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소설] 당신의 이야기
게시물ID : readers_132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VANGELION
추천 : 1
조회수 : 27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28 00:57:08

너는 말을 잃었다.

정처 없이 걸어 산골의 절에 도착했다. 계속되던 긴 걸음을 가까스로 멈추자, 시야의 끝이 하얘졌다. 쓰러지는 스스로를 지탱한다. 다행히도 끊어지던 시야는 가까스로 돌아온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방랑하고 있던 너였다. 고개를 들자 절의 담이 보인다. 드문드문 담이 무너져 있거나 아주 낮게 되어있는 것을 보고 구토를 하였다.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주일간 제대로 먹은 게 없던 너의 입에서는 시큼한 위액과 약간의 피가 역류한다. 절의 입구에 그렇게 있었다. 역류한 것들을 밟지 않기 위해 잠깐 뒷걸음질 친다. 발바닥의 이상한 느낌에 신발의 밑창이 떨어졌다는 것을 보고 잠깐, 그리고 살짝 웃었다. 너는 왜 웃는지 모른다. 왜 웃은 것일지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문득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다. 너의 옆에는 어느새 비구니 한명이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나른한 비구니의 목소리는 너에게 조용히 들렸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너에게 향했음을 늦게 깨달았다. 입을 벙긋거린다. 두어 번 입술이 움직인다. 목 사이에서 너의 목소리는 상실되어 고요했다. 목의 떨림이 멈춘 것인가 싶었다. 빠르게 목의 울림을 단념한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입술로 말하고자 노력한다. 천천히. 물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구니는 너의 입술을 보고 말한다.

-잠깐 들어가시죠.

비구니는 입술의 소리를 이해하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비구니는 너를 이끌고 절 안으로 향했다. 너의 합장은 없었지만, 비구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너의 집은 담이 낮고 대문은 늘 열려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가진 꿈이었다. 너의 아내는 모두에게 착했다.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을 박대한 적이 없었고, 너의 좁은 마음씨를 부끄럽게 하였다. 집은 다락방까지 3층이었고 정원도 있었다. 너는 아내의 부탁에 집의 담을 낮추고 대문을 늘 열어두었다. 열린 대문으로는 고양이들과 걸인들이 드나들었고 너의 아내는 늘 따뜻하게 대했다. 길고양이들에게는 약간의 닭고기와 죽을 주었고, 걸인들에게는 한 끼 식사를 대접했다. 너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내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녀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기억의 명료함을 떠나서 어찌되었건 너는 매우 안타까워했고

 

적어도 처음에는

 

슬펐다. 너의 아내는 해가 거듭할수록 아이가 되어갔다. 다락방에 홀로 앉아 종이 토끼를 접기 시작했다. 어릴 적 아내가 좋아했다던 그 놀이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걸인들과 고양이들을 챙기는 것은 늘 아내의 몫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내는 점점 어려졌고, 종이 토끼의 수도 늘어났다. 다락방은 기괴한 토끼굴이 되어갔다. 너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지쳐갔다. 시간의 역행은 너에게서부터 아내를 점점 멀어지게 하였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하나 있었다. 아내는 어려졌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했다. 하지만 인간이 망각의 동물임을 증명하듯이, 너는 아내와의 좋은 기억들을 덮어갔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그 생각에 대해 확신을 잃어갔다. 너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줄었고, 어려지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고, 동시에 이해하지 않았다. 아내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토끼들을 접었다. 이해하지 않는 너의 마음만큼이나 토끼는 늘어났다. 다락방 한 구석에는 종이 토끼들이 무서울 만큼 가득 쌓여있었다. 색상은 형형색색 가득했고, 너의 기억으로는 그것들이 빛을 잃은 적은 없었다.

 

너는 비구니에게 안내받았다. 비구니는 걸인과도 같은 너를 박대하지 않았고, 넓지 않지만 깔끔한 손님방에 앉을 수 있었다. 방에는 이부자리와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은 네 개의 다리 중 하나가 짧아 안쓰러웠다. 너는 물수건과 마실 물을 받았다. 비구니는 그것들과 함께 너에게 수첩과 펜 하나를 가지고 왔다.

-말을 힘겨워하시는 듯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 언제든 머무실 수 있습니다. 부족한 건 여기 쓰십시오.

그리고 비구니는 사라졌다. 너는 다만 앉아 있었다. 수첩의 여백을 채우고 싶을 정도로 부족한 것은 이곳에 없어서 너는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당장 필요할 밥 한 끼, 밑창이 떨어지지 않은 신발 한 켤레, 이러한 것들은 자신에게 넘치는 것들이라고 여겼다. 너는 그랬다. 수첩의 여백에 너는 단어조차, 생각조차 담는 것이 사치가 되어있었다. 깊게 울었다. 눈물을 담을 마음도 없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너의 눈물은 길고, 깊었다. 너는 슬피 울었다.

 

 

집의 불이 꺼져 있었다. 대문은 언제나 열려있었기에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락방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평소처럼 들어갔다. 문을 열자 너는 물을 밟은 듯했다. 시야에 빛이 채워진다. 자동으로 불이 켜졌다. 주황색의 등 아래에서 너는 너의 아내를 보았다. 지독하게 빨간 피를 보았다. 누군가 말하길, 피는 검붉다고 그랬던가. 너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황색의 등 아래에서 피는 지나치게 붉었고, 생명이 더욱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다리가 풀려 맞닿은 그 시뻘건 것은

 

아직 따뜻했

 

던 것 같다. 아내는 고요했다. 너도 고요해졌다. 어린아이가 되어가면서 말이 많아지던 아내가 그리고 고요해질 줄 몰랐던 너는 아내를 따라 고요해졌다. 아내는 잠들어 있는 듯 표정이 온화했다. 이상하게 엎드려 있는 아내의 손에는 하얀 종이 토끼가 있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너는 아내에게 묻고 싶었다. 그 토끼들을 왜 만드는 거냐고. 아내가 정작 말이 많았을 적에는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너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아내에게 하나하나 묻는다. 왜 토끼들이 알록달록하냐고, 그 토끼들은 왜 빛깔을 잃지 않냐고, 도둑고양이들이 뭐가 그렇게 좋냐고, 왜 다락방을 그렇게 좋아하냐고, 왜 나를 밤늦게까지 현관에서 기다리냐고, 다른 건 잊으면서 내 생일은 왜 안 잊냐고, 점점 요리도 힘겨워하면서 왜 늘 나를 위해 아침을 만드냐고, 묻고 싶었다. 너의 입에선 신음소리가 질문을 대신하여 끊어지며 나온다. 상실과 함께 너는 소리를 상실했고, 마음을 상실했다. 아내가 손에 쥐고 있던 흰색 토끼를 집어 든다. 토끼의 발끝, 아내의 피가 묻어 토끼는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물처럼 올라오는 피를 보며 너는 아내의 죽음을 실감한다. 피투성이 현관에 주저앉아 아내를 안는다. 아내는 품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그리고 너의 소리 없는 오열은 너의 세상을 부술 정도로 크디컸다. 소리는 그날부터 스러졌다.

 

 

절은 고요했다. 적막이 절 그 자체인 듯해서 그 속의 너도 조용해졌다. 절 자체의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법당 하나, 스님들이 생활하는 곳 하나, 창고 하나. 방 안에서 저녁 한 끼를 먹었다. 너는 밥을 먹으며 늘 생각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시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크나큰 슬픔에도 때가 되면 밥을 삼켜야하는 생()의 본능이 가장 슬픈 것이라고 했던가. 너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 시를 생각했다. 이전에 먹었던 밥이 내일의 허기를 달래주는 것은 아니었고, 살아있음은 늘 그 본능을 갈구 했다. 밥이 넘어가지 않는 슬픔은 없는 듯했다. 너는 그 생각에 밥을 먹으면서 다시 슬퍼졌다. 아내가 생각났다.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빨리 저녁을 먹었다. 생각은 행동 사이로 스며들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뒤, 산은 금방 어두워졌고, 절도 따라서 밤이 되었다. 밤이 되면 절은 더욱 소리를 잃었다. 오직 산 속의 벌레들만이 제 울음소리를 주체하지 못하였다. 너는 잠깐 방을 나선다. 비구니가 보였다. 비구니는 고요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어깨가 좁고 승복은 지나치게 커서 어깨의 박음질 자국이 지나치게 쳐진 것처럼 보였다. 너는 비구니가 바라보는 쪽의 하늘을 보았다. 달이 커보였다. 덜 채워진 달. 보름이 되지 못한 덜 찬 달이었지만, 밝아서 다른 별들이 빛은 조용했다.

-음식은 입에 맞으셨나요.

비구니는 너를 보며 묻는다.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비구니는 고개를 돌린다. 너도 다시금 달을 본다. 달에는 토끼가 보였다. 방아를 찧고 있었다. 문득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는 달빛이 들어오는 다락방을 좋아했다. 아내는 달이 좋아 종이 토끼를 접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너무나도 묻고 싶었다. 그리고 아내의 작은 입술에서 나올 사랑스러운 대답을 듣고 싶었다. 피 묻은 토끼를 보며 너는 아내의 죽음을 실감했고, 달토끼를 보며 너는 너의 사랑을 실감했다. 상실 뒤에야 알아차리는 자신을 증오했다. 네가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을 할 때, 비구니는 너를 봤다. 비구니가 말한다.

-편히 지내십시오.

너는 다만 들었다. 비구니는 합장을 하고 돌아간다. 너는 아내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달에 사는 토끼가 보고 싶어 그렇게나 종이 토끼를 접은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달이 눈부셔 너는 눈앞이 부옇게 되었다. 달은 부끄러울 만큼 밝았다.

 

 

-저 모든 위선자들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높은 곳에 살면서 낮은 곳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저 높으신 분들의 자격을 묻고 싶었습니다. 매년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를 하고 낮은 사람들을 위해 노력한다는데 이루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제 여동생은 창녀가 되었고 나는 막노동판에 들어갔습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압니까. 우리들의 무엇을 압니까. 우린 잃을게 없습니다. 못 죽어서 삽니다. 무서워서 살고 못 죽어서 삽니다. 무기징역이라 더 고맙군요. 평생 난방도 되는 교도소 방구석에서 편하게 살 수 있으니.

 

너는 품속에 숨긴 칼의 빛이 바라는 것을 느꼈다.

 

-당신네들이 무얼 압니까. 매일 미래에 대한 수치와 숫자들로 먹고 사는 너희들이 무엇을 압니까. 자유가 다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에게 구속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이 땅 위 가장 낮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창녀였고 아버지는 막노동자였습니다. 가업이었습니다. 가난은 언제나 대물림되고 헤어 나갈 수 없는 겁니까. 국민? 대한민국이 다 무엇입니까. 당신들의 대한민국입니다. 높으신 분들이 뭘 안다는 겁니까. 뻔합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끼며로 시작되는 언제나 똑같은 말. 연말이면 찾아와서 얼마나 힘드냐고 물어보는 그 위선자들을 한번 죽여보고 싶었습니다. 선거철이면 이런 곳이라도 찾아오니 저 더러운 자식들의 모가지를 잘라보고 교도소를 가면 좋았겠지만 선거는 3년이나 남아서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네들의 대한민국은 내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래서 그냥 잘사는 것 같은 집에서 몇 명 죽였습니다. 교도소가 더 편하다고들 하거든요. 미안합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서. 나는 괴물입니다. 앞으로도 괴물일 것입니다. 부모에게 말미암아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세상 가장 더럽고 추악한 곳에서 탄생한 집합체입니다. 그리고 세상 가장 더럽고 추악한 밑바닥에는 나와 같은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너는 들었다. 묵비권을 행사하던 범인이 한 저 긴 말을. 말을 듣고, 말을 잃었다. 저것이 아내를 죽인 범인의 말이었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너와의 대화. 그는 너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허공에 지껄이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향하는 말. 고통 그 자체가 실현된 말이었다. 아내를 죽인 자는 다음날 바로 자수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고, 재판만이 남아있었다. 범인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너는 그와 말하고 싶었다. 듣고 싶었다. 범인이 미친놈일지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살인범은 저리 말했다. 너는 말을 잃었다. 방향성 없는 분노. 그렇기에 명확하고 날카로운 분노의 화살. 죽음보다 더한 세상에 대한 분노. 너는 다시금 말을 잃었다.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찌할 바 모르는 채로 시간은 지났다.

 

 

얼마 흐르지 않은 시간 이 지나고서 너에겐 그를 만날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뉴스에서 흔히 바라보던 풍경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찰칵거리는 플래시 소리들과 사람들의 목소리. 시끄러운 풍경에서 혼자만

 

다른 세상

 

인 듯 했다. 너는 2명의 당신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채로 끌려가는 괴물의 목을 조르기 위해 달려가는 증오의 네가 있었다. 너의 눈에는 저 자의 목을 조르고 그 사이에 증오를 쑤셔 박고 있는 네가 보였다. 그리고 지금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네가 있었다. 혼자 있었다. 시끄러운 모든 것 사이에서 너만이 조용히 있었다. 죽음은 네가 바라보는 괴물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쑤셔 박은 증오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저 괴물은 아무것도 없다. 너도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텅 빈 곳에 소리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증오를 보낸다고 돌아오는 것은 없다. 오히려 증오 사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저 괴물이 바로 원하는 바일 것이다. 너는 태풍 같은 자연재해에 당했다. 태풍이나 지진에겐 복수를 할 수 없다. 복수와 분노는 돌아와야 해결된다. 그와 너는 비어있기에 서로 고요했다.

저 사람과 너는 같은 위치에, 그리고 양 끝에 등을 돌리고 서 있다. 어떻게 보면 붙어있고, 어떻게 보면 떨어져있다. 너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잃은 뒤에야 저 사람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너를 보며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아내를 잃고도 범인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들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럴 수 없었다. 저 사람을 너는 미워할 수 없었다. 지독한 공허감. 저 사람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너는 저 사람의 눈에서 아무 감정도 볼 수 없었다. 너는 도망가듯 도망쳤다. 회사에는 사표를 냈고 집은 팔았다. 그곳에서 살 용기가 너에겐 없었다. 너는 떠났고, 도망쳤고, 그런 자신을,

 

겁쟁이인 너를 그렇게 용서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생각은 끊겼다. 잠들지 않았었다. 잠들 수 없었다. 알고 있는 사실은 새벽처럼 다가왔다. 용서. 비겁. 도망. 너는 일어난다. 절은 당신이 찾아올 때도 고요했고, 당신이 나갈 때도 어김없이 고요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의 산안개가 자욱한 새벽이었다. 아직 여명조차 오지 않은 세상으로, 너는 그 어두운 곳으로 나간다. 어떠한 통보도 하지 않고 너는 다시 절 밖으로 나섰지만, 비구니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너를 배웅했다. 절의 시간은 바깥의 세상보다 몇 시간은 앞서 있는지 이미 모두들 깨어 있었다.

-가시렵니까.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을 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막혀있는 야속한 목 사이로 바람소리만이 흘렀다. 음식을 거부하는 하는 내장을 추스르며, 음식을 원하는 머리를 타이르며, 너는 다시 고요함 속을 떠난다. 이 세상에 저 절만큼 조용한 곳은 없으리라, 너는 생각했다.

 

 

산속에는 방향이 없었기에, 달이 지는 방향으로 걷는다. 세상은 아직 새벽이라 달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달은 덜 채워져 있었다. 달을 물끄러미 본다. 문득 천진난만한 생각을 한다. 달에 가서 달의 소리를 듣는다면, 굉장히 시끄럽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사람들이 달을 보면서 비는 소망이 가득 채워져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소망들은 분명히 저마다 목청 높여 스스로의 소망을 외칠 것 같았다. 사람들의 소망을 달이 들어주지 못하는 것도, 도리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망들이 쌓여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이 아닐까.

너는 달 위를 걷는 상상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달에서 걸을 때마다 발밑을 조심해야하는 너의 모습. 혹시나 토끼를 밟을까 모르니 조심하는 네가 보인다. 한 걸음마다 고민할 것이다. 행여나 다른 사람의 소망을 밟아 부술까 걱정해야한다. 달에 가득 채워져 있을 소망들 사이에 아내의 소망이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아내의 소망을 찾아 달을 걷는 너의 모습이 보인다. 소용없는 짓이다. 너는 아내의 소망을 모른다. 아내의 소망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되묻지만 대답은 없었고, 다시금 가슴이 아렸다. 기억 어딘가, 마음 한켠 그 어디에도 아내는 없었다. 너는 다시금 괴롭다. 문득 어디선가 읽은 문장이 생각난다. 더 이상 아내의 미소를 볼 수 없는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던 꽃에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아내의 얼굴을 찾고 있다. 무의미할지라도. 너는 달을 본다. 덜 채워진 달에는 토끼가 일그러져 있다. 구겨졌다.

 

 

좁은 산길을 따라 계속 내려간다. 먹은 게 없어 제정신이 아닐 때 올랐던 산은 그토록 짧고 너의 발걸음은 미친 듯이 빨랐었다. 하지만 지금의 너에게는 하산은 고통이었다. 산길은 길었고, 안개는 짙었으며, 자주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너는 산을 오르던 길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디로 향하든 아무렇지 않았기에, 왔던 길이 아니더라도 멈추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발걸음에 의미는 없었고, 향하는 곳도 없었다. 한참을 내려갔다. 그리고 산길의 끝자락, 버스 정류장에 너는 앉았다. 벽돌, 빨간 벽돌로 되어있는 작은 시골 정류장. 이리 저리 깨진 빨간 벽돌들. 다니는 버스가 하나인지 두 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류장 표지판은 노화되어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해뜨기 바로 전 가장 어두운 순간이 왔다. 달은 이미 맞은편 산 능선 사이로 져버렸다. 이제 너의 곁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도, 사람도, 없었다. 절은 고요했고, 지금 이곳은 고독했다. 둘은 달랐다. 너는

 

세상이 정지

 

한 것인지, 자신이 정지한 것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1초가 영원 같던 시간 사이로, 버스 한 대가 찾아든다. 새벽의 어둠을 뚫고 밝은 빛이 너의 곁에 멈춘다. 너는 홀린 듯이 일어서서 버스 앞쪽 입구에 선다. 치익. 적막을 찢으며 버스의 문이 열린다. 너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열어준 버스 기사가 너를 본다. 그리고선 묻는다.

-뭐 합니까? 안타요?

너는 고개를 젓는다. 버스.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람이 잠깐 스쳤다.

-그럼 타슈. 뭐 하는 거여.

너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 세상에 가장 묻고 싶었던, 그리고 고독 속에서 찾았던, 고요 속에서 찾았던 말을 꺼내고 싶었다. 너는 버스 기사가 보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목소리만을 갈구한다. 갈구하며 깊게 운다. 울음을 터트린다. 점점 커진다. 기사는 당황한다.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당신 하나가 계속 울면서 비명을 지른다.

-뭔 미친놈이 버스잡고 난리여. 젠장 오늘 액땜-

치익, 하며 버스 문이 닫힌다. 버스 기사의 마지막 말은 묻힌다. 버스는 순식간에 멀어진다. 너는 다시 혼자된다. 정류장 앞 도로에 무릎 꿇고 너는 운다. 소리 없이 울고 있다. 빛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너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 새벽은 영속할 듯 너를 잠식했다. 바람소리 흉하게 나는 너의 목을 간신히 움직여 너는 터져 나오듯이 말한다.

-어디로.

길은 멀리 끝이 보였다. 버스는 빛을 뿌린다. 이제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없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