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동일 (부산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80년대 초 부산에서 변호사를 시작한 뒤로 2003년 참여정부에서 공직을 맡으실 때까지, 노동 분야에서 문재인 변호사님이 하신 역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부산경남지역 노동운동의 말석에서 변호사님과 2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내며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필자가 여기서 밝히거니와, 문 변호사님이 80~90년대 부산경남지역의 노동운동에 헌신한 공로는 참으로 컸다. 특히 당시의 부울경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한 노동관련 소송의 대부분을 도맡아 처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 부산민주공원에서 정리한 권당 300P 전후 10권 분량의 부산지법, 부산고법 노동사건 판례모음집을 보면 집단적 노사관계 관련 소송이나 개별적 노사관계 사건 중 해고 관련 소송은 문 변호사님이 대부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이렇게 80~90년대 부산경남지역 노동관련 소송을 혼자 도맡아 했으니 돈을 많이 벌었겠지, 라고 사람들은 오해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해고 관련 소송의 경우 당사자의 사정이 어렵다 보니 외상이 많았고 수임료도 거의 필요 경비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산업재해 관련 소송과는 달리 승소율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또한 노동쟁의 사건의 경우에는 소송당사자도 많고 검토해야 할 관련 기록도 엄청 많았으나 수임료는 염가였고 승소율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문 변호사님은 오직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과 책임으로 이 모든 소송을 맡은 것이었다.
문 변호사님은 소송기록이 아무리 많더라도 일일이 그것을 읽어보며 직접 검토하셨다. 그래서 항상 바쁘셨다. 다른 일로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 한 김에 잠깐 인사라도 드리려고 찾을라치면, 만만한 후배니까 그랬겠지만, 일 없으면 그냥 가면 되지 뭘 새삼스럽게 인사냐는 투였다. 소송 기록 정리 등 처리해야 할 업무가 태산이라 의례적인 인사 정도는 생략할 수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한테서는 때로 냉정하다는 오해를 살만도 했다.
문 변호사님은 가식과 과장을 싫어하셨다. 노동자복지연구소를 만들 때의 일이다. 소장이 나라는 것을 알고는 한마디 하시는데 나한테는 꽤나 매몰차게 들렸다.
“박사 하나 없는데 연구소는 무슨…. 그냥 노동자복지상담소로 하면 되지.”
없는 것도 있는 듯이 포장해야 노동자들이 올 텐데, 그리고 나만하더라도 노동운동 짬밥이 만만치 않아 나름대로는 노동 분야에 대해서는 박사 못지않은 지식을 가졌다고 자부했는데….
(사)노동자를 위한 연대를 발족할 때도 그랬다. 나의 직책이 ‘사무처장’이라는 걸 아시고는 처장은 무슨 처장이냐고, 그냥 사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부산의 참여연대나 경실련에 근무하는 후배들도 다들 사무처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하던 때였는데….
문 변호사님은 맺고 끊는 것이 아주 분명했다. 자신의 일이라고 판단되면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지만 본인이 맡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냉정하게 거절했다. 경희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셨고 전두환 정권에 맞서 부산국민운동본부 상임 집행위원으로 반독재투쟁 일선에서 싸웠으니 전국 조직 차원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많았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게다가 서울에 이런저런 인연도 많고 변호사란 직업 때문에 재정적 후원에 대한 요구도 많았을 것이고 실제로도 또 많이 하셨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 변호사님은 민주변호사회 활동을 제외하고는 전국 차원의 활동을 자제하고 지역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하셨다. 특히 재정적 후원의 경우 지방의 열악한 재정 현실을 감안해 부산지역 후원에 집중 지원을 하겠다고 하시더니 (사)노동자를 위한 연대의 회비를 두 배로 올려주셨다. (당시 재정이 어렵던 우리로서는 난데없는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지역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야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은 분들이 문 변호사님한테 전국 단위의 역할을 맡아 달라 요청했을 때 이를 거절하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쉽기야 했겠는가. 다 그의 맺고 끊음이 분명한 처신에서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또한 변호사님은 원칙에 철저했고 본인 관리도 엄격했다. 변호사님이 (사)노동자를 위한 연대 부설 노동 상담소 소장으로 계실 때의 일이다. 단체에서 노동조합원들이나 활동가를 대상으로 법률 교육을 할 경우가 많았는데 문 변호사님이 그 강의를 맡는 일이 빈번했다. 그때 단체에서 책정한 강의비가 3만원이었다.
한데 변호사님은 이 강의비 3만원을 어찌나 꼭꼭 챙겨 가시는지, 원. 대부분의 다른 강사님들은 그 강의비를 단체에 도로 주시든지, 하다못해 뒤풀이 자리에 술값으로라도 다시 내놓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문 변호사님은 달랐다. 강의비 3만원을 반드시 챙긴 다음 뒤풀이 술값을 추렴할 때도 꼭 자기 몫인 1만원만 내셨다. 단체운영을 위해 많은 돈의 월 회비를 내고 있지만 그 단체에서 강의하고 받은 강의비는 본인 수입이라는 것이다. 변호사님은 그 흔한 노래방 한 번 가는 일 없이 반드시 1차에서 술자리를 끝냈다. 변호사님과 20년 가까이 노동단체 활동을 같이 하는 가운데 변호사님과 2차 술자리를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문재인 변호사님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러웠으며 깊이 배려했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성품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속 깊은 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분이다. 변호사님이 (사)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를 맡으면서 맨 먼저 추가한 일이 노동단체 실무자들과 함께 월 1회 등반을 정례화 하고 등반 안내역을 자임한 것이었다. 단체장이 됐으니 상근 실무자들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등반 안내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따뜻했다. 실무자들의 체력을 고려해서 가능한 한 평탄하게 산을 오를 수 있게 경로를 잡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려와서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는 맛집도 면밀하게 봐 두는 것이었다. 이런 등반 행사를 통해 단체 사업의 현황이나 실무자들의 의견이 두루 소통되었고 상호 친밀감도 몰라보게 높아졌다.
또 문 변호사님은 야생화 보기를 좋아 하셨는데 야생화 산행의 안내를 맡으시면 하루 전날 반드시 사전 답사를 하셨다. 이 사전 답사를 통해 코스는 적정한지,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그리고 내려와서 쉴 만 한 곳은 마땅한지를 꼼꼼히 살피셨다. 다음날 온 가족과 함께 한 야생화 탐방자들이 대만족인 것은 물론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깽깽이풀이나 처녀치마는 남부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이다. 그런데 변호사님이 부산의 금정산에서 우연히 깽깽이풀을 보셨던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그 꽃을 나한테도 보여주기 위해 바로 다음날 또 다시 산을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처녀치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양산 통도사 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에서 처녀치마를 보시고는, 혼자만 보기 아까워서, 그런 귀한 꽃을 보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또 다시 그 산을 오르는 수고를 묵묵히 치르는 것이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배려 깊은 성품은 노동자들과의 상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문 변호사님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아주 푸근하게 상담하셨다. 무척 바쁜 일정에도 중간에 말을 가로 막지 않고 끝까지 다 들어 주셨다. 억울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의 경우 그렇게 자기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나큰 위로를 받곤 했다. 또 변호사님은 산업재해 소송의 경우, 재해 현장에 대한 현장검증을 재판부에 자주 요청하셨다. 판사들이 그 위험한 작업 현장을 방문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으신 것이었다. 험한 지역에 대한 현장검증을 감안하여 4륜구동의 SUV 차량을 선택했다고도 하셨다. 문 변호사님의 이러한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와 애정은 곁에서 일하는 나를 언제나 부끄럽게 만들고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문 변호사님이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응해 본인에게 주어진 운명적 역할을 다하시겠다고 나선 것에 대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크게 환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온 국민의 축복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