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06월 21일.
나는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폭우만 쏟아지면 바가지로 집안에 들어온 물을 퍼내기에 바빴다.
죽일놈의 중랑천..
그 뒤로 김포로 이사를 했다.
그치만 우리 아버진 주폭이었고. 우리 어머닌 정말 고생 많이 했다.
3명의 처자식을 두고도 허구헌날 술을 마셨다. 일은 하지 않았다.
삼시세끼 술을 마셨고 오바이트를 했다. 물론 술 심부름은 나의 몫이었다.
누나는 시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딸이라서 굉장히 존중해줬던게 기억에 남는다.
나 술 심부름도 정말 많이 했었지만. 우리 아버지 술 먹고 토하고 술 먹고 토하고 저녁때쯤 우리 어머니 고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바이트 천지던 우리 집. 집엔 고생하고 돌아온 우리 어머니를 반겨주는 상차림 따윈 없었다. 술에 취한 우리 아버지와.. 겁에 질려있던
우리 누나와 나. 하루종일 재봉질하고 돌아온 우리엄마 눈에 보이는건 술에 취한 아버지와 겁에 질린 누나와 나...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얼마나 고되고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으랴......
우리 어머니의 심정이 상상도 안된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생각이 하나 났다.
난 어릴적에 사람을 하나 죽였다.
아주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온 도로들이 빙판길이었는데 여느때처럼 아버지 술심부름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왠 여성이 빙판길에서 자빠진 것 같았다.
어렸지만 느낄 수 있었다.
빙판길에 자빠져서 머리를 부딪혔구나.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구나.
난 술을 사들고 아버지에게 가서 말했다.
저기 앞에 여자가 누워있다. 도와줘야 할 것 같다.
아버진 말했다.
내비둬!
간단했다.
우리 아버지가 내비두라면 내비두는게 우리 집안이었다.
몇시간이 흘렀나.
사이렌소리가 들리길래 나가보았다.
다행이다. 그 여성분을 엠뷸런스에 싣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왜일까.. 하얀 덮개가 그녀의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죽은 것 이겠구나..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난 어릴때부터 관종이 있었던 것 같다.
집에선 그렇게 내 얘기 한 번 못하고 아버지 주무실땐 혹시라도 깨서 술마실까봐
티비조차 마음대로 못보고 자는 척하던 나였지만 학교에선 달랐다.
모든 학우들이 날 좋아했고.
나를 보며 즐거워하던 학우들을 보면 나 또한 너무 좋았다 행복했다.
나는 나를 숨길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 친구들은 나의 기괴한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얼마나 좋은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기브앤 테이크가 확실했다.
시간은 흘러 시골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 빼고..
그치만 우리 누나 이사 온 지 14일만에 가출을 했다.
서울로 도망쳐버렸다.
시골로 이사와서 그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처음보는 친구들과 보낼 수 없었겠지.
그렇게 서울로 도망쳐버린 우리 누나..
임신했댄다!
남친 집에서 얹혀살다가 임신을 해버렸댄다.
난 그래도 우리가족이 너무 좋았고 우리가족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기에
미움보단 누난 어떻대? 가 먼저 나오더라.
그 어린나이들에 애를 낳고 잘 살길 바란 것도 아니겠지.
우리 엄마가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그 남친 집구석에 온갖 모욕이란 모욕은 다 당하고 지웠다. 애를.
그 뒤로 우리 누난 수도권에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잘 다니더라.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는 줄 알았다.
내 고2 무렵 방학때 용돈벌이라도 하려고 학교에서 주선하던 알바를 가려고 새벽부터 나와있었을때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댄다..
에휴 참..
난 고등학교를 기숙학교로 갔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떠나고 싶었겠지라며 그 때 당시 내 심리상태를 상상해본다.
무튼 바로 차를 타고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
많이 위독하시더라 ㅎㅎ
처음 병원 갔을 때 간경화 판정을 받았는데 바로 수술하고 입원했으면 살 수 있었다더라.
그런데 우리 아버지 가족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었을까.
치료 안 한다고 병원에서 소리를 지르며 퇴원하고 술을 마셨댄다.
불과 일주일만에 퇴근한 우리 어머니한테 발견된게 발작일어난 우리 아버지였다.
결국 돌아가시고 장을 치뤘다.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나더라. 정말 그 어린나이에 잘 죽었다 생각이 들더라.