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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마녀
게시물ID : readers_278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리멸렬2
추천 : 1
조회수 : 7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3/01 2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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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안녕하세요 항상 눈팅만하다가 
혼자 소설을 써보기 시작했는데 올려볼까싶어 가입했습니다. 

쓴소리도 괜찮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굳이 장르를따지면 로맨스판타지 정도가 되겠네요..!!!



눈 먼 마녀
 늙은

1
짧은 털들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굳었다. 그렇게 죽어버렸다. 그는 이 늙은 고양이가 숨을 멈추게 되면 이곳을 떠나려 했지만 그 날이 오늘 아침이 될 줄은 몰랐다. 먹던 빵을 접시에 두고 발 언저리에서 죽은 고양이를 그대로 둔 채 꽤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창 밖에서 땅거미가 해를 등지고 그에게 기어왔다. 지난주에 펜 깃이 부러져 새로 사러 시내에 내려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날 길목에 폈던 갈대들이 유달리 옅은 흙빛을 띄고 있었다. 그 날은 추웠었지. 그의 발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고양이만큼. 이 늙은 짐승은 이름도 없다. 그는 차가워지기 시작한 시체를 천천히 안아들었다.

  여관 근처에서 가끔 보던 고양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방 안에서 마주쳤다. 그렇게 함께 살기 시작 했다. 수의사가 ‘꽤 나이가 있으니 언제 갈지 모른다.' 했을 땐 그는 이 고양이가 이곳을 떠나면 자신도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곳에 3년을 있었다.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자신은 이미 떠났을 것 이다. 그는 이름 없는 아이를 소파위에 내려놓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트렁크가방에 셔츠 몇 벌과 악보 몇 장 그리고 안경집을 넣으니 꽉 찼다. 조금 헤진 중절모를 쓰고 낡은 검은 코트위에 실이 뜯어진 목도리를 걸쳤다. 코트에 붙은 회색 털들을 손으로 대충 때어냈다. 가방을 팔목에 걸고 부엌에서 작은 상자를 찾아 안에 고양이를 넣었다. 아침마다 물을 끓일 때 고양이는 이 안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는 했다. 목울대가 쓰다. 

이른 새벽의 역은 한산했다. 기관차의 잿빛 엔진 소리와 구두 굽 소리만 안을 채웠다. 그는 직원에게 물어 공중전화를 찾았다. 수신음은 길지 않았다.

“노튼 교수님. 클락 입니다.”
“아, 클락 새벽부터 무슨 일 인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전화 너머 노인의 목소리에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클락은 목을 다듬었다. 말을 안 한지 꽤 돼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죄송합니다. 일이 급해서요.”
“아 혹시 스티븐 때문인가?”
“아닙니다.”
잊고 있었다. 맞아. 스티븐 러셀.
“무슨 말썽이라도 일으킨 건가? 음 전에도 말했지만 그 애는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주제에 귀족 특유의 거만함에 취해있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지만 금방 수그러들걸 세. 러셀 백작에게 내 말해두지.”
“아닙니다. 좋은 학생이에요.” 클락은 인상을 구기고 턱 주위의 짧은 수염을 쓸었다.
“ 스티븐 때문이 아니라  제가 여길 떠나게 됐습니다.” 

사실 그만 둔지는 몇 달 되었다. 교수가 모르는걸 보니 아마 백작도 제 아들이 부끄러웠겠지. 스티븐 러셀. 2년 동안 음정 하나도 제대로 짚지 못할뿐더러 B음과 E음의 차이도 모르는 귀머거리. 비뚤한 앞니만큼이나 허영심도 커 괜히 클락 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관심으로 대응하는덴 한계가 있었다. 스티븐이 클락의 왼 팔에 있는 상처를 쓸면서 조롱한 날, 그는 스티븐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러셀의 맹추 같던 표정은 꽤 볼만했다. 백작에겐 별 다른 연락이 없다가 며칠 뒤에 파운드와 함께 짤막한 편지가 왔다. 내용은 보지 않았다. 

 노튼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좀 오래있나 싶었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있겠지?” 
“글쎄요. 저도 아직 어디 갈지를 안 정해서요. 일단 도시는 아닙니다.”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늘 이런 식 이지. 어디든 도착하면 연락 주게. 난 자네가 굶어 죽는 건원치 않아.”
“감사합니다.”
“그럼 스티븐 때문은 아니라는 건가?”
“네.”
그는 수화기를 움켜진 손에 힘을 풀었다. 늦은 안부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 지도를 폈다. 그래. 떠나는데 큰 이유는 없다. 늙은 고양이는 죽었고 자신은 이곳을 떠나는 것 뿐 이었다. 항상 그래왔다. 그는 첼로가 든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

건물 외곽은 담 넝쿨로 뒤덮여 있다 못해 벽의 본래 색 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오래 된 태가 났다. 하지만 안의 가구들은 하인의 정성스런 손이 타 고풍스러웠고 복도는 구두 굽이 비칠 정도로 깨끗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아, 이 저택에선 늙은 숲의 냄새가 났다.

“저보다 긴장하신 것 같아요.”
맑은 미음이 그의 귀를 울렸다. 크지 않은 방 안에서 어눌하게 첼로 현을 잡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색이 바란 두 눈이 그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있을 법한 곳을 봤다. 
“…….아닙니다.”
그는 근처 책상에 턱을 괴고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한 쪽이 닫히면 다른 한 쪽은 열릴 수밖에 없거든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숲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저 여자는 장님이다. 

“선생님”
그녀는 숨을 살짝 삼키고 미소 지었다.
“심장소리가 이까지 들려요.”


*

컵 안의 홍차가 춤을 춘다. 앞의 늙은 신사가 웃었다. 좀 전에 본 미소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노인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래. 우리 애가 잘 따라 오던가?”
“네.” 
무서울 정도로. 클락은 하워드에 내려온 지 이틀 뒤에 노튼 에게 편지를 했다. 자신의 안부와 앞으로는 도와줄 필요가 없단 내용이었다. 하지만 노튼은 동료였던 마이클 프레더릭의 손녀아이 첼로 교습을 맡아 달라는 부탁 아닌 강요와 마이클의 심성이 좀 짓궂은걸 빼면 어렵진 않을 거란 추신을 적어 보냈다. 손녀의 이름은 제인. 제인 프레더릭. 눈이 먼 여자. 마이클은 자신의 손녀가 유달리 첼로독주를 사랑한다고 했다. 클락은 그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여자는 사랑 받고 있는 것이다. 악기에게, 첼로에게. 무서울 정도의 재능을 지녔다. 즐겨 듣는 음악이 있냐고 물으니 평소 연달아들어 이름은 잘 모르겠다며 그의 앞에서 손을 짚어가며 연주 했다. 그녀는 기본음들의 명칭조차 몰랐다. 할아버지가 2주 전에 사주셨는데 혼자서는 역시 힘들었어요. 이리저리 만져 봐도 소리가 잘 안 나거든요. 그녀는 그리 말했다. 

“평소 음악을 즐겨 듣는 것이 빛을 본 것 같습니다.”
“흠” 마이클의 주름진 손이 컵을 쥐었다. “노튼은 자네가 상당히 까다롭다고 하던데, 손녀를 좋게 봐줘서 고맙소.”
 클락은 노인의 무정한 눈을 바라봤다. 
“아니요. 진심입니다. 사실은 가지고 있는 재능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자네는 제인과 눈 한번 맞추지 않던데?
“음을 맞추는데 굳이 눈을 맞춰야 합니까?”
심지어 그 여자는 눈도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홍차를 다시 마셨다.
“역시 노튼은 거짓말 할 인간이 아니야. 자네가 맞네.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입 발린 소리는 못하는 친구군.”
노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왜, 노튼이 무슨 말을 지껄였나, 싶은가?” 클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네 장단에 박수칠 바에야 무시가 답 이란걸 그는 잘 알았다. 
“하하, 표정 하고는. 별 말 아니네.”
 웃음에 쇳소리가 꼈다. 클락의 한쪽 눈썹이 미약하게 눌렸다. 마이클은 그런 클락에게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노튼이” 노인의 푸른 눈이 짙어졌다.  
“자네더러 멍청하다 했네.”
클락은 푸른 녹음이 짙은 프레더릭가가 러셀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 선생은 꽤나 과묵하군.”

 마이클은 꼰 다리 위에서 빈 컵을 쓸며 말했다. 클락은 마이클의 서재가 꼭 시답잖은 농을 치는 이 노인네와 꼭 닮았음을 깨달았다. 원목책장에 빼곡이 쌓인 책들은 아무렇게나 꽂혀있고 책상 위는 각종 서류들로 너저분했다. 깃펜의 깃은 본래 색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벽에 걸린 액자만큼은 깨끗했다. 노인은 확실하다. 솔직하다.
“제인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는가?”
 잠깐의 침묵 끝에 마이클이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궁금한 눈치였다.
 “예. 눈이.” 
 “아니.아니야”
 클락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고갤 들었다. 
“이름 말고는 모릅니다.”
 연한 갈빛 머리와 하늘색 눈 말고는 모른다.
“노튼이 이야길 안했나 보군.”
 “......”
 노인의 입가에 주름이 졌다. 클락은 저 모습이 저택을 둘러싼 숲과 같다 느꼈다. 순간 마이클의 눈에 빛이 일었다.

“제인은 마녀라네.”

2

마녀. 마녀. 이 나라는 왕과 국민위에 법이 군림하는 시대이기 이전에 왕만이 전부인 때가 있었다. 왕들은 권력 자체를 뛰어넘는 그것을 경계하고 억압했다. 바로 마녀들. 권력은 만인 앞에서 공포를 뿌리로 두지만 마녀들 앞에서 이는 당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힘이 있는 자는 힘 자체를 두려워한다. 마녀들이 모이는 것부터 떨어져 고립되는 것 까지 왕은 질색했다. 죽이고 또 죽였다. 하지만 마녀의 딸이 언제나 마녀일 수 없듯이 평범한 농민의 딸이 마녀일 수 있다. 결국에 또 다른 왕은 깨달았다. 그들도 이름만 마녀일 뿐 결국 인간. 포용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죽음들은 이 나라를 삼키리란 것을 
 
 수많은 피위에 만들어진 법은 마녀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마녀들은 공직부터 상인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높은 공직이 아닌 이상 그들은 이름을 숨기고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러기를 200년, 그들의 이름은 두려움의 대상에서 벗어났다. 정확히는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남자들 중에서도 그런 요술을 부리는 것들이 꽤나 있더군.”
 수화기 너머 노튼의 목소리는 퍽 경쾌했다. 클락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진짜 마녀라던가?” 
다소 멍청해보일 수 있는 이 물음은 다른 뜻이 아니었다. 한참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시기에는 일종의 ‘마법’을 부리는 것이 아닌 재능을 가진, 즉 평범함을 뛰어넘는 이들조차 마녀라 부르며 싸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는 천재라는 말보다는 마녀라는 말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일종에 뼈있는 칭찬이었다. 사람 홀리는 재주란 뜻 아닌가. 
“자세한건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자세한건 듣지 못했다. 마이클이란 노인네는 자신의 손녀가 천재인지 아니면 마법을 부리는 마녀인지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저 굳어있는 클락에게 손짓하며 ‘이만 피곤할 테니 가서 쉬게’란 말만 했을 뿐이다. 마이클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노튼은 전부 미주알고주알 떠들 위인이 아니다. 어쩌면 마이클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과민하게 구는 것일 수 도 있다. 클락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근처 역으로가 노튼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이 망할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고.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아는게 있습니까?”  
 주먹 쥔 손에 핏발이 섰다. 수도까지 가지 않는 이상 자신이 마녀라는 말은 남녀불문하고 잘 꺼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마녀들은 대부분이 공직이나 군으로 편입되어 있고 굳이 자신의 힘을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녀다.  

“있을 리가 있나. 있었다면 당연히 자네에게 이야기 했지.”
“마녀란 것도 몰랐습니까?”
“그럼.”
 알고 있었다. 이 능구렁이는 분명히 알고 있다. 늙은 뱀 두 마리서 나를 갖고 노는 것이다. 갑자기 탄내가 난다. 이것이 자신의 목구멍에서 나는 것 인지 왼쪽 팔에서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옷깃을 풀어헤쳤다. 
“그래서 그만 둘 건가?”
 그는 수화기를 잠시 얼굴에서 떼어냈다. 청동빛이 감도는 이 전화기를 짓이기고 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매케한 연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눈 앞이 캄캄해졌다. 노튼은 친절하다. 자신을 매우 아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원하는 바도 명확하다. 
“자네에게 상처를 낸 건 마녀가 아니라 아그니스야.” 
“교수님.”
 옷깃의 단추를 뜯듯이 몇 개 더 풀었다. 아니다. 아그니스가 아니다. 무언가 귓가를 맴돈다. 요한의 16음표가 휙휙 거리며 꼬여 들어온다. 고막을 터뜨릴 듯이
“자네가 가르치는건 마녀가 아니라 마이클의 손녀라네.” 주변이 윙윙거린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내뱉었다.


*

“목소리는 좋았어요.”

온통 갈색으로 이뤄진 응접실은 하얀색 소파를 제외하고는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향기조차 바깥의 나무 내음 말고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방의 구조가 전혀 바뀌질 않았단 걸 새삼 깨닫고 퍽 할아버지답단 생각이 들었다. 마이클이 소파에 등을 더 깊숙이 대는 것이 느껴졌다. 맞은편에서 제인은 좀 더 새침하게 앉아 허리를 피고 웃었다. 못마땅하나보군. 

“그럼 뭐하냐. 겁쟁이야.”
“설마”
“그래. 말했다.” 
“상관은 없지만 굳이 뭐 하러 말해요?”
“요즘 세상에 그러는 놈 없다지만 꼭 꼴통 같은 것이 있지 않냐.”마이클이 종이 구겨지듯 찌푸리고 있을게 눈에 훤했다. 제인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클락의 목소리만큼 그가 무표정할거라 확신했다. 인사를 처음 건네던 그의 목소리는 마치 동굴 안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낮게 울리던, 저가 쥐고 있는 첼로처럼. 할아버지는 늘 하던 대로 짓궂게 마음에 든 이를 대한 것이다. 노인의 표현은 가시선 사랑스러움이 있다. 자신의 놀림에 영 까다롭기 그지없었던 클락이 떠올랐다. 노인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당장 자리를 떠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무례는 애교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꼴통이었어요?”
“아니. 겁먹고 도망가더라. 적어도 꼴통은 아니지. 똑같긴 하지만.”
마이클이 말하는 꼴통이란 마치 몇 백 년 전처럼 마녀라면 땅에 묻고 물에 빠트려야한다는 주장을 설파하는 자들을 말했다. 이 나라는 공직에 마녀 뿐 아니라 평범한 신분의 사람까지 정계에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유례없는 호황을 이루고 있다. 마녀라 함은 일종의 훌륭한 능력이다.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것이 보잘 것 없으면 마녀라 부르지 않는다. 붓질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붓을 든다 하여 화가가 아니듯이 능력 없는 마녀는 마녀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인은 마녀라 불리기엔 애매한 감이 있었다.  

“선생님이 어디 머무신다 했죠?”
“그 때 말했잖아.” 
마이클은 손녀가 얼마나 두터운 가면을 쓰고 있는지 안다. 그녀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다. 아니 그 뿐이랴.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신도 그녀에게 진심으로 인사받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지 모른다. 거의 하얗다 할 정도로 푸른 눈이 마이클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음영 지는 눈빛을 마이클은 피하지 않고 말했다. “별채에 머문다. 노튼이 특별히 부탁했지.” 하긴 프레더릭 가는 웬만한 영주들의 성 만큼이나 컸고 근처가 전부 숲이었다. 마을로 가는데 성인남자가 쉬지않고 뛰어도 30분은 걸렸다. 마이클은 종종 ‘우리 증조부는 사람을 싫어해 이런 저택을 만들어놓고 숨고는 했지. 공작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마 스물도 못되어 신경쇠약으로 죽었을 거야.’하곤 했다. 10년 전 마이클은 이 곳, 페기하이츠 저택을 제외한 다른 저택과 성을 전부 왕정에 반납했다. 공작직위까지도. 

“음.  너는 마음에 들더냐?”
“할아버지가 좋다면 저도 좋아요.” 쉽게 말해 별 생각 없단 뜻이다. 그녀는 슬슬 주홍빛으로 물드는 창을 바라봤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윌이 기다리겠다.” 마이클은 제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컵을 쨍 소리를 내며  내려놨다. “윌? 윌리엄 말이냐? 그 브라헤 남작 아들?” 제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왜요?” “내가 다 좋으니 귀족 나부랭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괜찮아요.”
“그 치들은 손만 잡아도 결혼하자는 멍청한 것들이야. 그리고 너도 알잖니. 시골이면 시골일수록 귀족이란 것들 허세가 하늘을 찌른다.”
제인은 허릴 숙여 힘없는 힘줄이 깊게 박힌 손위에 자신의 손을 포겠다. 따뜻하다. 난 참 차갑구나.
 “걱정하지마세요. 그래봤자 윌리엄이에요.” 
마이클은 손녀의 단호한 대답에 기가 차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노인을 두고 지팡일 짚고 일어났다. 

**

비릿한 바다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수평선 너머로 붉은 내가 가라앉는다. 클락은 모래밭에 앉아 무릎을 굽히고 그 위에 양팔을 올린 뒤에 고갤 숙였다. 아까 그는 하워드 역에서 무작정 걸었다. 하워드는 반도의 끝자락의 작은 마을이었고 자치회도 옆 도시 아레나에 속해있었다. 좁디 좁다보니 몇몇은 험한 인상으로 지나치는 낯선 이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명과 섞여 나 그는 견딜 수가 없었고 사람 피하자고 저택 쪽으로 가느니 차라리 파도에 얼굴이나 묻자싶어 바다까지 온 것이다. 늦은 저녁 바다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선율을 생각했다. 음표들이 굽이치며 머리를 친다.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현을 잡는 듯 한 모양을 취한다. 그는 고갤 아주, 조금 끄덕거렸다. 가라앉는다. 낮은 음들만이 단조롭고, 나른하게 그의 머리를 채운다. 숨이 똑바로 쉬어지자 그는 눈을 떴다. 

“밤은 더럽혀졌고 달은 더 이상 대지에 없네.” 
멀리서 두런거리는 소리지만 정확히 들렸다. 아까 제인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시구를 읊었는데 틀렸다. 일부러 그런 건가? 그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갤 틀었다. 이미 해는 지고 달빛만이 유순하게 떠있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한 쌍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인, 제인은 모르는 게 없어.” 
청년의 목소리였다. 청년의 답에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고마워. 이 시를 아나봐.”
 “들어보니 존 하르트의 시인거 같은데.” 그 말에 그녀가 꺄르르 웃었다.
 “맞아.” 
아니다. 넬 작슨의 시였다. 시구도 ‘꿈은 더럽혀졌고 순결의 흰색은 더 이상 대지에 없네.’가 맞다. 제인은 일부러 틀리게 말한 것이다. 클락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빤히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말소리가 커지자 그는 급하게 근처 부두 뒤로 몸을 숨겼다. 그 꼴이 우스워 웃음이 나왔다. 아까의 화는 잊혀진지 오래였다. 청년이 사랑을 속삭이며 다른 시구를 읊었다. 여자는 언제 웃었다는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클락은 그들이 빨리 지나가거나 이곳을 뜨길 바랐다. 
“제인. 안아도 될까?”
“응.”
폭 하고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클락은 이제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 어서 사라지고 싶었다.  한참을 말없이 껴안던 그들 중 청년이 먼저 입을 땠다. 
“제인…….”
“응. 키스해도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응?”
“나랑 결혼해줘.” 
달빛이 그녀 머리위로 부서졌다.



3

클램, 크리스 그리고 세실 이 작은 마을에서 만났던 남자들의 이름이다. 좀 더 올라가볼까? 클라크, 콘라드, 쿠퍼 그리고 다니엘. 다니엘은 마부의 아들이었는데 댄이라 부를 만큼 꽤 마음에 들었다. 이들의 이름은 마치 군사가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쓰듯 머리에 남아있다. 일종의 기록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노력하는 일 중에 하나기 때문에. 

제인은 자신의 나이도 되짚었다. 스물하고 다섯. 흔히 말하는 ‘귀족’이 결혼하기엔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그녀는 감흥 없는 눈을 애써 놀란 척 떴다. 그래봤자 보이는 건 캄캄한 어둠이 전부지만. 그리고 청년, 윌, 윌리엄의 어깨를 쓸었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이 남자가 불쌍하진 않았다. 그래도 잘 수는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괜히 안 하던 짓까지 하며 새침 떤 결과였다. 귀족 거기엔 금칠이라도 했나. 보기 영 어려워. 아쉽게 됐군. 게다가 할아버지 말이 맞았다. 

“아, 윌….”
“제인. 나는 제인의 그. 눈은 신경 쓰지 않아. 당신은,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워.”

이렇게 단순할 수가. 제인은 안다. 수십 번, 수백 번 손으로 쓸어 담은 얼굴이다. 아름답진 않지만 못나지도 않았다. 미가 아무리 좋은 칭찬이라지만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눈과 같은가. 이런 얼치기가 다 있나싶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괜찮다 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 정실 말고는 아무도 들이지 않겠어. 눈길도 주지 않을게. 아이도 당신하고만 볼게. 부탁이야. 나와 결혼해줘.” 

안 해주면 울 기세군. 더 이상 듣기엔 시간이 아깝다.

“윌. 당신은 내 어디가 가장 좋아?”
“뭐? 갑자기 왜… ?”
“대답해줘. 항상 듣지만 꼭 들어야겠어.”

제인은 윌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눈썹을 산으로 만들었다. 절박하게, 구걸하듯이. 윌은 눈을 이리로 저리로 굴리다 제인의 어깨에 떨어진 벼 빛 머리를 쥐었다. 윌은 마치 거칠게 뛰다 온 듯 입을 열었다.

“당신… 머리카락…”



**

별채는 본관과 얼마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별채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독립적인 공간인 것이다. 별채는 총 3층으로 클락은 2층 맨 끝 방을 사용했다. 2층엔 응접실과 서재 그리고 손님용 방 하나가 있었는데 마이클은 전부를 클락에게 내주었다. 그가 머무는 방은 고동빛 벽지와 바닥, 침대 그리고 붉은색에 전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페기하이츠 저택에는 주인 내외를 제외하고 최소한의 인원만을 뒀기 때문에 클락이 머무는 별채엔 아침에 청소하러 오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별채의 밤은 아찔할 만큼 고요했다. 창 밖의 벌레소리만이 바람을 타고 침대 곁을 맴돌 뿐이었다. 클락은 침대에 누워 아까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당신… 머리카락…”

윌이라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언가 싹둑하고 자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조금 뒤에 남자가 뭐라 지껄이더니 금방 조용해졌다. 한참 뒤에 클락은 둘 다 갔다 생각하고 몸을 틀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인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잘린 머리를 쥐고 달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뒷통수를 보며 어서 제인이 가길 기다렸다. 구름이 달을 몇 번정도 가릴 때 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잘린 머리칼 사이로 희다 못해 시퍼런 목이 달빛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자른 머리칼을 두 손에 꼭 쥔 채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 머리카락이 빛나는가 싶더니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커졌다.

‘강건한 공허 속에 갇힌 어둠은, 밤으로.’

아까 윌에게 읊었던 시의 다음 부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침에 그녀가 연주했던 지그(Gigue)처럼 들렸다. 그녀는 일정한 형태의 음정을 같은 구간에서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연주구간에서 그대로 점점 한 음절씩 내려 연주했었다. 음울하고 침착하며 다소 불쾌할 수 있는 음율에 그는 넋을 놓을 뻔 했다. 단 몇 초만에. 제인이 시 구간을 부러 틀리게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닐까? 제인의 손에서 환한 빛이 없어졌을 땐 이미 그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하루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건 오랜만이다. 다음이 뭐였더라. 노튼은 클락의 연주에 시구를 붙여 노래부르길 좋아했는데 대부분이 넬리 작슨의 시였기 때문에 클락은 귀가 닳도록 듣곤 했다. 심지어 몇 개는 양피지에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지. 

  강건한 공허 속에 갇힌 어둠은, 
  밤으로
  단단한 비명 위에 웃는 고통은
  네게로 

서서히 눈이 감겼다. 가늘어진 시선사이로 옷장에 새겨진 공작가 문양이 보였다. 사자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뱀 두 마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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