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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 4. 밤나무산의 기구한 출생
게시물ID : panic_925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rodiy
추천 : 20
조회수 : 243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2/15 20: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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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이야기 시작합니다.

고모부의 조부에 얽힌 사연으로부터 고모의 출가와 함께 밤나무 동산의 상속 그 농지의 관리를 필요로하여 누나의 권유로 그곳에 아버지의 이주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태어나게된다. 아버지가 먼곳으로의 이주로 인하여 난 집안 선대의 역사를 잊고 집안의 내력은 그렇게 묻혀 버릴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 증조부의 묘자리에 시청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묘지 이장도 없었을테고 내가 그런일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테고 그렇게 잊혀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이야기 들 일것이다. 

지금 우리들 한사람에게 일어나는 온갖의 일들은 모두 그만한 사연의 실타래와 연관한것이다. 당착한 사건에 비관하지 않고 그 연휴를 푸는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이고 그 이유로 우리는 태어난것이다.

어머니는 몸이 약하여 내위로 형과 누나를 조산하여 자라나지 못하고 잃었다. 자연적 의미로 볼때 밤나무 동산의 기운이 만만치 않은 이유일수도 있다. 어머니는 용하다는 민간의 한의사를 찾아 유산과 허약한 몸을 진단받고 생리후 지어 받은 한약재를 닳여 복용하면 효과를 볼수도 있겠다하여 그봄 4월에 생리후 약재를 복용한후 나를 가졌다.

그리고 12월 7일에 내가 태어났으니 나는 8삭동이 미숙아였다. 새벽 인시 3시가 좀넘어 태어났지만 난 울지도 않았고 숨쉬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유산이었고 집에있던 군용 모포에 싸서 날이 밝으면 앞산 공동묘지에 묻기위해 윗목에 놓아두었다.

아버지는 네번째 아이도 잃었다는것에 집에 머무르는것이 속상하여 걸어서 한시간 반정도의 읍내에 누나를 찾아갔다. 새벽에 갑자기 찾아온 남동생에게 고모는 이유를 물었고 내용을 말하니 아버지를 꾸짖었다.   

유산이라해도 산모인 어머니는 산후조리가 필요한데 미역국도 끓여주지 않고 여기에 오면 어쩌냐는 이유였다. 그날 아버지가 고모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온날 나는 다시 앞산에 흙으로 돌아갔을것이다. 

삶의 시작에서나 삶의 중간에서 남다른 시련이 있음은 남과다른 할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힘들때 마다 나는 노력한다. 그 의지는 지난 과거사에 일부 연휴한다. 

고모와 함께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고 고모가 미역국이라도 끓이기 전에 유산된 나를 살폈다. 당연히 숨쉬지 않았고 어차피 죽은아이 매나 쳐보자는 생각에 고모는 사정보지 않고 조산한 미숙아의 엉덩이를 사정보지 않고 때렸다. 

나는 그때의 상황을 여러번 악몽으로 꾸었다. 그 상황을 기억한다는건 말도 되지 않지만 내가 가위에 눌리거나 하는 상황에 꾼꿈은 형상적이지 않고 어떤 큰 바위가 양쪽에서 내머리를 고통스럽게 짓누르는것 같다가 편안해 지는듯 하더니 다시 내몸을 쥐어흔들듯 몸서리쳐지는 상황을 반복하여 여러번 꿈꾸었다. 

후에 조금 나이가 들때즈음 나는 그 상황을 유추해냈다. 머리를 짓 누르는 바위는 태어날때의 어머니 자궁벽이었고 몸서리침은 고모의 방문뒤였다는것을.... 백프로 정확한것은 아니지만 그 상황과 잘 맞물려진다.

고모가 내 엉치를 여러번 때리자 실피리 소리처럼 끼잉하고 소리를낸후 겨우 숨이 튀었다. 가난한 살림에 인큐베이터는 꿈도 꿀일이 아니었고 나는 아랫목에 폭 쌓여져 질긴 운명선을 가졌는지 죽지않고 그겨울을 살아났다. 한돌이 지날때까지 난 걷지도 못했다. 

남들 다크는 사춘기에 나는 키순으로 기호 1번이었고 친구들보다 일이년쯤 늦은 발육을 보였다. 어머니는 날보기가 안탑갑고 속상하였지만 그 비밀을 말하지 않았고 나에게 입영영장이 나오고 군에 입대할때즈음 그 출생의 비밀을 말해 주었다.

어릴적에 그 이야기를 알게되면 덜 팔푼이라는것에 상처 받을까봐서 그랬단다. 그러고보니 어릴적 부모님이 고모한테 평생 잘해야 한다.! 그랬던건 내 생명에 은인이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 내가 나아지면 보답도 해야 할것이다. 그것은 내 여러가지 삶의 임무중에 하나이다.

고모댁은 비교적 부유했다. 고모부는 6.25당시 부사관 출신이자 손등쪽에 상해를 입어서 상의용사였기 때문에 근대에 공무원일을 하였고 상속받은 이삼만평의 동산을 소유한 소작농들의 지주이기도 했음이다. 내가 세살때즈음 고모부내외는 밤나무산 중앙에 좋은집을 지어서 이사왔고 우리집과 60여 미터정도의 위치였다. 

그리고 또 일년후 고모집과 우리집 대각선 사이 큰고모네가 자리를 얻어 조그마한 집을지어 이사들어왔다. 고모부는 이복형제가 있었지만 교류가 적어 외로운 편이라서 고모의 동기간이 같이 모여살면 즐겁고 좋은 일이라 여겨 흔쾌히 동의 하셨다. 이글을 빌어 매우 고마운 분이다. 

하지만 세가구가 살아가면서 조금의 오해가 생겼고 아버지가 홧김에 이사를 결정하였다. 내가 여섯살즈음 우리집이 아래마을로 따로 이사를 한후 얼마후 앞편에서 말했듯 아버지는 중병을 얻어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이사를 잘못가서라는 이야기도 있었을성 싶다.

큰고모와 아버지의 불화는 조그마한 일이었지만 다섯살 정도의 어린 나로인해 발생했다. 큰고모집에 시멘트로 손볼것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목수이었기 때문에 시멘트 미장칼이 있었고 그것을 빌려주었는데 큰고모부가 급히 쓰려던차에 나는 

그 도구의 모양이 자동차 비슷하여 모래더미에 가지고 놀다가 생각없이 집에까지 가져와 놀았고 마당에 방치된 연장은 별생각없이 우리집 헛간에 넣어졌고 그것의 값이 얼마나 한다고 빌려주는것을 내키지 않아 말도없이 되찾아 갔다는 오해에서 불화가 시작되었고 그간의 불만 몇가지가 증폭되어 일이 생겼던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30대였으니 아직은 젊었고 그럴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4년 정도 지난후 고모부는 면내에서는 최고의 사업장이었던 적벽돌 공장에 이사로 참여하게되고 보증을 선게 잘못되어 밤나무동산은 날아갔다. 

그와함께 나의 고향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곳에 두번째 연화(세라믹 벽돌)공장이 들어섯기 때문이다. 당시 남의 땅이되고 공장개발로 인하여 고모부의 증조부 묘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면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묘지를 열으니 동산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묘지 내부에는 물이 가득차서 시신의 근거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증조부의 상투만 달랑 남아있었다. 당시 지관이 말하길 이터는 삼대가 흥하고 그 삼대째에서 망하는 묘자리라고 했다. 

물론 결과론적이겠지만 야반 상경하여 문과에 급제한하고 벼슬한 앞글의 고모부 조부의 일화로는 명당이고 고모부의 보증후 부도는 지관의 말이 맞을게다. 그러한 일이 있던중에 애석하게도 큰고모부는 병을얻어 돌아가시고 큰고모도 건강이 좋지 않아졌다.

그런일들이 있은후 삼년정도 지날쯤 우리집은 또다른 가족거사에 당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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