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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과는 크게 다른 '와인의 계절'
게시물ID : humorbest_13242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권종상
추천 : 58
조회수 : 5368회
댓글수 : 5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10/21 11:22:01
원본글 작성시간 : 2016/10/14 12:45:41
와인의 계절이라는 것이 뭐 특별히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낙엽이 하나 둘 쌓여갈 즈음이면 이상하게 레드 와인이 당깁니다. 여름동안 화이트 와인도 사실 몇 병 소비하지 않았고, 크래프트 맥주로 그 뜨거웠던 여름을 달랜 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트렌드라는 면에서도 수제맥주는 올해의 대세였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 조금 쌀쌀해지자 바로 와인 생각이 납니다. 전에 같으면 세이프웨이 같은 수퍼마켓에서 여섯 병 단위로 와인을 사 쟁여 놓았을텐데, 그리고 보니 그런 짓을 안한 지도 꽤 됐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그렇게 할까. 내 벽장 셀러 안의 와인 숫자도 당연히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른바 '저그 와인'으로 불리우는 싸구려 와인들의 맛도 과거와는 달리 크게 좋아졌습니다. 

아무리 포도밭의 가격이 떨어지고, 거품이 꺼진 이후 와인의 위상이 꺾였다 해도 포도는 죄가 없습니다. 항상 자라던 포도는 그 자리에서 자랍니다. 물론 양극화는 포도밭에서도 진행돼 왔습니다. 나파 최고급 와인들이 중국의 신흥 부자들에게 다 팔려나가는 바람에, 나파와 소노마의 최고급 밭은 예전처럼 특별한 케어를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밭들은 과거에 받던 특별한 대우까지 받지 못했습니다. 소출은 늘었고, 포도밭은 사방에 엄청나게 늘어난 상황, 게다가 UC 데이비스의 포도주 양조 관련 학과를 나와 농장 경영에 뛰어든 사람도 엄청나게 많이 늘어난 상태였습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제가 사는 워싱턴주에까지 와서 포도를 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였던 것입니다. 이 정치적인 술은 경기가 좋아지면 가격이 확 뛰고, 수요도 늘지만 경기가 악화되면 바로 수요가 뚝 떨어져 버리는 특성을 지녔던 겁니다.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미국의 은행들을 작살낸 지 거의 10년이 됐지만, 그때 미국이 받은 충격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경기가 회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소비 심리는 확 줄었습니다. 닫힌 지갑이 조금씩 열리고는 있지만, 그것이 주류라는 측면에서는 와인이 아닌 '맥주'로 돌아갔습니다. 이른바 크래프트 비어의 붐이 열렸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와인의 힘이 컸습니다. 사람의 입맛이란 것이 이상한 것이어서, 한번 올라간 입맛은 떨어지기 어려웠던 겁니다. 

버드와이저나 쿠어스 같은 보리차에 알콜타코 개스만 넣은 것 같은 맥주들은 애주가들의 입맛을 돌려놓기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와인에서 느꼈던 그 '입맛의 허영'을 맥주에서도 느낄 수 있길 바랬습니다. 비싼 와인은 아니어도, 10-20달러 선의 와인을 마시던 사람들에게, 수제 맥주 스물 네 병 한 케이스의 가격은 어쩌면 와인 한 병 정도의 가격이었을겁니다. 

그리고 미국은 원래 맥주의 나라였지요. 종교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던 사람들이 그 험한 플리머스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던것도, 사실은 그들이 싣고 온 맥주가 다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맥주는 거의 그들의 식수였던 겁니다. 물을 오크통에 담아 놓으면 상합니다. 상한 물은 탈을 일으키지요. 그러나 맥주는 물보다는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이 더 길었던 겁니다. 이들은 어쨌든 물을 찾아 상륙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의 백인 이주의 역사는 시작됐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미국인들의 입맛이 경제 사정 때문에 그들의 뿌리로 돌아가 버리고 나서 재미있는 일들도 벌어졌습니다. 중저가 와인들의 퀄러티가 놀랄 정도로 향상된 겁니다. 서브프라임으로 인한 대공황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와인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어든 것도 그렇지만,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동산 가격의 대폭락으로 인해 포도원들의 가격도 당연히 떨어졌습니다. 우후죽순처럼 생겼던 중소 고급 와이너리들이 큰 와인 회사들에 합병되거나 문닫는 일들도 비일비재해지면서 포도원들은 포도를 팔 수 있는 곳이 사라졌습니다. 포도는 계속 자랐고, 어쨌든 포도는 수확되어 압착되고 포도즙이 됐습니다. 이게 넘치고 넘쳤습니다. 쌓아 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이것을 글럿 glut 이라고 부릅니다. 

비티컬처리스트 viticulturist 라는 품격 넘치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포도재배자들은 다시 포도 경작자 grape grower 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기로에 섰습니다. 이걸 버리고 비즈니스를 접느냐, 아니면 이 포도를 지금까지는 그들의 '품격 유지'를 위해서 팔지 않았던 중저가 와인메이커들에게 넘기느냐. 현실은 냉혹했고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래서 '매스 와인'으로 불리우던 대규모 양조장들에 나파와 소노마의 최고급 와인용 포도들이 유입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하여, 포도주의 질이 올라가는 역설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아무리 원래부터 맥주의 나라이며 와인의 소비가 상대적으로 적은 나라라고 해도, 미국에서 수입하는 외국 와인의 양은 적지 않았습니다. 유럽 와인이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소비되는 양으로 볼 때, 미국에서 소비되는 양은 거대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수요가 줄어들자, 미국으로 수입되는 와인의 가격조차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프랑스의 5대 샤토나 최고급 부르고뉴 같은 명품들은 중국으로 모두 수입되는 바람에 가격이 크게 올랐지만, 프랑스의 랑그독 루시용 지방 산의 와인이라던지, 스페인, 포르투갈 산 와인의 가격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과거에는 볼 수도 없었던 5달러 짜리 리오하 와인 같은 게 쏟아진 겁니다. 그래서 와인 애호가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게 됐습니다. 생산자들에겐 속 터지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래서 가을을 맞은 저는 이 와인 생각나는 계절에 다시 와인 사냥을 나섭니다. 버젯은 크게 줄었습니다. 저도 한때는 와인 구입에 몇백달러씩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수입이 크게 줄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와인이 가진 그 매력에 과거처럼 제 구매력을 쏟고 싶진 않습니다. 물론 저도 와인 대신 맥주나 독주 소비량도 좀 늘었고, 사실 주량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저도 알게 모르게 이 실속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도 사실인 듯 합니다. 

와인 몇 병을 샀습니다. 꽤 괜찮은 와인 몇 병을 샀는데도 가격은 과거같진 않습니다. 좋네요. 이런 기회를 타서 몇 병 더 쟁여놓고 이렇게 가을의 분위기가 와인을 부를 때 기꺼이 따고 싶긴 합니다. 아직 와인은 내 열정의 리스트에서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나는 아직 낙엽 쌓이는 냄새를 길 가면서 맡게 되면 내가 마셨던 어떤 와인의 향을 떠올릴 정도로 와인이라는 것이 내 생활 속에서 추억을 이끌어내는 매개체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좋은 세상'을 꿈꾸며, 친구들과 와인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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