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펌] 개구리 소년 이야기 1편
게시물ID : sisa_131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빅장
추천 : 0
조회수 : 22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5/02/05 11:38:45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제 1화    잊혀지지 않는 기억








2000년 어느 봄날이었다.  바다와 육지가 곡선으로 만나 속삭임을 주고받는 경계선에서 나는 한 젊은 여성과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침묵은 깨지기 위해서 그토록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던 것일까.  선주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저는 봄이 따분해서 싫어요.” 

“...........” 




선주의 갸름한 얼굴 윤곽이 멀리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득 선생님 강의가 생각나요.  넓은 생활공간은 기억공간을 넓혀 준다고 했던 거요.  이렇게 드넓은 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지난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라요.  그런 걸 추억이라고 하나 부죠?” 

“.........” 

“제가 선생님께 처음 전화했던 날 기억하세요?” 

“..........” 

“굉장했죠.” 

“아직도 그걸 잊지 않고 있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화가 치밀잖아요.” 

“뭐가?” 

“저에게 유일하게 C학점을 주신 게 바로 선생님이거든요.” 

“하...하...하.  그럴싸하게 보이는 그 엉터리 답안지?” 

“문제는 제가 그 C학점을 받게 된 게 순전히 선생님 때문이라는 거죠.” 

“나 때문이라고?” 

“예.” 

“그 C학점도 사실은 많이 봐 줬던 거야.” 

“알아요.” 

“근데?” 

“채점을 어떻게 했는지 공개하라며 막무가내로 대들었죠.  기억나죠?” 

“..........” 

“제가 공개하라는 것은 그게 아니었어요.” 

“.........” 

“저는 사범대에서 수학을 전공했어요.  순전히 부모님 덕분이었죠.  하지만 저는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들고 싸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캐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요지가 뭐야?” 

“저는 기자나 수사관 쪽인 거 같아요.  범죄심리학을 공부해 보고 싶었어요.  범죄행동에 대해서 모든 게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방황을 정리하고 심리학과에 편입하게 된 거죠.” 

“아무튼 특이해.” 

“고생해서 번 돈으로 등록한 첫 학기!  첫 시간!  거기서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됐고요.  그렇게 그 C학점의 탄생은 시작됐던 거죠.”  

“그래서?” 

“이렇게 앉아 있는 선생님과 저의 모습을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요?” 

“.........” 

“연인?” 

“까불지 말고!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좋아요.  어차피 선생님하고 저는 그쪽에서 만나야하니까요.  그날 아침 그 설레는 마음을 다스리며 저는 맨 앞줄에 앉았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섰어요.” 




하얀 나비들의 소리 없는 군무가 노란 유채꽃 능선에 한 폭의 봄을 흩뿌리고 있을 때 연 붉은 복사꽃 향기가 나른하게 주변으로 번지고 있었다. 




“선생님이 고개를 드는 순간 저는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왠지 아세요?” 

“..........” 

“그 순간 저는 ‘어! 저 남자를 어디서 봤는데!’ 라는 한 마디 소리를 스스로 듣고 있었거든요.” 




나는 짧게 고개를 돌려 마치 처음 보는듯한 표정으로 선주의 옆모습을 훔치다가 이미 긴 세월이 흘렀음을 확인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를?” 

“예.” 

“어디서?” 

“모르죠.  하지만 분명히 봤다는 생각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하...하...하.  그래서?” 

“왜요?” 

“계속해 봐.”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선생님의 모든 것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어요.” 

“하...하...하.  그러느라 공부를 못했다?  그래서 내 책임이다?” 

“아닌가요?” 

“그렇게도 핑계가 궁했니?” 

“궁금증에 걸려들면 그것을 풀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이상한 성미거든요.  그것이 병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래요.  그게 저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선생님이 교단에 설 때마다 저는 선생님의 눈, 코, 입, 어깨, 걸음걸이, 뒷모습, 등등 모든 것을 샅샅이 더듬어가면서 어디서 봤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그것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포기했죠.” 

“당연하지.” 

“당연하다고요?” 

“그거 왜 그런 줄 아니?” 

“..........” 

“인간의 기억현상 중에 <데자뷰>라는 게 있어.  처음 와본 곳에서 순간적으로 전에 와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든지 아니면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현상이야.  그런 현상은 주로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선주가 그런 것을 느꼈다면 아마도 그 당시에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겠지.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거든.”   

“그래요?  정말 그럴까요?” 

“.........”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그 주장을 반론의 여지없이 거부합니다.” 

“그래?  무슨 근거로?” 

“그 미스터리는 풀렸어요.  그 당시 저의 기억은 정확했어요.  저는 선생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멀리 눈 아래로 펼쳐지고 있는 파도의 너울거림을 따라가면서 나는 기억공간의 후미진 곳에서 잠시 방향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호...호...호.  왜요?  뭐 집히는 게 있으세요?” 




선주의 직선적이고 제동되지 않는 표현들이 쏟아질 것을 예감하고 나는 그것을 침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선생님의 정체를 알아요.” 

“정체?!” 

“이제는 말 하세요.” 

“...........”  

“똑 똑 똑.  선생님은 누구세요?” 

“..........”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까 제가 그랬죠.  우리 사이가 무슨 관계냐고요.  저는 선생님의 파트너에요.” 

“파트너?” 

“예.” 

“무슨?” 

“그 사건!” 

“그 사건?!” 




선주가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그 상황을 피해보려고 나는 슬그머니 잔디에 등을 붙이고 구원자 하늘을 대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내가 숨을 공간은 없었던 것일까.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과거의 기억들이 뇌세포가 아리도록 새록새록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그 괴로움을 잊어보려고 길게 한 숨을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의 목이 뎅그렁 단숨에 잘려 나갔던 그 패전의 현장으로 스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들었니?” 

“대학원에 진학하고 처음 학회에 가서 우연히 들은 이야기에요.  심리학의 본 고장 미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으로는 선생님이 처음일거라면서요?” 

“...........” 

“정확히 말해서 선생님은 물리심리학자라면서요?” 

“..........” 

“로버트 솔소 박사의 수제자가 바로 선생님이었다는 말에 저는 놀랐어요.  제가 이번 학기에 교과서로 쓰고 있는 원서도 솔소 박사가 쓴 책이에요.” 

“그래서?”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은 무대에서 사라진 거예요.  마치 실종된 사람처럼 말에요.  그 일로 선생님은 카이스트에 사표를 제출했고..., 청운의 꿈을 허공에 날리고 지금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겁니다.” 

“흐...음...!” 




나는 쓰디쓴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한 평 남짓 누워있는 그 자리가 지구의 심연으로 그대로 내려앉기를 간절히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기억하기 싫은 부분을 들추게 해서요.  하지만...” 

“하지만 뭐?” 

“저는 알고 싶어요.” 

“다 들었을 거 아니야.” 

“아뇨.  전혀 듣지 못했어요.” 

“그럴 리가?” 

“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선생님이 그 사건에 연루되어 그곳을 파게 됐고..., 그리고 사체가 나오지 않자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됐을 거라는 것 밖에 아무 것도 몰라요.” 

“..........” 

“헌데 저는 지난 3년 동안 선생님을 유심히 관찰했던 사람이에요.  반드시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걸 알아서 뭐하게?”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해?  노처녀가 신경 써야할 일은 따로 있을 텐데.” 

“놀리지 마세요.  저는 지금 진지해요.” 

“알 필요도 없고..., 오래 전에 모두 잊었어.” 

“잊었다고요?!” 

“..........” 

“1996년 1월 12일 오후 5시경 성난 주민들에 에워싸여 경찰관의 보호를 받으며 사건현장을 빠져 나오는 선생님의 모습을 제가 TV화면에서 봤던 겁니다.” 

“..........” 

“그러니까 저의 기억은 정확했죠!” 

“..........” 

“그 뒤로 선생님은 구속됐죠.  그리고 법정에서 징역 1년을 구형받았죠.  다행히 어느 판사의 아량으로 징역형은 면할 수 있었고요.” 




나는 단번에 몸을 곧추 세워 선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들은 거야?!” 

“말했잖아요.  저는 궁금하면 아무것도 못한다고요.  요 며칠 동안 선생님과 관계된 기록들을 모두 뒤져봤어요.” 

“허...!” 

“죄송해요.” 




한동안 침묵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다 알면서 뭘?” 

“아뇨.  모든 게 다 있어요.  헌데 선생님이 왜 그곳을 파게 됐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어요.” 

“..........” 

“왜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안다고?” 

“예.” 

“..........” 

“선생님이 그 뒤로 겪어야 했던 사회적 응징이 너무 컸던 거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말예요.  학회에서 만난 그 교수님에게 들었어요.  교수임용심사 마지막 단계에 올라간 그 다음 날부터 주변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대요.” 

“흠...”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를 살인범으로 몰고 그것도 부족해서 아이들의 사체는 집안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사람이라고요.  그래서 심리학회에서도 재명당한 사람이라고요.  물론 그것은 치명적이었겠죠.” 

“.........” 

“생각해 보면 그런 식의 이야기가 어디 학교에서만 나돌았겠어요.” 

“..........” 

“지금도 알게 모르게 어떤 응징을 받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요.  그 한마디면 선생님은 사회적으로는 사형선고를 받은거나 다름없었을 거예요.” 

“그만해!” 

“아뇨!” 

“해서 뭐하게?!” 




나의 격해진 목소리는 잠시 제동력을 잃고 있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달팽이처럼 속으로 숨어버린 거예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말이죠.  맞죠?” 

“...........” 

“맞죠?” 

“잊었다!” 

“천만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요즈음도 그 사건에 대해서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전 다 알아요.” 

“알아?  뭘?”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충격적으로 기억하게 된 것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고요.  단지 잊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요.  그 사건은 선생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잊었다고요.  그걸 믿으라고요?”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뭐야?” 

“말해 주세요.  왜 그곳을 파게 됐는지.” 

“그건 단순한 오판이었어.” 

“오판이었다고요?” 

“그래.  그것은 오판이었어!” 

“바로 그거에요!” 

“그거라니?” 

“어떻게 그런 황당한 오판이 나오게 됐느냐 그거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황당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흐...음...!”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예요.” 

“선주 머리 속에 그런 이야기를 집어넣는다는 자체가 잘못된 일이야.  그냥 어떤 미친 인간이 벌인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  그게 세상을 편하게 사는 요령이니까.” 

“실망이에요.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나요?” 

“...........” 




선주의 눈길은 한동안 수평선 어딘가에 유순하게 머물고 있었다.  그건 또 다른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선주의 목소리는 강도와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영웅심에 들떠서?  파서 나오면 한 건하고 아니면 말고 그런 식의!?” 

“..........” 

“선생님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분이었던가요?  정말로 그래요?” 

“..........” 

“아니면 두려운가요?  그래서 똥을 입에 넣고 달고 맛있는 양 우물거리고 있는 그런 사람인가요?” 

“..........” 

“그런 겁쟁이였나요?” 

“말이 지나치다!” 

“그럼 아닌가요?!” 




선주의 커다란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모든 것을 다 토해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나를 조여 오고 있었다.  나는 선주가 이끄는 방향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꽤나 긴 시간이 흐르고 뭔가를 포기한 듯한 골 깊은 한 숨소리에 이어 나는 어느 듯 나의 목소리를 스스로 듣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도 태양은 솟아올랐어.” 

“그날 아침이라면?” 

“파던 날 말이야.” 




선주는 나의 턱밑으로 시선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한 번쯤은 빼먹어도 될 텐데 말이야.” 




나는 기억창고 어딘가에 걸려 있을 오래된 달력에서 그날 하루를 지워보려고 한동안 허둥대고 있었다.  그 어리석음을 그 자리에 내 팽개치고 얼른 현실세계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수평선 위에 내걸린 붉은 태양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저 태양이었겠지.  동이 트는 모습을 바라보며 둘 중에 하나는 끝없는 벼랑으로 추락해야하는 날!  오늘도 이렇게 해는 솟는구나하는 생각에...” 

“.........” 

“그때 내 심정은 어떠했겠니?” 

“.........” 

“알 리가 없겠지.  내가 아니니까.” 

“..........” 

“햄릿 읽어 봤니?  햄릿의 아버지는 스웨덴의 왕이었어.  헌데 동생이 자기 형을 독살하고 왕위와 햄릿의 어머니까지 자기 부인으로 삼았거든.  비극이지.  어느 날 밤에 죽은 왕이 혼령으로 아들 앞에 나타나 복수를 당부하고 동이트기 전에 사라진 거야.  그제야 햄릿은 자기 아버지가 독살됐다는 심증을 가지게 되었지만 확증이 없었기 때문에 복수의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어.  증거를 잡기 위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치욕을 인내하면서 계략을 연구했던 거지.  햄릿은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어.  그날 동이 트는 창밖을 보면서 햄릿 이야기가 떠올랐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단 물러서야 할지 아니면 파서 나오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도 승부를 해야 할지 그 기로에서...” 

“..........” 

“내 판단이 틀렸다고 선언하고 물러서야 했을까?” 

“..........” 

“결국 그 사건을 해결하려면 정면승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 

“나는 그날 아침에 이성을 잃었어.  왠지 알아?” 

“..........” 

“화가 치밀었거든!  분노 말이야!” 

“분노요?” 

“그래.  그것은 분명히 분노였어.  약자의 분노!” 

“..........” 

“내가 그 사건을 해결해 보려고 경찰로, 검찰로, 그리고 언론사로 돌아다니면서 들었던 공통된 이야기가 뭔 줄 아니?” 

“..........” 

“당신 말이 옳다는 거야.  분명히 뭔가 있다는 거야.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야.  생각!  그 신중한 생각!” 




나는 높아진 목소리를 낮추려고 잠시 흰 구름이 흘러가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행동이 없느냔 말이야!?  왜?!” 

“..........” 

“그렇게 신중하고 현명했던 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왜 그 사건에 대해서 단서 하나 확보하지 못하고 있느냔 말이야.  그리곤 결국 그 삽자루를 나에게 건네주느냔 말이야.” 




나는 그 절실했던 기억의 끝을 더듬느라 잠간씩 멈추고 있었다. 




“그래! 너희가 용기가 없으면..., 그렇게도 책임지는 게 두려우면..., 내가 삽을 들마.  그 대신에 내가 희생되고 나면 그때는 너희가 나서라.  그래서 그 아이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 어디에 묻혀 있는지 밝혀다오.  그날 아침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어.” 

“..........” 

“그렇게 해서 그 운명의 삽은 내 손에 들려 있었던 거야.” 




봄 햇살이 선주의 긴 속눈썹에서 스펙트럼으로 부서져 깜빡일 뿐 진공상태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흠...!  하지만 이제는 잊었다.” 

“왜 그렇게 잊은 척 하는 거죠?” 

“선주는 이해 못해.” 

“뭘요?” 

“그건 가방 들고 산으로 출근해 본 사람만이 아는 거야.” 

“...........” 

“...........” 

“좋아요.  다 좋아요.  그럼 정의는요?” 

“정의?!  정의라고 했니?  하...하...하...”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가로부터 자유스러운 사람은 없다고요.  남을 평가하고 남으로부터 평가를 받고 그렇게 이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인간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으로부터 평가받는다고요.  그때는 자신이 자신에게 ‘너는 정의롭게 살았느냐?’ 라고 묻는다고 했잖아요.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은 피할 수도 없고 왜곡될 수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어느 광장에 우뚝 서있는 동상처럼 보였어요.  정의롭게 산 사람이 마지막 승자라고 했던 말!  제 가슴에 금자탑으로 우뚝 서 있는 그 말!  제가 사는 날까지 바라볼 그 등대!  그거 다 빈 말이었던가요?” 

“.........” 

“그래요?!”   

“정의!  멋있는 말이지.  하지만 뭐라고 해도 난 잊었어!”  

“아뇨.  선생님은 지금도 그 사건을 추적하고 있어요.” 

“허...!  좋아.  뭘 추적하고 있는데.” 

“서울 호 80에 x23x 그레이스 승합차!” 




결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나의 미간은 일순간에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심각성의 에너지는 곧바로 선주에게 들이 닥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말했잖아요.  선생님하고 저는 이미 파트너 관계라고요.” 

“너 누구야?!” 

“저는 선생님의 제자에요.  지금은 파트너고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거니?”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는 황급히 솟아오른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단순히 맹랑한 아가씨로만 알았던 게 실수였다는 생각에서 방향을 급선회하고 있었다. 




“좋아!  파트너 하지.  까짓것 어려울 거 없지.  단 조건이 있어.” 

“뭐죠?” 

“정체부터 밝히고...” 

“걱정 마세요.  저는 첩보 걸은 아니니까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미모의 절도범이라고나 할까.  호...호...호.” 

“절도범?” 

“학회에 다녀 온 이후로 저는 선생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에 생각지도 않은 횡재를 만났죠.  서영이 알죠?” 

“..........” 

“서영이가 연구소 열쇠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뭐?!” 

“서영이가 서울로 올라갈 때 열쇠 회수하는 것을 선생님이 깜빡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 서영이가 이번에 저희 대학원에 입학했거든요.” 




나는 황급히 기억창고에 버려진 열쇠 하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거 보세요.  선생님은 스스로 치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볼 때는 엉성해요.  그래서 저 같은 파트너가 필요한 거죠.” 

“그래서?!” 

“그래서 연구소에 들어 갈 수 있었죠.” 

“누구랑?” 

“저 혼자요.” 

“언제?” 

“밤에요.” 

“분명히 혼자야?” 

“예.” 

“뭘 봤는데?” 

“그 추적 일지요.” 

“커...!!” 

“죄송해요.  너무 궁금해서요.  이제 제 목숨은 선생님 소유에요.  패 죽이던가 아니면 저 파란 바닷물에 쳐 넣던가.” 




선주의 커다란 눈망울이 껌벅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끝!” 

“뭐가?!” 

“소유권 끝!  시간을 줬을 때 패죽이던가 어쩌던가 했어야죠.  멀쩡한 처녀가 언제까지 유부남의 소유물이 될 수는 없잖아요.” 

“나...원!  그래서 그 기록을 다 봤단 말이야?” 

“예.”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파트너로 써 달라는 거죠.  제가 그랬잖아요.  파고 뒤지는 데는 제가 좀 한다고요.” 

“좋아.  써주지.  그런데 임무 끝이야.” 

“예?” 

“할 일이 없거든.  추적은 이미 종료됐어.” 

“아뇨!  박달재에서 기록했던 내용에는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곳이 있던데요.” 

“모든 것은 다 확인됐고 파트너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일이 없으면 노는 거 아니야.  됐니?” 

“좋아요.  그럼 파트너가 부탁하나 할께요.” 

“.........” 

“제가 손에 넣은 것은 추적에 대한 기록일 뿐 선생님이 왜 그곳을 파보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다른 사람들처럼 말예요.  그것에 대한 기록은 아마도 따로 보관돼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안돼!” 

“있긴 있죠?” 

“뭐?” 

“그럼 됐어요.  있다는 것만 확인했으면 언젠가는 제 손에 들어오게 돼 있죠.  저에게 삼일만 시간을 주세요.  삼일 안에 선생님의 생각을 바꿔놓을 테니까요.” 

“어떻게?”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겁쟁이라며 자존심을 건드려 봐도 안 되고..., 그 흔한 정의를 팔아도 소용없을 것 같고..., 아무튼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해 봐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장미빛 태양이 바다로 떨어지던 그날 석양에 길 지나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해안선을 따라 흰색 승용차 한대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늘 보는 그런 작은 사건을 시간이 흐른 뒤에 누가 기억할 수 있겠는가.  시간의 흐름과 기억력의 마술은 그렇게 한 사건의 문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삼일 뒤.  선주의 말처럼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 사건과 관계된 모든 것을 이야기 식으로 정리한 원고는 고스란히 선주 손에 넘어가 있었다.  완강한 고집은 필연적으로 뒷면에 치명적인 허점을 남기나 보다.  선주가 내 앞에 내민 논리는 너무도 간단해서 어이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거기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당시 선주가 읽었던 원고를 이제 독자 여러분에게 공개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frogboystory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