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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항쟁2
게시물ID : sisa_8480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강냉
추천 : 4
조회수 : 60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2/13 20:32:30

이에 반발한 한총련측은 도심 곳곳에서 밤늦게 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중 일부 학생들은 다시 연세대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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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은 지방의 전경을 증원하여 5만여명의 병력으로 

8월 15일 2차 진압작전을 시도하여 11시 45분경에 서문진입에 성공하여 학생들을 

압박한다,

정문과 서문의 운동장을 중심으로 대치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한다.


8월 15일 야간에는 서치라이트와 조명탄을 쏘며 3차 진압을 시도하였는데

야간 진압은 대형참사의 위험으로 군사정권에도 하지 않는 이례적인 작전이었다.


경찰측의 강력한 진압시도에 한총련은 모든 일정종료와 집회를 취소하고

안전귀가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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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부는 폭력행위자 전원구속해 엄중 사법처리 입장을 고수하고

8월 16일 부터 외곽을 봉쇄하고 

19시 부터 4차 진압을 시도하여 학생회관과 서문 운동장까지 진출한다.

내외신 기자의 부담으로 8월 17일 0시를 기해 철수 한 후

8월 17일 11시 부터 병력 1만 2천명으로 5차 진압을 시작하여 이때 부터 당시 5천여명의 숫적 열세와 5번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 지친 학생들의 대부분은 

이과대와 종합관으로 대피 하게 되어 원치 않는 점거 농성에 들어 가게 

된다. 



학내로 쫓겨들어간 학생들이 연대 종합관과 이과대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펼치며

혈서를 쓰는 등 결사항전을 다짐했고 나름의 규칙을 정하여 잘 준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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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매일 같이 폭력시위임을 강조하면서 날조된 방송을 하였고 이에 힘을 얻어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한여름 건물안에 여러날 갖혀있던 수천명의 학생들은 살인적인 더위와 배고픔여학생들은 필수품인 생리대 부족 등으로 전쟁때도 겪기힘들 비인간적인 상황에 직면.

 

 

건물안에 남아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단순 참가자들.

그들의 안전귀가 요청, 단수, 정전 조치에 기본적인 생필품, 특히 여학생들의 생리대 

보급만이라도 허락해 달라는 요구를 무시하며 " 김정일의 쇠파이프 부대" "주사파들 적화통일 외치던 입으로 이제 집에 가고 싶다고 애원" 이라며 주사파의 엄마찾기 라는 비아냥 만 해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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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사수대를 중심으로 2개의 건물을 지키고 있었고 

화장실사용 외엔 교수연구실이나 실험실 등에 들어가지 않는 등의 자율적인 규칙을 

정해서 철저히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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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야만적인 단수, 생필품 차단 으로

20여명이 초코파이 하나를 나눠먹고 사수대가 물한컵을 나누어 먹는 상황에서도

8월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배고픔등으로 학생들은 하나둘 쓰러져 갔다.

부상당한 학생은 치료를 못해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고 여학생들은 생리대가 없는 비참한 상황이

몇날 몇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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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세대에서 학생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교를 빠져나가 동국대, 건국대, 서울시립대 등에 있던 노동자,시민단체, 학생 그리고 홍대에 있던

 PD 계열 학생등 5000여명은

연세대학생 구출 투쟁으로 신촌사거리 일대에서 연일 치열한 전투가 전개 되어

학생과 경찰 부상자와 연행자는 계속 늘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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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한총련 지도부는 사수대의 사투와 서대문로터리쪽에 따로 모여있던 주로 PD파 계열 학생 시민 시위대의 엄호로 연대서문쪽 경찰 포위망을 뚫고 연희교차로 쪽으로 탈출에 성공 홍대로 재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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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9일째 

05:00 

마침내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건물에 투입해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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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헐적인 투석전이 벌어 졌지만

경찰은 옥상에 특공대 50여명이 내려가면서 학생들의 저항은 무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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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진압개시 2시간 반만에 학생들은 백기를 들어 투항의사를 밝혔고

대부분 경찰에 순순히 연행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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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가담자인 여학생과 저학년생이 대부분이고 순수히 연행에 임했음에도

연행 과정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은 계속 되었다.

심지어 여학생들은 추행하거나  사수대 X 나 빨아라 같은 입에 담지 못한 말을 하였다.

이에 반항하는 남학생들은 수어명이 집단으로 폭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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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천여명이 남아 있던 이과대의 상황은 달랐다.

학생들이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었으며 위험물이 많은 이과대로는 섵불리 경찰의 진압이 어려 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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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분 한총련 간부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의 진압을 비난하며

끝까지 투쟁할 뜻을 밝힌다.

하지만 이는 이과대 탈출을 위한 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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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2천여명의 학생들은 이과대 담을 넘어 탈출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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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일대에서 쫓고 쫓기는 숨박꼭질이 두시간여 이어졌고

학생 천여명은 연행되었으며 나머지 천여명은 믿기지 않은 탈출에 성공한다.


8월20일에 연행된 학생은 3,499명이며,

8월12일부터 20일까지는 총 5,848명을 연행하여 총 462명을 구속하고 3,341명을 불구속입건, 373명을 즉심에 넘기고 1,672명을 훈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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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 462명중 진압작전 이전에 구속된 사람이 93명, 

진압당시 연행자중 구속된 사람이 36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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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유린


1996년 10월 9일, 당시 국회 내무위원회 서울경찰청 국정감사가 개최된 서울경찰청 회의실에서

추미애 국회의원이 연대항쟁 시 성추행 사건을 폭로하였다.


 - 당시 국정감사 속기록중 일부를 인용- 


"한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전경들이 우리 건물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야! 이 XX년들아. 니네 위안부 노릇 하려고 왔냐. 이런 식으로 맨날 소리 지르고 그랬습니다. 연행되는 날 돌 한 번 던진 애들한테 한 번씩 XX줬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 전경은 옆에 있는 애한테 배고프지 않냐. 나가면 밥 사주겠다. 밥을 사준다고 그런 다음에 여자애가 가만히 있었더니, 자기 혼자 그 애를 때리면서 웃더니 내가 밥 사줄 테니까 내 것도 XX줄래? 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애가 울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애를 곤봉으로 때리고 그 옆에 있던 선배 같은 사람이 '제발 그러지 마세요' 라고 소리쳤는데, 그 소리친 애를 헬멧 같은 것으로 찍고, 그런 식으로 욕설이 계속 되었습니다.

또 한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화장실 가는 것도 허용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생리대가 부족해서 생리가 새서 바지에 다 묻었는데도 그것을 보며 낄낄거리면서 웃었고 짐승을 구경하듯이 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지금 폭력에 대한 대책이 빨리 세워져야 된다고,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한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허벅지와 어깨 등을 많이 맞았습니다. 머리채도 쥐어 뜯겼습니다. 심지어는 경찰이 자신에게 침도 뱉고 욕설도 많이 했는데, 흔히 듣는 썅년 따위의 욕이 아니라 'X같은 년들'이라고 하면서 여자의 신체를 드러내는 욕설을 많이 퍼부었습니다. 

또 다른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전경이 계속해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너희는 북한에 가서 김정일 기쁨조나 하거라. 이 XX년들아. 그년들 XX하게 생겼다. 그리고 어떤 형사는 가까이 다가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형사 오늘 밤 수청 들게 한 명 골라보지.'

한 학생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전쟁터에서의 포로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입니다. 전경들은 자기들끼리도 삼청교육대와 다름없다고 낄낄대면서 좋아했습니다. 사람을 사람처럼 다루지 않고 개 다루듯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포로를 잡은 것 같은 취급을 했습니다.

여학우들은 언어폭력을 당했습니다. 수시로 '이 XX년아, 이 창녀만도 못한 년아, 너 몇 놈하고 잤니.' 이렇게 말했고, 남학우들에 대해서는 '너는 몇 년하고 해 봤느냐?'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유치장에 가서도 '너희들은 개만도 못한 애들이다.' 이렇게 수시로 언어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한 여학생은 한동안 잡히는 꿈에, 쫓기고 맞는 꿈을 연속해서 꾸는 바람에 잠도 못 잔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한 추미애 의원이 폭로한 바로는


예상처럼 경찰의 1차 성추행 범죄가 벌어진 곳은 연세대에서 연행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진압 작전에 동원된 전·의경에 의한 범죄였다. 이들은 건물에서 여대생들을 연행하며 마치 기차놀이를 하듯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몸을 숙여 이동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여학생이 몸을 숙이면 그 뒤에서 여학생의 가슴과 엉덩이를 뒤에서 만졌다고 한다. 이에 여학생이 놀라 소리 지르며 몸을 일으키면  그 순간 경찰은 곤봉으로 여학생의 머리나 등, 옆구리 등을 사정없이 내려쳤다는 것. 이 같은 일들이 연행 과정 전반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당시 피해 여대생들의 주장이었다.

1차 성추행 범죄가 전, 의경에 의해 벌어졌다면 그다음 가해자는 직업 경찰관이었다고 한다. 연세대에서 연행된 학생들이 이후 서울 시내 25개 경찰서로 분산되자 조사 대기중인 여대생을 상대로 이들 경찰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추행을 했다는 것이다. 한 여학생의 증언이다.


"씨팔년 등등은 욕도 아니었어요. 난생 처음 듣는 욕을 하는 경찰을 보면서 느낀 것은 내가 왜 저런 욕을 들어야 하나. 차마 제 입으로 발설하기 어려운 성적인 욕설을 그 경찰들이 하는 것을 보며 느낀 것은 비애였습니다. 그들은 여학생들이 사수대 남학생들의 위안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끔찍했습니다." 

또 다른 여학생의 증언은 더욱 끔찍했다.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꼭 데모질이야. 아무도 안 놀아 주니까 꼭 데모를 해요. 야. 맞지? 남자애들한테 퇴짜를 맞으니까. 야. ××(여자 성기 표현)는 어떻게 씻었냐? 어휴, 드러운 년들. 열흘 동안 닦지도 않았지? 암컷 내 난다. 야, 얼마나 대줬냐? 사수대 수고했다고 그 짓 해줬지? ×같은 년들."  


입에 담기에도 끔찍한 만행들이 벌어진 것이었다.


왜 이런 만행들이 벌어졌을까?

진압과정에서의 충돌은 그럴수 있다고 치더라도 이미 연행되어진 학생들에게 

이토록 잔인한 방법을 동원한 것은 김영삼 정권의 학생운동탄압을 위한 의도적인 

경찰폭력의 방관행위였다,



 

이 사건의 정치경제학적 배경이 더 중요한데당시 96년은 바로 다음해 닥쳐올 IMF 환란의 전주곡이 울려퍼지던경제적 침체기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국란이 발생하기 직전 나빠지는 경제사정으로 민심을 잃어가던 김영삼 정권의 무리수와 커져가는 학생운동에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던 한총련 지도부의 좌경모험주의가 부딪혀 빚어진 참극이었다


자국민 그것도 대학생들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펼친 YS의 똘끼도 놀랍지만쇠파이프 달랑 들고 통일운동을 사수하겠다며 나선 학생들을 건물에 수일간 가둬두고자진해산 하겠다는 학생들을 상대로 식수와 생리대 반입조차 금지한 비인도적인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한 미친짓.

 

이 사건의 결과 소위 '전투적 학생운동'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몰락한다. 

그동안 민주화 운동의 주력으로 인정받으며 경찰의 모진 탄압과 폭력진압에도 집회와 시위를 보호하던 사수대가 결국 정권이 작심하고 군대를 동원하자 패퇴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줬으니

학생운동 물리력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셈.

 

또 이 사건 전후로 대대적인 공안탄압이 벌어져 구속수배검거의 광풍이 몰아침교정이 폐허로 바뀐 것을 목격한 연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운동권학생회에 대한 학우대중들의 반감이 퍼져나갔고그전까지는 학생운동의 민주적 정당성을 인정해주던 학우대중들의 생각이 변하고

그 결과 우익어용학생회들이 힘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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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총련 지도부의 좌경모험주의가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고해서

평화적인 통일행사를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막고 강제진압한 야만적인 정권의 

행태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원천봉쇄등의 강경진압이 강경투쟁을 낳고 희생자들을 만드는 것이다.


이 시대를 겪었던 지금의 우리들은 이 날을 기억조차 하기 싫어한다.

학생들의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던 학생운동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과 무모함에 실망했고

그 무서웠던 폭력과 공포, 치떨리는 수치와 분노는 아직도 응어려져 가슴 한켠에 존재한다.


한총련의 무모한 투쟁과 정부의 야만적인 폭력진압 사이에서 순수한 열정만으로 그것들을 감내한

그 날의 학생들은 이 시대의 산 증인 들이고 역사의 기억자들이다.


열심히 잘 버텨주어서 고맙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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