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게시물ID : humorstory_1323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ydream★
추천 : 14
조회수 : 303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7/02/03 11:23:20
- 어이없는 패싸움 -
고3때였다.
나름대로 대학 한번 가보겠다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후에도 독서실에서 용을 쓰고 있었다.
한참 개념원리에 몰입해 있는데
드르륵- 하고 삐삐가 울렸다.
같은 반 급우인 봉구의 번호였다.
같은 반이고 곧잘 장난도 치긴 하지만
아주 친하다고 볼 수는 없는 놈이었다.
일단은 같은 독서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십여개의 독서실이 혼재해 있었고
각각 몰려다니는 패거리별로 같은 독서실에 서식중이었다.
봉구는 애석하게도 우리 패거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상당히 귀찮긴 했으나
혹시 이놈이 여자라도 소개시켜주려고 그러나 싶어
휴게실로 가 공중전화로 음성메세지를 확인했다.
“야 랑아 나 봉군데...K고 놈들이랑 붙기로 했다. 너도 나와라.”
상당히 성의없는 메시지였다.
앞뒤 다 빼먹고 무작정 나오라고 하니
도대체 어디로 나오라는 건지를 알아야 했다.
당시에도 핸드폰은 있긴 했으나
고삐리 주제에 핸드폰을 보유하기는 힘들었으므로
녀석의 삐삐번호로 다시 음성메세지를 남겼다.
“붙긴 뭘 붙어 씨뱅아! 도대체 어디를 나오라는 거야!”
내가 남긴 메시지도
마찬가지로 성의는 없긴 했지만
의미전달은 확실히 될 것이었다.
십분 정도 기다리니 다시 삐삐가 왔다.
“여기 나 있는 OO독서실 뒤쪽 공터야...지금 K고 놈들이랑 시비 붙어서 싸우기로 했다.
철수랑 영수도 불렀으니까 너도 빨리 나와. 지금 쪽수가 딸려.“
상당히 어이없는 새끼였다.
K고등학교라면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또 다른 학교였다.
이 동네에는 세 군데의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남고인 우리 학교와 그 옆의 여고,
그리고 남녀공학인 K고등학교였다.
사실 남고생의 입장에서
남녀공학인 K고등학교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악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다.
근처에 고등학교라고는 셋밖에 없었으므로
서로 다른 학교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같은 중학교 출신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실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였다.
무엇보다도 삐삐를 친 봉구라는 녀석은
싸움을 못하는 놈이었다는 사실이다.
뭐 맞짱을 떠보진 않았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봉구는 상당히 온순하며
언제나 친구들에게 놀림당하고 사는 놈이었다.
다짜고짜 붙기로 했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없이
일단 나오라는 곳으로 갔다.
평소에도 워낙 장난을 잘 치던 놈이라
단순한 장난일거란 생각에서였다.
진짜로 싸우는 거면 별로 싸움에 재능도 없는
나같은 녀석을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OO독서실 뒤편 공터로 가보니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에
사람의 형상 몇 개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봉구녀석이 담배를 문 채 쪼그려 앉아 있고
K고 교복을 입은 녀석 세 명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비리비리한게 싸움을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아...왔냐?”
봉구는 땅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일어나서 말했다.
“저 K고 좀만한 새끼들이 내가 혼자라고 깔보고 시비를 걸잖아.
오늘 아주 죽여놓을라고.”
“......”
“이런 텔레토비같은 새끼야. 시비를 건 것은 네놈이 아니었더냐.
아가리를 찢어죽일 녀석.”
“닥치거라 무례한 놈! 이제 곧 나의 벗들이 당도하면 너의 사지를 고이 접어
비행기를 만들어 파란 하늘을 향해 날려주마!”
“어디 마음대로 해보거라 이놈! 이 싸움이 시작되면 너의 눈깔에 빨대를 꽂아
초코우유마냥 쪽쪽 빨아먹어주마.”
“......”
둘 다 주둥아리는 일진이었다.
도대체가 왜 싸우는지는 본인들도 잘 모르는 듯하고
무엇보다도 어이가 없는 것은
왜 셋이나 되는 저 녀석들이
이쪽 일행이 당도할 때까지 봉구녀석을 밟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패싸움이라는 게 보통은
패거리와 패거리가 마주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즉석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상황을 보아하니
시비가 붙은 것은 봉구와 K고의 한 녀석인 거 같은데
어째서 패싸움으로 번진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친구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친절함을 보이다니.
“그래서 언제 싸우는데?”
“조금만 기다려봐. 철수랑 영수랑 민수랑 다 불렀어. 걔들 오면 싸우자.”
“......”
철수나 영수나 민수나
하나같이 싸움과는 거리가 먼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이 싸움을 하러 여기까지 올 리도 없지만
이쪽 패거리가 올때까지 기다려주는
K고 녀석들의 뇌구조가 더 궁금했다.
“너희는 셋이 싸울 거냐?”
“아니. 우리도 두 명 더 오기로 했다.”
“그래?”
“......”
봉구와 대화하면서
맹렬히 욕설을 퍼붓던 때와 달리
나에게는 상당히 부드러운 어조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보아하니 저쪽도 그다지 싸울 마음은 없는 듯했다.
그 상태로 십분이 지났다.
“얌마, 니 친구들 도대체 언제 오냐?”
“아...씨발 춥다...들어가자.”
“조금만 기다리거라 못난 놈들! 사내녀석들이 고작 이 정도도 못 기다린단 말이냐!”
“......”
이 봉구라는 새끼는
싸움도 못하고 쪽수까지 딸리는 주제에
어쩜 이리도 당당하게 녀석들에게 호통을 치는 걸까.
그보다 이토록 친절하게 기다려주는 저놈들은 도대체 뭘까.
나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십분이 더 지났다.
“야 씨발 도대체 언제 오냐! 싸우기 전에 얼어 뒤지겠다!”
“좀있음 독서실 차 간단 말야! 나 걸어가야돼!”
“아 나 진짜...조금만 있어봐봐. 진짜 온다니까.”
도저히 싸우고자 하는 놈들의 대화로 보기는 힘들었다.
이놈들은 아마도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야 임마. 우리 인제 집에 가야돼. 다음에 싸우자.”
“그래 그래. 오늘은 좀 그렇고 주말에 시간 있을 때 싸우자.”
“그래 임마. 내가 삐삐번호 가르쳐 줄테니까 나중에 삐삐쳐.”
이런 어처구니없는 새끼들.
싸움에 다음이 어디 있냐;
애초부터 싸울 마음이 없어보이기는 했다만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날 줄이야.
뭐 어쨌거나 나도 싸우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우선은 우리 쪽이 지극히 불리했으므로.
봉구녀석이 담배연기를 후욱 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쫄.았.냐?”
“......”
도대체 너는 뭘 믿는거냐.
뭘 믿길래 이토록이나 자신만만하냐.
저놈들이 꼭지가 돌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쪽수에 밀려 밟힐 게 뻔한데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뭘 믿고 개기는거냐.
“쫄긴 누가 쪼냐 이 후레아들노무자식!”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너의 내장을 추려내어 줄넘기를 하며 귀가할 것이다!”
“오냐 이놈들! 내 너희들의 성의를 보아 한놈도 남김없이 저 세상으로 고고싱하게 해 줄 터이다!”
하여튼 둘 다 말하는 거 보면...
시라소니가 환생하더라도 이놈들과 입으로 싸웠으면
울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조금 더 앉아 기다리고 있으려니
공터 입구쪽으로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어두워서 얼굴확인은 되지 않았고
교복을 입은 세 사람으로 추정되었다.
조금 더 가까이 왔을 때에야
제일 앞에 선 녀석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오오, 드디어 왔구나. 나의 벗들이여! 이제 저 악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
안타깝게도
제일 앞에 있는 놈은 우리의 친구 철수가 맞지만
뒤의 두 녀석은 K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로써 5:3이 되었다.
“야 임마 왜 불러? 무슨 일이야?”
“얘기했잖아! K고 새끼들이랑 싸운다고!”
“뭐? 싸운다고? 스타 한겜 붙기로 했다는 거 아니었어?”
“스타는 무슨 스타야! 오늘 저새끼들 다 죽여놓을 거야!”
“......”
상대는 이제 다섯인데 무슨 수로?
“쟤네들 내 중학교 동창인데?”
“응?”
그러고보니 철수는 나와도 같은 중학교를 나왔는데...
“어? 너 랑이 아니냐?”
“어라? 병구랑 영구! 니네 오랜만이다.”
“하하, 이자식 잘 지냈냐?”
“야, 이게 얼마만이야.”
어이없게도 새로 온 두 녀석,
철수까지 세 녀석은 모두 나의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근데 여기서 뭐하냐?”
“그러게, 고3이라는 놈들이 공부는 안하고 여기서 노가리나 까고 있냐?”
보아하니 이놈들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에 온 것 같았다.
“야야, 겜방가서 스타나 하자.”
“그래, 4:4 하면 되겠네.”
“K고 대 B고 겜방비 내기 어때?”
“B고는 세 명이잖아.”
“그럼 C중 출신 대 떨거지들 하지 뭐.”
“오케이.”
그렇게 우리는
얼떨결에 겜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봉구는
조금 전까지 싸우기로 했던 녀석들과 같은 팀이 되어
치열한 싸움을 했다.
두시간 정도 게임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봉구네가 3:1로 이겨서 우리 C중 동창들이 겜방비를 냈다.
“잘가라.”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봉구는 녀석들과 즐겁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걸 실화라고 하면
도대체 누가 믿어줄까.
글쓰고 있는 나도 어처구니가 없다.
알랑님 글 펌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