(前趙)에 항전한데다 민제(愍帝)의 연호인 '건흥(建興)' 을 계속해서 썼다.
 
 
또한 동진(東晉)이 세워지자 복속의사를 표명했으나 다만 그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았는지 서진(西晉)의 마지막 연호인 '건흥(建興)' 을 쓰기를 고집했다.
 
 
지금까지 보면 여전히 멸망한 진(晉)을 따르는 제후국처럼 보이고 16국 중 하나였던 독립국가 전량(前凉)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적어도 장식(張寔) 이후로 집권한 장무(張茂 : 장궤의 아들. 장식의 동생이다)의 대까지는.
 

역사에서는 실질적으로 전량(前凉)정권이 수립되는 때는 장무(張茂)의 뒤를 이은 장준(張駿 : 장식의 아들)의 치세부터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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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張駿).
 
그동안 장준(張駿) 이전의 군주들인 장식(張寔)과 장무(張茂)는 아버지 장궤(張軌)의 벼슬이었던 양주자사(凉州刺史) 직을 계속 세습해와서 공식작위는 한낱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보면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그냥 말그대로 군벌이라 부름이 타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장준(張駿)은 자신의 치세동안 정권 내에서 스스로를 대도독(大都督), 대장군(大將軍), 가량왕(假凉王)이라 자칭했는데 여기서 왕(王)을 칭한 것을 계기로 이때부터를 진정한 전량(前凉)의 시작이라 여긴다. 훗날 7대 국왕인 장조(張祚)에 의해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문왕(文王)으로 추존되었다. 여기서 황제로 추존되지 않은 이유는 전량(前凉) 자체가 왕국(王國)체제였기 때문.




장준(張駿)은 치세동안 전조(前趙)로부터의 거듭되는 복속 요구와 때에 따른 침공에 맞서 전량(前凉)의 자주권을 지켜냈으며 스스로는 왕(王)을 칭해 비로소 전량(前凉)이 이전의 장씨(張氏)군벌에 가깝던 모습을 버리고 16국 중 하나인 진정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한 인물이라고 평가 받는다.
 
 
장준(張駿)을 기준으로 전량(前凉)은 5대를 더 갔다. 장준(張駿) 이전의 추존된 군주들까지 치면 총 9대다. 존속기간은 시조 장궤(張軌)가 팔왕의 난을 피하고자 외직인 양주자사(凉州刺史)를 자청해 양주(凉州)에 자리잡았던 서기 301년부터를 시작으로 하여 한창 잘나가던 전진(前秦)에게 망하는 때인 서기 376년까지, 약 75년간이었다.
 
 
 
 
한편 성한(成漢)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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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成漢)의 강역.
 
여기서 성한(成漢)이 무슨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시련가 모르겠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윗글에 첨부된 여러 지도들을 보고 짐작하셨을 법도 하다. 성한(成漢)은 예전에 다룬 성(成) 정권이다. 뒤에 '한(漢)' 자가 붙었는데 이는 나중에 국호가 한(漢)으로 고쳐지기 때문에 초기의 국호인 성(成)과 말기의 국호 한(漢)을 붙여 통틀어 '성한(成漢)' 이라 부르는 것이다.
 
 
 
파저족(巴氐族) 이특(李特)-이웅(李雄) 부자가 익주(益州)로 진출하여 진(晉) 세력을 꺾고 성(成) 정권을 수립해 이웅(李雄)이 황제로 즉위한 것까지는 아실터이다.
 
 
그리고 성(成)은 이웅(李雄)의 탁월한 지도력과 승상(丞相) 범장생(氾長生)의 보좌로 특히 익주(益州)의 토착세력으로 대표되는 범장생(氾長生)의 호족규합 노력 덕택에 훌륭한 내치성적을 거두어 전성기를 맞아 약 30여년간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듯이, 성(成)은 이웅(李雄)의 죽음을 기점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름아닌 후계자 문제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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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李雄).
 
이민족이었지만 정치수완만은 좋았는듯. 뛰어난 내치로 성(成)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장본인.
하지만 이룩해놓은 업적도 후계자 문제로 다 날려먹으니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무제(武帝)다.
 
 
생전에 이웅(李雄)은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들이 아닌 형 이탕(李蕩)의 아들, 이반(李班)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즉 조카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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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成漢) 왕조 가계도.
한자가 즐비하지만 어느정도 급수 되시는 분들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가계도에서 보이듯 이웅은 형 이탕(李蕩)의 아들인 이반(李班 : 2번)을 후계자로 삼았다. 
이웅의 선택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옳았다고 하더라도 가족사 차원에서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이유인즉 이반(李班)의 효성과 덕망이 깊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다고 평들이 나있어 본인도 눈여겨보니 실로 그러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양자로 들이고 태자로까지 책봉해 못박아 둔다.
 
 
그러나 그 수많은 친아들들을 다 제쳐두고 조카를 후계자로 삼으니 이웅의 아들들이 반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웅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고 그저 불만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곧 훗날의 화근이 된다.
 
 
그러던 차에 이웅(李雄)이 병을 얻어 곧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태자 이반(李班)이 즉위하니 그가 곧 애제(哀帝)다.
 
 
애시당초 이반(李班)이 제위에 올랐을 때부터 정변은 예고되어 있었다. 눈치때문에 아버지 이웅이 사망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웅의 아들들이 눈엣가시 같던 이반을 가만둘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기회를 노리던 차에 오히려 이반(李班)이 그 기회를 제공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보이고 만다.
 
 
평이 그랬던 것처럼 이반은 정말 효성이 깊었는지,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웅(李雄)의 상(喪)을 치루느라 정사는 멀리한채 이웅의 시신이 든 관의 곁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한시라도 떠나지 않으려 했는데, 바로 이것이 빌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정사를 멀리하여 나라가 제대로 안돌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변의 명분이 되었으리라. 반역의 주모자 이기(李期)는 기회를 노려 이반(李班)이 혼자 이웅의 빈소에 머물러 있는 틈을 타 군사를 보내 죽여버리니 이때가 서기 334년으로, 본격적으로 성한(成漢)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다.
 
 
이기(李期)는 원하는 대로 황위에 앉았지만 그도 애초부터 황제의 자리에 앉을 그릇이 못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재위기간 내내 골몰한 일이라고는 다른 황족들을 숙청하는 일 뿐이었다.
 
 
피로 흥한 자, 피로 망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무분별한 폭정을 일삼던 이기(李期)도 결국에는 건녕왕(建寧王) 이수(李壽)라는 황족의 정변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렇다고 이수(李壽 : 중종(中宗) 소문제(昭文帝))도 황제가 되어서 잘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심한 폭정을 일삼기에 이른다.
 
 
수도 성도(成都)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이고 맘에 안드는 신하들은 모두 처형하는데다 황족들에 대한 숙청은 이기(李期)의 대의 그것에 비해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아 공포정치로 인해 민심을 잃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이때 국호를 '한(漢)' 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던 그도 서기 343년에 사망하고 그 아들인 이세(李勢)가 즉위하니 성한(成漢)의 마지막 황제 되시겠다.
 
 
부전자전이라고,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기에 이세(李勢)의 대에도 상황은 여전했다. 촉(蜀)의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핍박받던 황족들의 반란도 터져나왔다.
 
 
이렇게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나라가 휘청거리는 가운데, 동진(東晉)의 정벌로 멸망하니, 그때가 서기 347년이다. 총 5대 43년만에 단명한 나라였다.
 
 
 
 
팔왕의 난이라는 골육상쟁으로 진(晉)이 어지러운 틈을 타 세워진 나라의 최후도 골육상쟁으로 인한 것이라 하니 정말 역사는 되풀이 되는게 맞나 싶다.
 
 
 
 
그동안 연재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력이 모자라는지라 어디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그런 부분들 양해부탁드리고요. 예전부터 위진남북조 시대에 관심갖고 공부해왔던지라 파고들 수록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아 다른 사람과 공유해보자는 생각에 어쩌다 심심풀이로 역게에다 한번 써본 글이 결국은 스무 몇편에 걸쳐 쓰게 되었네요. 그냥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이해해주시고 즐기셨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읽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드리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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